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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연재] 여성영화의 새로운 지도 그리기: 여성주의 영화학의 지속가능성



최근 여성혐오 발언과 여성에 대한 폭력 사건이 급증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아직 미미하긴 하지만 영화에서도 성평등 인식을 고취하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페미니스트 재현의 영화적 실천을 고민하는 사례들이 부쩍 늘고 있다. 더 나아가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가 붙거나 그러한 범주로 분류될 때 낙인이 될 것을 염려했던 기존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마케팅이 펼쳐지기도 한다. 여성참정권 투쟁의 역사를 다룬 <서프러제트>부터 다분히 마초적이었던 시리즈의 전작들과는 달리 강인하고 매력적인 여성 인물들을 내세워 새로운 돌풍을 일으켰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까지, 이런 영화들은 페미니즘을 앞세워 홍보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영화란 무엇인가? 강하고 긍정적인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인가? 혹은 페미니스트 이슈를 담은 영화인가? 아니면 다른 특정한 영화 스타일과 미학을 갖추어야 하는가? 영화산업 내에서의 성적 불평등이나 법적 문제와 같은 실용적인 실천과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혹은 페미니스트 영화 비평과 이론은 무엇인가? 관객 수용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페미니스트 영화란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페미니스트 영화학자들은 1960년대부터 다양한 관점에서 이에 대해 논의해 왔다. 이 논의들은 아마도 매체환경이 급격하게 변화된 지금 새롭게 벼리고 담금질 해야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까지 어떤 논의들이 있었는지 과거를 살펴보고 그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과거는 늘 우리가 어느 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할지, 그리고 현재 무엇이 귀환했는지를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제 18회 <SIWFF 뉴스레터> 1/2호는 제 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기념하여 2008년 개최되었던 국제학술대회 “여성영화의 지도그리기”에서 발표되었던 세계적인 씨네페미니스트들의 발표문을 연재한다. 다음 글들에서 씨네페미니즘의 새로운 방향에 대한 영감의 단초를 발견하고 함께 토론의 장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글: 조혜영 프로그래머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국제학술대회

"여성영화의 새로운 지도그리기(2008. 4. 14 개최)"

연재순서

기조발표   

① 시네페미니즘과 비전의 창조 / 테레사 드 로레티스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주립대학교, 미국)

1부: 여성주의 영화학의 지속가능성

 월드 시네마로서의 여성 영화 패트리샤 화이트 

③ 축제원칙을 유지하기: 제도 만들기에 있어서 현실과 쾌락 사이 / 미건 모리스

2부: 동아시아 여성영화의 현재 

④ 중국와 일본의 여성 영화 감독들: 그들은 하늘의 절반을 떠받칠 수 있는가? / 루이자 웨이

⑤ 한국영화산업에서 여성감독의 위상과 전망 / 안지혜 




월드 시네마로서의 여성영화 


 패트리샤 화이트





우선 이 컨퍼런스와 영화제를 주최하는 조직위원과 스태프 모두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수 년 동안 계속 관심을 가지고 이 영화제를 지켜보면서, 그 활력과 헌신, 영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세계 곳곳의 여성영화인들이 제작한 동시대의 장편 영화들과 그 영화들이 소비되고 인식되는 관점에 대한 나의 근래 작업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데 감사한다. 여성영화 조직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을 통해 나의 학술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나는 ‘여성영화’의 전개가 보편화된 중요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끈질기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월드 시네마’라는 또 다른 영화 연구의 키워드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했다는 점에 동의하면서, 영미권 영화연구의 한 범주로서의 ‘여성영화’의 역사와 인식론에 대한 접근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나는 최근 저작에서 세계 여성 감독들에 의해 만들어진 장편 영화들의 당대적 힘과 유통 그리고 위치 짓기에 대해 논했다.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 문화의 생산물을 이론화하는 데에는 비평적 담론뿐 아니라 프로그래밍과 전시의 정치학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성영화를 한정하는 요소에 대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때문에 더욱, 여성영화라는 개념은 지난 30년 동안 페미니즘 영화학을 고무시켜 왔다. 여성영화를 한정하는 것은 ‘작가’(영화에서 매우 논쟁적인 단어이지만)의 범주인가 혹은 내용의 범주인가? 초기 페미니즘의 ‘정수’(여성들을 반영하는 영화)로 한정되는가, 페미니즘의 액티비즘(여성에 의해, 여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 혹은 포스트페미니즘의 소비 (칙 플릭-젊은 여성들이 좋아하는 영화-chick flicks 시장)로 한정되는가? 페미니즘 영화 연구서 중 하나인 클레어 존스톤의  ‘대항영화로서의 여성영화’에 따르면, 그 범주는 저항적인 것이며 새로운 것이다: “영화에서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것에 반대하기 위하여, 우리의 집단 판타지들은 공개되어야 한다: 여성영화는 욕망의 작용을 구체화해야 하며, 그 목적을 위해 오락영화를 이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오락영화의 아이디어들은 정치적인 영화를 풍요롭게 해야 하며, 정치적 아이디어들은 오락영화를 풍요롭게 해야 한다. 즉, 상호 소통적 과정이 필요하다.” 위의 인용문은 70년대 초반 문화의 페미니즘보다 소비자의 쾌락(사실 더 보편적으로는 ‘쾌락’)을 훨씬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현재의 분위기에 더 적합하다. 즉, 정치적인 것이 유익한 것이라는 존스톤의 주장은 자체-정의된 포스트페미니즘적 풍토에서는 정확한 것이다. 이 섹션의 주제인 ‘여성영화의 지속가능성’은 여성들에 의한 미디어 생산을 조망하는 것만이 아니라(물론 이것도 의미 있다: 여성들의 영화제작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모든 분야-독립 다큐멘터리, 예술 영화와 대중 영화- 에서 흥미로운 방식으로 확대되고 있다), 실제로는 사회적 비평들, 그리고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에 의해 발전된 대중 문화 속에서의 변형 등과 관련하여 여성영화라는 개념의 지속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 번째 십년’[각주:1]이라 불리는 시기 동안, 페미니즘 영화연구는 영미권 영화연구에서 가장 활발한 이론 연구 중 하나로 완전히 자리 잡았으며, 동시에 문학과 예술사에서도 페미니즘 이론 연구가 심오하게 이루어졌다. 일례로 카메라 옵스큐라 저널의 초기 이슈들은 페미니즘 이론과 여성영화 실천 사이의 밀접한 공생 관계를 증명했는데,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여성영화제작의 실천이 다양해지고 확대되면서 관계가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페미니즘 이론을 통하여 여성영화제작의 분야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여성들에 의해 제작된 영화를 페미니즘 정치학과의 관계 속에서 이론화하려는 중요한 시도들은 계속 되었다. 테레사 드 로레티스의 에세이 「aesthetics and Feminist Theory: Rethinking Women’s Cinema」(1985), 주디스 메인의 「The Woman at the Keyhole: Feminism and Women’s Cinema」(1990)는 직접적으로 그 관계를 질문하며, 각각의 경우 ‘여성영화’의 모호성은 그 글들을 더 생산적으로 만들었다.[각주:2]로레티스와 메인은 여성영화를 여성들을 위한 영화라고 한정하는 시장의 범주를 넘어서서 역사적 측면에서, 그리고 페미니즘의 미래라는 측면에서 여성 작가, 텍스트, 그리고 호명의 교차점에 대해 질문 한다.  

나는 최근의 페미니즘 영화학이 여성들의 영화제작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여성감독의 작업을 강조하는 것은 영화연구의 커리큘럼이나 학구적인 출판물에서 ‘여성과 영화’를 제도화하는 효과를 지속할 뿐이다. 버틀러의 「Women’s Cinema: The Contested Screen」(2002)은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진 가장 포괄적인 텍스트이다. 이 글은 페미니즘 영화 연구의 역사와 인식론을 효과적으로 중재한다. 이 전의 어떤 학자들보다 더 글로벌한 예시와 구성을 택한 버틀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소수개념을 차용하여 범주화 문제를 풀어낸다: “동시대의 여성영화들의 형식과 관심, 구매자들의 다중성은 이제 대항-영화의 가장 유연한 정의마저 넘어선다. 여성영화는 이제 대항적이라기보다 ‘소수적’으로 보인다. “여성영화는 영화적 담론 혹은 내셔널한 담론의 주인공으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미 확립된 전통의 컨벤션을 혼합하고 개정하며 경쟁하는, 활용적 양식이다…”나는 글로벌 여성영화가 다중성과 요약불가능성을 갖는다는 버틀러의 설명에 동의하며, 또한 ‘소수적 영화’라는 용어가 특별한 실천에 대해 설명할 때 생산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월드 시네마로서의 여성영화’라는 구문의 모호성을 즐겁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강력한 페미니즘의 뼈대가 없다면, 여성영화는 너무나 자주 휴머니즘의 아젠다를 설파하는 “월드 시네마”의 예시로 동시대의 영화 문화 안에서 ‘재영역화’될 것이다. 따라서 월드 시네마에 대한 동질화된 담론들에 대립하기 위해서, 현재의 미디어 문화에서 트랜스내셔널한 페미니즘의 역사와 실천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21세기 초 ‘여성영화’의 위상에 대한 조사를 통해 영미권 페미니즘 영화학의 범주(작가, 미학과 호명)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범주들은 제작, 배급, 전시, 비평과 학문에 대한 제도화된 질문들을 참작하여 이론화한 것이다. 뉴욕에 본사를 둔 배급업체 Women Make Movies에서 일했던 경험을 통해 나는 세계 ‘여성영화’의 활력과 페미니즘 미디어학 사이의 불일치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 불일치는 다양성이나 조직적 지원 여부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여성영화는 작가영화, TV, 교육용 다큐멘터리, 할리우드의 장르영화, 그리고 다양한 내셔널 시네마와 독립장편, 예술 비디오와 액티비즘 비디오 등등을 포괄하고 있다. 동시대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의 정치학은 글로벌한 언어와 영화의 영향권을 인식하고 동원하는 이런 분야들과 유기적으로 연관될 필요가 있다. 현재는 미국의 유색인종 여성들과 비서구 지역 페미니스트들의 액티비즘과 이론화 시대이며, 이 시대는 우리에게 여성영화라는 제명 하에 “어떤 여성”이 포함되는가를 질문하도록 한다. 트랜스내셔널한 관점을 통해서만이 페미니즘과 여성의 미디어 제작 및 수용의 교차점은 자리매김될 수 있으며, 또한 존스톤이 말한 “우리”가 집단적 판타지와 집단성의 판타지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가 너무 많아서, 여성 작가라는 사실 만으로는 어떤 효과도 가질 수 없다. 주목할 만한 내셔널 시네마의 예시 두 가지를 살펴보자. 역사상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여성들이 만든 영화가 전체의 50%에 달했다. 이는 “여성영화로서의 프랑스 영화”라는 구문을 의미 있게 한다. 수출을 위해 예술 영화를 만들거나 자국민을 위해 대중적인 영화를 만드는 이란 여성감독들의 인상적인 숫자는 이슬람의 민족주의와 “리얼리즘” 문화 코드 사이의 트랜스내셔널한 충돌의 표식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주의를 이끌어 냈다. 

테레사 드 로레티스는 “여성영화의 독특성과 미학적 형식이라는 문제를 호명이라는 관점- 누가 누구를 위해 영화를 만드는가,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 누구를 향해 보고 있으며 이야기 하고 있는가-에서 재고”해야 한다는 매우 생산적인 제안을 했는데, 이는 ‘사회적 테크놀로지로서의 영화의 더 광범위한 공공 영역’이라는 관점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과 시의 적절하게 연관된다. 그러나 그녀의 책이 출판된 후 20년이 지난 지금,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라는 질문은 이 사회적 테크놀로지가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새로운 공간, 새로운 주체를 통합하면서 변화하고 있다,

어디에서 여성들이 영화를 만들고, 누구를 위해, 그리고 누가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에 대해 쓰는가? 영화제 프로그래밍의 정치성은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된다. 10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여성영화제는 수 백 편의 영화들- 장편, 다큐멘터리, 단편, 비디오와 35mm로 찍힌 작품들- 을 상영해 왔다. 그리고 아시아 여성영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네트워킹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 왔다. 여성영화제와 컨퍼런스의 조합은 “시네페미니즘”의 기원을 상기시킨다 – 클레어 존스톤과 팸쿡이 만든 팜플렛 ‘Notes on Women’s Cinema’는 영화제 프로그래밍을 싹 틔웠고, 에딘버러 영화제와 런던의 국립극장에서의 행사들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지난 달로 30주년이 된 크레테이유 국제여성영화제를 제외하고는[각주:3], 오늘날 북미와 유럽 대부분의 주요 영화제들은 이런 행사를 그만두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매드 캣 국제영화제처럼 대중적 모험과 커뮤니티에 기반한 이벤트들이 국지적으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1990년대 초반 이래 가장 놀라운 발전을 보이고 있는 것은 GLBT 영화제로, 이 영화제들은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 영화제들은 여성들이 만든 독립영화를 장려하는 한편, 다양한 성원들과 아젠다에 봉사한다. 덜 정치화되고 더 유명한 활동 무대들과 전례 없는 양적인 팽창, 그리고 국제영화제의 영향력 등은 여성영화에 헌정되었던 이벤트들을 보잘것없게 만들었다. 많은 여성영화들이 토론토, 로테르담, 베를린과 선댄스 영화제의 경쟁부분에서 소개되어 중요한 성과를 올렸고 칸에서도 수상을 했음에도, 영화제 네트워크에 의해 조성된 ‘포스트페미니즘’ 문화의 분위기 속에 ‘여성영화’에 대한 인식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논쟁적이라 하겠다. 

영화제나 비평의 틀과 같은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나는 또한 문화와 재현 그리고 세계화에 대한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 이론의 독해를 통해, 페미니즘의 공공 영역의 일부인 국내의 영화문화와 ‘세계 영화문화’에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에도 관심이 있다. 주류 영화제들은 자국 영화들을 상품화하면서 문화의 청지기로 기능할 수 있지만, 여성영화제나 GLBT영화제처럼, 영화제는 또한 타자의 목소리와 시선을 유통시키는 유희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배급과 상영을 위한 지지도 필요하지만, 프로그래밍과 수용을 위한 확고한 페미니즘적 담론도 필수불가결하다. 쇼히니 쵸드리는 “지역적이고 글로벌한 전망 속에서 민족적인 것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월드 시네마라는 용어가 학문적으로 통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여성영화인들의 작품은 협소한 민족의 틀을 초월하여 주체의 문제 혹은 진술과 호명의 문제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전망을 요구한다. 여성영화와 월드 시네마라는 용어 사이의 긴장이 유지되는 것처럼, 그들 내부의 가시적 차이 또한 유지되기를 희망한다. 

트랜스내셔널한 여성영화 실천의 다양한 국면들과 여정에 접근하기 위해서, 나는 내셔널하면서 지역적인 컨텍스트의 범위에 있는 영화인들, 즉 아르헨티나, 보스니아, 캐나다, 덴마크, 프링스, 인도네시아, 이란, 한국, 파키스탄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살고 있으며 국내 관객들과 트랜스내셔널한 관심들(페미니스트, 경제, 미학과 정치)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함께 염두에 두고 장편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을 살펴보고 있다. 명성과 가치라는 상황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서, (다큐멘터리나 단편영화보다는) 장편영화 프로덕션을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여성영화들은 국제영화제, DVD와 인터넷 다운로드 사이트를 통해 해외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북미 영화관에서는 거의 대부분 볼 수 없다. 한편 미학적 우수성, 감식안과 작가주의, 민족 운동, 그리고 틈새시장을 근거로 월드 시네마를 개념화하는 것은 종종 여성영화인들이 만든 작품의 중요성과 작가와 재현(여러 가지 의미에서)의 문제를 축소하거나 잘못 인식하게 만든다. ‘외국’ 예술극장 상영물에 대한 담론을 세계화하면서, 세계적인 ‘작가’, 그리고 인권 문제에 대한 논의들은 여성들의 이야기나 여성감독의 시각을 단지 문화자본으로서 전유하려는 경향이 있다. 더들리 앤드류, 토마스 앨세서, 프레드릭 제임슨과 같이 저명한 남성 학자들은 지정학적이고 문화적인 견지에서 ‘월드 시네마’를 재고했고, 이를 통해 세계화, 문화교류와 민족적 알레고리의 형성 과정을 분석했지만, 그것들을 구조화하는 젠더의 축에 대한 이해는 배제되었다. 

전세계의 여성들이 만든 영화들은 북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인식되는가? 예술극장에서는 휴머니즘의 견지에서 여성영화의 영역을 상품화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성들이 만든 영화들은 거대-예산 오락영화를 제외하고 영화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그 영화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문맥에서 혹은 이런 이동을 가능하게 한 집단적이거나 정치적인 카테고리의 문맥에서 대중적으로 이해되는 경우는 없으며, 오히려 ‘감수성’, 위기, 인간의 영혼, 지역색의 표본으로 이해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월드 시네마로서의 여성영화’라는 구문은, 미주유럽의 정전을 넘어서는 여성영화를 건설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면서, 동시에 몇몇의 예를 통해 여성영화의 독특성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휴머니즘의 전유를 막으려는 의미가 있다. 이 구문은 존스톤이 말한 ‘대항영화로서의 여성영화’에 대한 반향이며, 그녀의 저항적 시각에서 우리의 기원이 얼마 멀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동시대의 여성영화들은 자주 주류 젠더 정치학과 영화 언어, 그리고 무수한 지역적 실천들에 ‘저항’한다. 그러나 국제 영화제와 예술극장에서 소비되기 위해 틈새 시장을 파고 드는 영화들은 저항적 접근에 대해 침묵한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국제적인 인도주의의 표본으로 자유주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월드 시네마’를 근본적으로 소비의 범주로 만드는 일인 셈이다. 

전통적인 관점과 유행하는 관점 모두에서, 여성상이 얼마나 ‘진정으로’ 문화를 대변하도록 요구 되었는가를 비평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개별 여성영화인들을 위치 짓는 문제로 전개될 수 있다. 영화 전시와 저널리즘의 ‘유행 만들기’가 특히 소위 ‘포스트페미니즘’이라 불리는 문화(서구 여성 운동의 목적이 대체로 성취되었고, 그러므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평등의 “문제들”을 덜-개발된 국가들의 문제로 방치한) 내에서 여성영화들을 어떻게 자리매김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예컨대, 디빠 메타의 <Water>는 인도 여성들의 억압을 다룬 그녀의 3부작 중 세 번째 영화이다.  이 영화는 1930년대 인도에 사는 한 과부의 고난의 초상을 통해 비서구 지역 여성들에 대한 자유주의적 휴머니스트의 담론을 보여준 완벽한 예술 극장의 귀감으로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미국에서 널리 홍보됨으로써 위치지어졌다. 이 과정에서 Mehta 자신의 트랜스내셔널한 위치, 그리고 미학적 선택과 관련된 디아스포라적 정체성과 내셔널 시네마의 복잡다단한 협상은 무미건조한 것이 되고 말았다. 결국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세팅, 중심이 되는 러브스토리, 그리고 간디의 기원 등은 여성의 권익과 관련된 이 영화의 정치적 위상을 이해되기 쉬운 것으로 변화시켰다. 심지어 영화의 논쟁적 성격, 메타의 용감함과 노골적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 인도의 후진성을 강조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 영화의 제작을 막으려 했던 힌두 근본주의자들의 이야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영화는 캐나다 작품으로 출품되어 2007년 오스카 최우수외국어작품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이 상은 가장 할리우드 중심적인 방식의 ‘월드 시네마’ 보기이겠지만, 노미네이션과 국가가 관계하는 여성영화의 프로모션은 여성영화인들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인 셈이다. 또 다른 예를 인용해보자. 마제인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는 빈센트 파로노도와 공동 연출한 것으로, 이란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베스트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오스카에서도 선보였는데, 이 영화는 상영시간을 놓고 픽사와 경쟁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여성영화의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과 수상은 문화 생산자로서 여성을 참여시키는 영화의 순환과 기술의 세계화를 재조직하는 방식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메타, 사트라피, 그리고 세계의 여성 장편 영화감독들은 (미주유럽의 영화제들과 시상식에 한정된 것으로서의) ‘월드 시네마’와 ‘예술 시네마’, 아마츄어리즘과 페미니즘을 포함하여 세계화의 가치에 대한 수 많은 담론들에 전략적으로 참여한다. 예를 들어,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다수의 국제영화제 영화들은 동시대 여성들의 인권 문제들을 예술영화와 오락영화 모두의 언어와 규칙들을 사용하여 성공적으로 중재한다. 일반적인 코드와 잘 알려진 배우, 화제성 있는 주제 등을 통해 로컬 관객들에게 접근하면서, 그들은 또한 파이낸싱, 전시, 비평적 찬사, 페미니즘 이론 및 정치학 등등의 트랜스내셔널한 순환과 협상하고자 한다. 내셔널 시네마의 국제적 합작물 혹은 국제 경쟁력을 지닌 생산물로서 이 영화들은 익숙한 멜로드라마의 스타일이나 젠더화된 민족의 알레고리 속에서, 여성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여성의 권한을 복합적인 방식으로 배치한다. 이 영화들은 검열, 자국에서의 비난 혹은 칭찬, 그리고 휴머니즘의 과대광고, 혹은 국외에서의 무시 등을 자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예를 들겠다. <그라바비차>에서 보스니아 감독 야스말라 즈바니치는 감금과 고의적 강간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보스니아 전쟁이 남긴 것들을 탐색한다. <Love for Share>에서 니아 디나타는 현대 자카르타에서 벌어지는 인도네시아의 다혼제(일부다처제)에 대해 다중적 내러티브를 통해 접근한다. 즈바니치의 영화는 발칸의 전쟁들이 미디어의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국제 관객들에게 말 걸면서 동시에, 그 지역의 관객들에게는, 세르비아인들이 부정하든, 보스니아인들이 부끄러워하든 간에 집단 강간의 유산에 대한 공공의 책임에 직면하게 한다. <Love for Share>는 젊은 여성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도네시아 포스트-수하르토 영화 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트랜스내셔널한 액티비즘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슬람 세계의 이슈에 접근하면서, 포스트모던하고 범아시아적인 상업적 미학을 보여주었다. 이 두 영화 모두 개인과 집단의 문제를 강조하는 리얼리즘적 내러티브의 컨벤션과 협상하며 책임, 고백, 그리고 세대의 유산을 이야기했다. 이들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방언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의미 있는 페미니즘적 충격과 월드 시네마의 접합을 제안했다. <그라바비차>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독일과 보스니아(Bosnia-Herzogovina)가 공동제작한 이 영화의 하부조직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영국과 미국의 예술극장이 이 영화를 배포했다. <Love for Share>는 오직 서구의 영화제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디나타의 영향력은 상당해서, 여성들이 감독한 페미니즘 옴니버스 영화 <Chants of Lotus>는 올해 자카르타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    

나는 197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여성영화인들의 작품을 재발견함으로써 강력한 정치적 충동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이론의 의무에 대해 논하던 페미니스트들의 활동과 학문으로부터 기인한 ‘여성영화’라는 개념이 포스트 페미니즘과 뉴미디어 시대에 새로운 도전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에 유념하고자 한다. ‘sisterhood is global’이라는 이차 페미니즘 운동 2nd wave feminism의 주장은 찬드라 모한티에 의해 비판되었지만, 이 구호가 가진 힘과 명백함, 접근 용이성 등을 이유로 인더팔 그레왈을 비롯한 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사비아 수마르가 만든 파키스탄 영화 <침묵의 물Silent Waters>에 대한 에세이에서 프리야 자이쿠마는 트랜스내셔널한 여성영화 문화의 작품이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현격한 차이를 인정하는 동맹과 결속에 대한 모색’[각주:4]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관심들에 접근한다. 여성영화의 국면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글로벌한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한’ 질문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Women’s Cinema as World Cinema


Patricia White

I want to extend my most sincere thanks to Mi Young Park In young Nam and all the conference and festival organizers and staff. I have been avidly following the festival for a number of years, impressed with its vitality, commitment, and impact. My scholarly work is profoundly shaped by my involvement with and interest in women’s film organizations and I welcome this opportunity to share some of my recent thinking on contemporary feature filmmaking by women filmmakers from around the world and the frameworks within which it is consumed and made intelligible. I will begin by very briefly addressing the history and epistemology of “women’s cinema” as a category in Anglophone film studies, acknowledging that while its deployment has had its own universalizing consequences it affords optics for viewing another cinema studies keyword-- “world cinema”--in urgent and productive ways. My current book project addresses the contemporary strength, circulation and positioning of feature filmmaking by global women directors. It calls for attention to the politics of programming and exhibition as well as critical discourse in theorizing transnational feminist cultural production. 

The concept of women’s cinema has animated three decades of feminist film scholarship even as, or quite likely because, its parameters remain open to debate. Is it a category of “authorship” (itself a contested term in cinema), or content? Is it defined by a proto-feminist “essence” (the cinema that reflects women), feminist activism (the cinema women make by and for themselves), or postfeminist consumption (the market for chick flicks)? In one of the founding documents of feminist film studies, Claire Johnston’s “Women’s Cinema as Counter Cinema,” the category is both oppositional and emergent: “In order to counter our objectification in the cinema, our collective fantasies must be released: women’s cinema must embody the working through of desire: such an objective demands the use of the entertainment film. Ideas derived from the entertainment film, then, should inform the political film, and political ideas should inform the entertainment cinema: a two way process” (33-34). Johnston’s memorable quote anticipates a current climate that is much less suspicious of consumer pleasures than was the cultural feminism of the early 70s. Yet it is precisely in such a self-defined postfeminist climate that Johnston’s insistence on politics is salutary. This panel’s title: the sustainability of women’s cinema, addresses not just the prospects for the production of media by women—these are good: women’s filmmaking is expanding in exciting ways in all sectors —independent documentary, art cinema and popular cinema---and in most countries, but also the sustainability of the concept of women’s cinema—linked as it is to the politics of self-representation and transformations of public culture advanced by transnational feminism.

In what might be called its “second decade,”[각주:5]  feminist film studies was fully established as one of the most vital theoretical inquiries in Anglophone film studies, and it shaped feminist theoretical inquiry in literature and art history profoundly as well. Yet by the late 80s, the near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feminist theory and women’s film practice that characterized, for example, the early issues of the journal Camera Obscura, had been diffused by increasing scholarly attention to classical Hollywood film and by the diversity and expansiveness of women’s filmmaking practice, which made full accounting for this realm of cultural production impossible. Yet the field continued to be characterized by significant attempts to theorize filmmaking by women in relation to feminist politics: Teresa de Lauretis’s essay “Aesthetics and Feminist Theory: Rethinking Women’s Cinema,” (1985) and Judith Mayne’s The Woman at the Keyhole: Feminism and Women’s Cinema (1990) directly interrogated the term; for each, the very ambiguity of “women’s cinema”[각주:6] made it productive.  De Lauretis and Mayne go beyond the market category of films made for women to pose questions about the intersection of female authorship, text, and address, historically and on the horizon of a feminist future.

When current feminist film scholarship attends to contemporary women’s filmmaking, it is often as an effect of the institutionalization of “women and film” in the film studies curriculum and in the academic publishing that attends it. Allison’s Butler’s Women’s Cinema: The Contested Screen (2002) is the most expansive of such teaching texts—it constitutes a significant intervention in the history and epistemology of feminist film studies. More global in her examples and framework than previous scholars, Butler makes sense of the categorization problem by adapting Deleuze and Guattari’s concept of the minor: “The plurality of forms, concerns and constituencies in contemporary women’s cinema now exceeds even the most flexible definition of counter-cinema. Women’s cinema now seems ‘minor’ rather than oppositional (21)….” She explains: “Women’s cinema is not ‘at home’ in any of the host of cinematic or national discourses it inhabits, but ... is always an inflected mode, incorporating, reworking and contesting the conventions of established traditions….” (22) While I embrace Butler’s account of the plurality and irreducibility of global women’s cinema, and I find the term “minor cinema” generative in relation to specific practices, today I want instead to propose and entertain the ambiguities of the phrase “women’s cinema as world cinema.” Without a feminist framework of reception, women’s films are too often “reterritorialized” through contemporary film culture as examples of “world cinema” promoting humanist agendas. To cut across such equalizing discourses of world cinema, I suggest we claim a major role for transnational feminist histories and practices in current media culture.  

Surveying the status of “women’s cinema” in the early twenty-first century persuades me that the categories of Anglophone feminist film scholarship (authorship, aesthetics, and address) remain vital. Yet they must be framed by consideration and theorization of institutional questions—of production, distribution, exhibition, critical reception, and scholarship. My service on the board of the New York-based distributor Women Make Movies has highlighted for me the disparity between the vitality of women’s media-making around the world and the focus of feminist media scholarship, which does not adequately account for this diversity and for its political and organizational supports. Women’s cinema today encompasses auteur films, television and educational documentaries, genre films in Hollywood and other national cinemas, independent first features, art and activist video, and so on, the politics of contemporary transnational feminism need to be articulated with these sites, acknowledging and mobilizing the global language and reach of cinema. Decades of activism and theorizing by US women of color and non-Western feminists demand that we ask “which women” are include under the rubric.  Only from a transnational perspective can the intersections of feminism and women’s media production and reception be mapped, and Johnston’s “we” opened up to interrogate fantasies of collectivity as well as collective fantasies. There are simply too many “films by women” in the world, all over the world, for female authorship alone to have any predictable effects.  To take two notable national cinema examples: in France the number of films by women has attained 50%, an historical first; it might make sense to speak of “French cinema as women’s cinema.” In Iran, the impressive number of women directors making national-popular as well as art cinema for export has provoked attention to feminism as a sign in transnational encounters with Islamic nationalist and “realist” cultural codes. Film industries in both contexts enjoy significant state support.

Teresa de Lauretis’ generative proposal that we “rethink the problem of a specificity of women’s cinema and aesthetic formsin terms of address—who is making films for whom, who is looking and speaking, how, where and to whom” (135) remains timely in its insistence that women’s cinema be considered in terms of “the wider public sphere of cinema as social technology” (134). However, twenty-years after her essay’s publication, the whos, hows and wheres have shifted, as this social technology incorporates new technologies, new spaces, new subjects. Where in the world are women making movies, and for whom, and who is seeing and writing about them? 

The politics of festival programming is a good place to start. This festival in its ten-year history has showcased hundreds of films—features, documentaries, shorts, work shot on video and 35mm-- and contributed strikingly to the global visibility of and opportunities for networking within Asian women’s cinema. The convergence of this conference with a women’s film festival recalls the very origins of “cinefeminism” –Claire Johnston and Pam Cook’s pamphlet Notes on Women’s Cinema, grew out festival programming: a women’s event at the Edinburgh film festival and a season at the National Film Theatre in London. Yet today most of the major North American and European festivals—with the notable exception of Films de femmes in Creteil, France which celebrated 30 years last month[각주:7] —have ceased. While wome community-based women’s and girls’ events have arisen in their stead,[각주:8]  the most striking related development since the early 1990s has been the international explosion of lgbt film festivals, which, while they do promote independent work by women, serve different constituencies and agendas. In the less politicized, more prestigious arena, an unprecedented increase in the number and clout of international film festivals has eclipsed events dedicated to women’s work. Arguably, while women’s films are showcased at Toronto, Rotterdam, Berlin and Sundance–and there have been significant successes by women’s films in competition at Cannes (though still only one Palme d’Or winner, Jane Campion’s Piano)—there is little consciousness of “women’s cinema” as such in the “postfeminist” cultural climate fostered by the festival network.

As I hope my emphasis on institutions like festivals and critical frames makes clear, I’m interested in how transnational feminist theory’s readings of culture, representation and globalization can illuminate the increasing participation of women in national and “world cinema” cultures as part of a feminist public sphere. Mainstream film festivals may commodify national cinemas and serve as cultural gatekeepers, but, like women’s and lgbt festivals, they are also ludic spaces that put other voices and visions into circulation. An explicit feminist discourse around programming and reception as well as advocacy around distribution and exhibition is essential. Shohini Chaudhuri notes that the term world cinema has seen renewed scholarly currency for its ability “to assert the importance of placing the national within regional and global perspectives” (1). The work of women filmmakers demands such perspectives, whether through subject matter or strategies of enunciation and address that exceed narrowly national frameworks. Retaining the tension between the terms women’s cinema and world cinema, I hope to keep differences visible within both.

Addressing different sites and itineraries of transnational women’s film practice, my project looks at filmmakers from a range of national and regional context-- Argentina, Bosnia, Canada, Denmark, France, Indonesia, Iran, Korea, Pakistan, Taiwan, and the U.S. --who are making feature films responsive to both national audiences and transnational concerns--feminist, economic, aesthetic and political. I am looking at feature film production (rather than documentary or shorts) in order to interrogate regimes of prestige and value, not to replicate them. International film festivals, DVD labels and internet download sites are facilitating international exposure for these films, many of which will not obtain North American theatrical release. Yet conceptualizations of world cinema based upon aesthetic excellence, connoisseurship and auteurism, or national movements, waves, and niches, often minimize or misrecognize the significance of women’s filmmakers’ production and the questions of authorship and representation—meant in multiple ways—that it raises. Globalizing discourses of “foreign” arthouse fare, world-class “auteurs,” and human rights issues tend to appropriate women’s stories and women directors’ visions as cultural capital. Influential reconsiderations of “world cinema” in geopolitical and cultural terms by such formidable male scholars as Dudley Andrew, Thomas Elsaesser, and Frederic Jameson analyze processes of globalization, cultural exchange and national allegory, but without understanding the gendered axes along which these are structured. 

How are the films women are making worldwide received and made intelligible in North America? In the arthouse sector, we see the commodification of a range of women’s production in humanist terms. Put succinctly, films by women are on the increase in all but the biggest-budget entertainment sectors of film culture, but they are rarely publicly understood in the context of feminism or of any collective or political category that might have enabled this shift, but rather as exemplars of “sensibility,” risk, the human spirit, or local color. In this sense my phrase “women’s cinema as world cinema,” while it stresses the need to construct women’s cinema beyond the Euro-American canon, is meant to mark the humanist appropriation of the exemplarity of women’s cinema that renders its specificity illegible. Echoing Johnston’s “Women’s Cinema as Counter Cinema” the phrase takes the measure of our era’s distance from her oppositional vision. In fact contemporary women’s work frequently does “counter” mainstream gender politics and film language and practices in myriad local ways; yet its positioning in a market niche for international festival and arthouse consumption mutes its address. Similarly, the liberal expropriation of women’s voices as exemplars of international humanitarianism constructs “world cinema” primarily as a category of consumption.   

Critical accounts of how the figure of woman is asked to speak “authentically” for culture—in terms of both tradition and taste—can be extended to the positioning of individual women filmmakers. It is important to account for how the “tastemaking” functions of film exhibition and journalism position women’s work, especially within so-called postfeminist culture, in which the aims of the western women’s movement are taken to be largely accomplished and therefore go unremarked, with remaining equality “issues” displaced onto less-developed nations. Take, for example, Deepa Metha’s Water (2006), the third in her trilogy of stories about Indian women’s oppression. The film was positioned by its festival presentations and wider publicity in the U.S. as a perfect arthouse emblem of liberal humanist discourse on non-western women in its portrayal of the plight of widows in 1930s India. In the process, complex negotiations of diasporan identity and national cinema involving Mehta’s own transnational positioning and aesthetic choices were flattened out. Ultimately, Mehta’s film’s setting in the past, its central love story, and invocation of Gandhi rendered its political stand regarding women’s rights easy to assimilate, even as stories of Hindu fundamentalists’ shutting down the film’s initial production were circulated to emphasize the film’s controversy and Mehta’s bravery and outspokenness and arguably India’s backwardness. The film received visibility through its 2007 Oscar nomination for best foreign language film—significantly, as Canada’s entry. This award may the most crass and Hollywood-centric way of looking at “world cinema,” but such nominations—and the promotion of women’s films by the nations concerned--are a measure of women filmmakers’ increasing impact. To cite another example: Marjane Satrapi’s Persepolis, co-directed with Vincent Parranaud, won the jury prize at Cannes last year despite Iranian objections to the film’s inclusion. It showed up at the Oscars with a nomination in the best animated feature category—giving Pixar a run for, if not its money, at least its airtime. Such competitions are one example of ways in which globalization’s reorganization of cinema circuits and technologies structures women’s participation as cultural producers. 

Mehta, Satrapi, and women feature filmmakers from around the world participate strategically in a number of discourses of globalizing value, including “world cinema” and “art cinema” (as defined by Euro-American film festivals and awards circuits), auteurism, and feminism itself. For example, a number of international festival films by women successfully mediate contemporary women’s human rights issues though through the languages and institutions of both art and entertainment cinema.  Addressing local audiences through generic codes, well-known actors, and topical themes, they also attempt to negotiate transnational circuits of financing, exhibition, acclaim-- and of feminist theory and politics. As international co-productions or more or less contested products of national cinemas, they deploy the authority of women speaking about women’s issues in complex ways, sometimes using familiar styles of melodrama or gendered national allegory. They may be often greeted with censorship or censure—or acclaim--at home and humanist hype—or ignored--abroad.

Let me mention two examples: in Grabavica: Land of my Dreams, Bosnian director Jasmila Zbanic explores the legacy of the Bosnian war though the story of a woman survivor of detention, systematic rape, and forcible impregnation, and her relationship with her now-adolescent daughter. In Love for Share, Nia Dinata addresses polygamy in Indonesia in a multipart narrative set in contemporary Jakarta. Zbanic’s film speaks to an international audience for whom the Balkan wars are a living media memory, addressing at the same time local and regional audiences who are differentially confronted with public accountability for the legacy of mass rapes, whether Serbian denial or Bosnian shame.  Love for Share partakes of what Fatimah Rony characterizes as an exciting post-Suharto film culture in Indonesia in which young women play a central role. The film incorporates a postmodern, Pan-Asian commercial aesthetic while addressing an issue that is the focus of transnational activism in the Islamic world. Both films negotiate realist narrative conventions emphasizing the individual and questions of collectivity--including accountability, testimony, and generational legacies. Moving beyond national borders to be heard, they nevertheless refuse to give up local idioms, suggesting a significant feminist impact on world cinema’s current conjuncture. An Austrian, Croatian, German co-production with Bosnia-Herzogovina, whose film infrastructure is practically non-existent, Grbavica received the Golden Bear at the Berlin Film Festival——and arthouse releases in the UK and the US. Love for Share had only a handful of festival screenings in the west, but Dinata’s clout is considerable in Indonesia, where Chants of Lotus, a women-directed, feminist omnibus film opened this year’s Jakarta film festival.

 I am mindful that the concept of “women’s cinema,” which arose from feminist activism and scholarship in the UK and the US in the 1970s, with its rediscovery and reclaiming of women filmmakers’ work, its intense political urgings and passionately argued theoretical commitments, is subject to new challenges in an era of “postfeminism,” globalization and new media. The presumptive assertion of 2nd wave feminists that “sisterhood is global” has been critiqued by Chandra Mohanty, Inderpal Grewal and many other feminist theorists who advocate more situated accounts of power, enunciation and transnational connectivities. In an essay on Sabia Sumar’s Pakistani film Silent Waters,  Priya Jaikumar addresses such concerns, urging that work on transnational women’s film culture be a “search for alliances and solidarities that acknowledges potentially incommensurable difference.”[각주:9]  In evaluating this juncture of women’s cinema, we need to remain committed to the “global” question, but not to seek global answers.



축제원칙을 유지하기: 제도 만들기에 있어서 현실과 쾌락 사이



 미건 모리스




시작하기에 앞서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영화제 가운데 하나로서 제10회를 맞이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국제포럼에 초대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 특히 현재의 나와 시네-페미니즘이 다소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리의 훌륭한 영화학자, 감독들과 함께 발표할 수 있게 된 것을 더욱 기쁘게 생각한다. 물론 나는 1970년대 후반 오스트레일리아의 주류매체와 여성운동 매체 모두에 글을 기고하며 페미니스트 영화 평론가로 경력을 시작하였고, 1980년대에는 독립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현재 나는 홍콩의 대학에서 제도적인 지원을 받고 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대학 강의와 연구 네트워크의 구축에 관여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여성영화 관객의 형성을 도울 뿐 아니라, 학부 중심의 인문 대학인 링난 대학의 맥락에서 보자면, 앞으로 여성영화를 지원하고, 이 영화들과 상호작용하게 될 미래의 교육자, 큐레이터, 비평가, 역사가, 사회활동가, 시장 연구원, 광고자, 예술 기업인 등의 인력을 양성하는 데에도 힘이 되고 있다.

이번 포럼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라는 점에서, 나는 제도적인 지원에 대한 지난 경험들을 되돌아볼 생각인데, 여기에서 내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부분은 축제적인 것, 또는 오스트레일리아식 표현으로 “좋은 시간을 갖는 것(having a good time)”이 가지고 있는 실용주의적이면서도, 생존지향적이며,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음 두 분에게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나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박미영의 도움으로 이 주제에 대해 기쁜 마음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 또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링난 대학의 동료이자 영화감독인 야우 칭은 내가 이 포럼을 통해 희망적인 무언가를 제안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사진 속의 모자를 쓴 통통한 젊은 여자가 나인데, 이 사진을 볼 때면 기쁨과 희망의 기억뿐 아니라, 신랄하고도 단절된 어떤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사진에 보이는 많은 남성들은 HIV/AIDS로 일찍이 사망하였고, 또 시간의 경과와 함께 다른 경로를 취하였다. 나는 이 사진의 여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당시 공공 영역에서 의도적으로 표현되었던 이 축제적인 분위기가 매우 창조적이었으며 또한 특별한 의미에서 ‘제도적’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다. 이런 축제적인 분위기는 다른 축제들 그리고 노력들과 상호작용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의 LGBTQ의 삶을 바꾸게 된 일련의 행사와 활동들을 ‘제도화’하거나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축제적 분위기가 사람들이 희망했던 방식으로 사회를 완전히 변화시킨 것은 아니지만, 이 사진의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이후의 활동들이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고는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또한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이 오래된 사진을 보면서 언뜻 보기에 전혀 예술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 축제 속에서 영화감독이자 학자인 Laleen Jayamanne가 말한 “가동의 전통”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애버리진 작가 트레이시 모펫의 <어둠 속의 비명>에 대한 에세이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며, 여성과 토착민 감독들이 그 이전의 이들과 역사의 조상들, 그리고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전통을 자신 자신과 어떻게 연관시키는지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김소영이 여성주의적 글쓰기에 대해 <거류>(2000)에서 한 작업 역시 한국 여성영화사에 있어서 이러한 맥락의 아름다운 예가 될 것이다. 나는 우리가 페미니즘에서의 예술과 비평적 작업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제도를 위해서도 이 ‘가동의 전통’을 만들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도란 무엇일까?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도화(to institute)’는 ‘시작(to start)’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는 ‘세움(to set up)’ 또는 ‘확립(to establish)’을 뜻하는데, 이 말들은 모두 활동, 또는 운동의 의미를 ‘해결’과 결부시켜준다. 제도는 모호하다. 제도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안정시키거나 억압하기도 한다. 사회운동을 분석하고 수사하는 초기 단계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후자를 강조한다. 제도는 악하지는 않더라도 위압적이고, 억압적이며, 적대적이다 (“가부장제”). 1975년에 열린 이 축제적인 국제여성의 날 행사에서도, 우리는 제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안’에 있거나, 그 ‘밖’에 있거나, 또는 그것을 ‘위하여’ 있거나, 그것에 ‘반하여’ 있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였다. 나는 내가 명백히 그 ‘밖’에 있고, ‘반하여’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물러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되돌아보았을 때, 제도는 말 그대로 우리의 시위를 틀을 짜고 있었다. 이 사진은 시드니 도심의 마켓 스트리트이다. 왼쪽은 당시 유명했던 ‘쇼핑 제도’였던 파머즈 백화점으로, 현재 이 자리에는 또 다른 쇼핑 복합단지 마이어즈가 들어서 있다. 오른쪽은 훌륭한 고전영화 상영관인 스테이트 시네마로 지금까지도 영화를 상영하며, 시드니 영화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사진이 찍힌 이후에도 이 극장은 30년 동안 페미니스트 영화를 지원하는 제도적 장이 되어 왔다. 영화상영이나 영화제 등의 분야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랜드마크’와 같은 제도들이 얼마나 취약하며 불안정한 것인지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형 소비 공간과 영화 궁전 사이의 움직임 속에서 축제적인 동시에 저항적인 여성해방의 깃발을 볼 수 있으며, 사진 왼쪽에서는 당시 문을 연 지 겨우 일 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페미니스트 북숍의 간판이 보인다. 이 서점은 지금까지도 온라인을 통해 페미니즘 서적을 판매하고 있다.

언제 운동은 제도가 되는 것일까? 이 오래된 시위 사진들을 지금 보면서 이러한 질문을 떠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 질문에 대한 유용한 대답, 우리가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답을 얻기 위해, 나는 이 포럼의 주제인 “여성주의 영화학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우리는 제도가 어떤 방식으로 운동을 지지하고 양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제도가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회에서도 제도란 그저 깊이 정박해있거나 보수적으로 구조화하는 거대한 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호주에서 편찬된 맥쿼리 사전을 인용하자면) 제도란 “일반적으로 공공적이거나 교육적이며, 이와 상응하는 목적을 지닌 특정한 대상을 장려하기 위한 조직”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성영화의 진흥과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도는 또한 “어느 문화의 근본적인 부분으로 정착되고 받아들여진 집단행동의 조직된 패턴”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어렸을 때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착하고 결혼하기 적당한 여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등의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 같은 관념에 도전한 우리 세대의 많은 이들은 평생에 걸쳐 중독과 싸워야 했다.)

내가 경험한 공적이고 축제적인 전통 가운데 가장 가동적이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대답을 정치적 운동에 대한 와이드스크린의 객관적 이미지에서보다는 친밀성, 행복, 관조에서 찾을 것이다. 이들은 항상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주변부가 아닌 그 바로 중심에서 일어났다. 1975년 여성의 날 행진 사진에서 깊이 생각에 잠겨 오른쪽을 응시하고 있는 젊은 여성은 질리언 리이다. 당시 그녀는 인류학과 학부생이었으며, 이후 AFTRS에서 수학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10분에서 55분 사이에 이르는 16편의 영화를 연출하였다. 리는 청년 실업에서 도시 개발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범위의 사회적 쟁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왔으며, 그녀의 픽션 작품 역시 실제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나의 깨달음은 매우 사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기괴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거리와 군중 속에서 있는 이 여성의 모습은 축제와 관조, 창조와 현실이 함께하는 여성영화를 지속하게 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나의 또 다른 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중요한 1980년대 페미니스트 단편영화 <Serious Undertakings>를 도심에서 촬영하고 있는 감독 헬렌 그레이스와 에리카 애디스의 모습이다. 여기서 나는 어떤 원칙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가? 축어적인 의미에서의 “거리”는 아닌데, 요즘 시대에는 아름다우면서도 활력을 주는 매우 많은 것들이 컴퓨터를 비롯한 다양한 포터블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소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성영화가 가장 창의적일 수 있을 때는 여성영화가 협의에서의 여성 쟁점들뿐만이 아니라, 커뮤니티, 도시, 국가의 모든 쟁점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즉 사회적 내재성을 효과적으로 예시할 때라는 것이다. 이는 질리언 리, 나,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에게 그러했듯이, 다른 이들, 다른 장소, 다른 시대에 순간의 에너지를 생생하게 전해 줄 수 있는 ‘소문자 나의 제도’를 만들도록 이끄는 그런 종류의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가 새로운 쟁점과 가치를 지닌 이들에게뿐 아니라, 어떤 도전들, 제도가 몰락할 수 있다는 가능성, 심지어는 제도가 사라져야 하는 당위에조차도 개방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바로 여기에 곤란이 놓여 있다. 제도에 대해 가장 훌륭한 책들을 쓴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제도가 어떻게 사고하는지를 설명한다. 제도적 사고의 처음 두 가지 특징은 부정적인 차원에서 알려져 있는데, 그 특징들을 여기서는 ‘창작의 독립성 상실’과 ‘순응에 대한 압박’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1980년대와 1990년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지역 프로덕션의 활성화를 위해 국가가 나서 문화 정책의 틀과 영화기금이라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영화감독들은 기금을 얻기 위해 프로젝트에 지원하였고, 위원회의 환심을 살 수 있는 방향으로 각본을 수차례 수정하다, 결국에는 관료적으로 정의된 ‘문제점’ 때문에 수상 대상에서 탈락하고 마는 헬렌 그레이스의 표현에 의하면 ‘창작의 지옥’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제도적인 삶에는 많은 지옥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창작의 지옥뿐만 아니라, (내 경험에서 보자면) 관리의 지옥, 냉소의 지옥, 정치적 올바름의 지옥, 탈진의 지옥 등이 있다.

그러나 제도가 사고하는 방식의 이 두 가지 측면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뒤집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더글러스의 글을 세심히 읽는다면, 우리가 제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사고하도록 만들 때 독립성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대신 제도가 사회적 현실을 분류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실용주의적인 정치적 개혁주의의 장구하고도 영광스러운 역사는 이러한 임무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두 번째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평범하고도 익숙한 형태로 주조하는 것이 반드시 순응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접근성과 비엘리트주의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자 할 때 이러한 작업을 거쳐야 하며, 이는 또한 교육, 특히 이야기를 통해 가르칠 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새로움이 반드시 이러한 주조 과정에서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과정에는 반드시 남는 부분이나, 첨가되는 것이 생기게 되어, 전체를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제도의 모호한 특징이 다음의 세 번째 특징에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의 작업 방식에 가치를 부여하는 제도의 나르시시즘이다. 남성 지배적인 제도에 들어간 여성은 언제나 제도적인 자기애와 마주하게 되지만, 이러한 함정에 빠져 침체하기 쉬운 것은 페미니스트 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메리 더글러스 《제도는 어떻게 사고하는가》

• 제도가 우리에 대한 제도적 분류를 수행하도록 할 때, 우리는 독립성의 일부를 상실한다.
• 우리는 새로운 사상을 평범하고 익숙한 형태로 주조함으로써, 제도를 확립한다.
• 제도는 나르시시스트적이다. 제도는 세상을 자기 방식대로 조직하며, 다른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위에서 말한 지옥들과 ‘악한’ 나르시시즘을 무력하고, 우리의 작업을 지속시켜주는 제도들 속에서 거주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나는 내가 축제원칙이라고 부르는 것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나 자신이 행사의 조직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원칙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행사를 통해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에너지를 생성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가장 냉철하고도 실용주의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이 행사를 즐길 수 있도록 상세히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것은 종종 행사를 조직하는 데 있어 가장 고되고, 고통스러운 부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여성 감독들이 사회적 내재성의 순간을 포착한 이미지를 보게 된 다음에야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아시아에서 보낸 지난 8년의 시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음식에서 말이다.

이 사진들은 내가 앞에서 보여주었던 사진들과는 조금 다르다. 헬렌 그레이스의 사진을 제외하면, 앞의 사진들은 모두 개인적 기억을 위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사적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시위 사진들은 또한 그 자체로 보이기 위해 무대화되어 있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축제원칙의 중요성은 주변화된 그룹의 집단적 연대를 보여줄 뿐 아니라 함께 함에서 생기는 행복, 기쁨,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러한 종류의 축제가 힘을 보여주는 것인 이유이기도 하다. 더 최근의 ‘음식 사진’은 이처럼 보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가족사진에 가깝다. 거리가 아닌 음식점에서 찍힌 이 사진들은 군중보다는 그룹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콘퍼런스라는 공적 제도를 경축하고 있으며, 환대라는 더욱 친밀한 축제원칙을 다루고 있다. 개인의 삶으로 틀 지워져 있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의 이 이행에서 우리는 페미니스트적 중산 계급화, 집단 투쟁에서 세상과 떨어진 공간으로의 특권적 후퇴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오독을 유도한다. 왜냐하면,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카메라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 의해 같은 날 찍힌 모든 사진들, 그리고 이 행진 참가자들과 조금이라도 접촉한 순간들의 이후 사진들을 동시에 볼 때 당신 앞에 펼쳐질 경축적인 가족사진(일부는 실제의 친척관계에 근거하고, 다른 일부는 나의 경우처럼 연대와 친밀감에 근거한)의 광대한 아카이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역사적 변화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전시성(힘의 공적인 전시)과 환대성(자아와 타자와의 친밀한 관심)을 시간을 초월하여 공존하는 동시에 상호작용하며, 여성의 제도적 작업을 지지하는 축제의 두 양식적 축으로 보고자 한다. 물론 다른 양식들도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많은 계획과 조직, 그리고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구출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축제원칙은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사이에서 작동하는 정치적 원칙이다. 축제원칙은 이 두 축 모두의 에너지와 힘에 소비될 수 있으며, 여성운동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두 축이 충돌할 때 축제원칙은 파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원칙 모두로부터 힘을 이끌어낼 수 있을 때, 축제원칙은  기쁨의 실용주의적 창조라고 할 만한 자신만의 고유한 힘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 음식 사진 역시 가동의 전통을 표상하게 된다.

이제 결론을 내릴 시간이므로, 나의 음식 사진이 제도 만들기에 대해 내가 경험한 가장 성공적인 실험의 순간을 축하하고 있음을 언급해야겠다. 이는 1992년 이래 많은 여성감독과 활동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이다. 아시아를 넘나드는 교육의 장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인 인터아시아 문화연구는 아시시 라자디야크샤와 김소영이 인터아시아문화저널에서 “국가의 통제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장의 부상 시간”이라고 말한 바 있는 시간과 동기에 부응하는 운동이다. 이에 대해 김소영은 “트랜스내셔널한 자본주의 안에서의 (영화적) 대안적 공공장에 대해 고안하고 상상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김소영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디지털 네트워크와 창조적인 실행을 비롯한 인터아시아 사회운동의 장이며, 또한 도시의 거리와 건물들로의 영화적 확장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음식점으로의 확장 또한 포함될 것이다.) 

장면 15. 이러한 틀 안에서 나는 국가 제도를 대안적 공공장을 위해 작업하는 방식의 하나로서 축제적으로 사용하는 가능성에 대해 덧붙이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오늘 사진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여성감독들이 학자이자 작가, 교육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숙고할 만한 시간이 없다. 질리언 리, 헬렌 그레이스 Laleen Jayamanne, 김소영 모두 현재 대학에서 활동하고 있다. 전업으로 대학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홍콩으로 이주한 2000년 이후의 일이긴 하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에 걸쳐있는 신자유주의 속에서 빠른 속도로 전지구화하는 대학 제도야말로 축제원칙, 그리고 축제원칙이 가지고 있는 실용주의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가치의 유지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아카데미는 연구가 국가와 기업에 가져다줄 경제적 가치를 최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해 신자유주의적 제도는 일상생활의 쾌락에 필요한 소모적인 순간들을 제거하기 위해 고안된 시간관리의 원칙과 시간소비의 의식에 폭력적으로 우리를 종속시킨다. 신자유주의는 축제원칙의 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프로그래밍을 통해 타인을 기쁘게 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학자가 계약 갱신을 통해 어떻게 내몰리는지 생각해보자. 또는 우리의 노동부하가 어떻게 급격히 증가하는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타인을 대하는 데 있어 점점 무례하고 기계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와 싸워, 냉소와 탈진의 지옥으로 이끌려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장면 16. 나는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해줄 수 있는 제도의 가능성을 부식시켜버리는 부정적은 측면들과 충분히 싸워나갈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이미지로써 오늘의 발표를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이 이미지는 링난 대학 문화학과 동료의 사진으로써, (신자유주의적인 관리의 핵심적인 의식이라 할 수 있는) 학과차원에서의 전략계획을 준비하는 날에 찍은 것이다. 사진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여성은 여성감독이자, 학자, 작가인 야우 칭으로, 몇 년 전 바로 이 행사에서 그녀의 훌륭한 작품인 <Ho Yuk: Let’s Love Hong Kong>이 상영된 바 있기도 하다. 나는 여기에서 이 LGBTQ 활동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하는데, 그녀가 영화제와 관련하여 그녀 자신이 작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매우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 또는 대만과 같은 곳에서 영화평론가와 큐레이터의 역할은 종종 구분되지 않는다. 홍콩은 풍부한 영화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LGBTQ 영화문화는 심각하게 부족한 현실이다. 나의 글쓰기, 큐레이터 활동, 그리고 영화작업은 바로 이 결여에서 시작한다. 커밍아웃을 감당할 수 있고, 자발적으로 많은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 에너지를 가진 이들이 아직 우리 커뮤니티에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용주의적 요구와 지역적 맥락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함께 어떤 종류의 책임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임감은 바로 내가 이 자리에서 설명하고자 노력한 사회적 내재성에 대한 헌신이며, 그러한 노력이 가능하게 한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이번 포럼에 찬사를 바치고자 한다. 야우 칭은 자신의 글 속에서 이를 ‘전투의 다리’라고 부르고 있는데, 나는 오늘 내가 왜 축제원칙을 전투적인 액티비즘과 대비해서 이해하기보다는 교각을 만드는 방식, 그리고 여성영화의 지속을 위해 벌이는 전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잘 전달했기를 바란다.




Sustaining the Festive Principle: 

between realism and pleasure in institution-building


Meaghan Morris


Please let me begin by offering my thanks to the organisers and to our hosts for honouring me with an invitation to the 10th Anniversary Conference of one of the world’s great film festivals, The International Women’s Film Festival in Seoul. I am especially grateful to be in the company of the distinguished film scholars and filmmakers speaking here today, since my own relation now to “cine-feminism” is somewhat indirect. Certainly, I began my working life in the late 1970s as a feminist film critic, writing both for mainstream and for women’s movement newspapers in Australia, and I was actively involved with independent film activities throughout the 1980s. Today, though, the mode of institutional support that I am fully involved with in Hong Kong is education, in particular, university teaching and research-network building: work which helps to shape audiences for women’s cinema, but also, in the context of Lingnan University (an undergraduate-oriented liberal arts university), to train not only future teachers, curators, critics, historians, and social activists but also market researchers, advertisers, and arts entrepreneurs whose work may support, interact with or even coincide with women’s cinema. 

Given the “anniversary” aspect of our Conference—ten years, a cause for celebration and an occasion for historical reflection—I have chosen to look back a little at my experience of the work of institutional support; and I will focus on something that strikes me (more so with every passing year) as profoundly important in practice, namely: the pragmatic, survival-oriented, and world-changing energy of being “festive”, or, as Australians put it, of “having a good time”.  So I must end these introductory remarks with two special thanks: first, to Park Mi-yYoung, for working so hard to make me cheerful about writing this paper, and to my colleague at Lingnan, the film director YAU Ching, who is very familiar with this festival, and who for adviseding me to offer something that might give a sense of hope.

Here, captured perhaps as only photography can, is an image of a historical moment of hope that surged up in Sydney 36 years ago: one of the first public demonstrations by a small, mixed group then generally calling itself “Gay Liberation”, and separating from a slightly older, rights-oriented group called CAMP INK. The hefty lass in the hat is me, and along with the memory of joy and hope, I feel a deep sense of poignancy as well as a bit of disconnection when I look at this image; many of these men died early in the HIV-AIDS epidemic, which in Australia struck gay men first, and, as lives over time take different paths, I don’t know what became of the women, either.  I do know, though, that the festive spirit so deliberately expressed in public at this moment was not only creative but also “institutional” in the special sense that, in interaction with a lot of other people’s festivities and hard work, it “instituted” or BEGAN a whole series of events and activities that did change the world for, as we say today, LBGTQ people in Australia. Of course it did not completely transform our society in the ways that people then hoped, but radiating out from each single person, each figure in this photograph, lines of later activity could be drawn that were consequential for, and affected, that society. And in looking at this old photo of courage and hope today, I see in its apparently artless sense of festivity (which was, of course, carefully planned), the very thing that the filmmaker and scholar Laleen Jayamanne calls, “an enabling tradition”. She uses this phrase in her essay on the film Night Cries by the Aboriginal Australian artist, Tracy Moffatt. Jayamanne is thinking of how women and indigenous filmmakers endow themselves with predecessors, with ancestors, with a “tradition” that helps them to act. In a beautiful example from Korean women’s cinema, this is what Kim Soyoung does with women’s eulogy-writing in her film Koryu (2000). And I would like to borrow this phrase here to say that we need to make “enabling traditions” for our institutional as well as for artistic and critical work, in cinema as in feminism.

What is an institution?  I mentioned a moment ago that the English verb “to institute” can mean “to start”. More exactly, though, it means to “to set up”, to “establish”, and these words combine the sense of activity and movement with that of “settling”, or “putting in place”.  Institutions are ambiguous: enabling action, they also stabilise and constrain. In early phases of social movement analysis and rhetoric, we often emphasize the latter: institutions are seen overbearing, constricting, and hostile if not evil (“patriarchal institutions”). At the time of this very festive International Women’s Day March in 1975, many of us talked about institutions only in terms of being “in” them, or “out” of them, and being “for” them, or “against” them. (I definitely saw myself as “out” and as “against”). 

Yet let me pull back, with historical hindsight, to notice the institutions literally framing our demonstration and participating in it! This is Market St. in downtown Sydney; on the left hand side is a then famous “shopping institution”, Farmers’ Department Store, now much altered; the site today is occupied by “Myers”, another shopping complex. There is change and continuity in the urban fabric there. On your right is the “State Cinema”, a fine old “picture [= ‘film’] palace” which still stands and is strongly associated with the Sydney Film Festival—the supportive institutional site for many a feminist film forum for 30 years after this photo was taken. So much for place, and for enduring, stabilising things (although anyone who has worked in the retail industry or in film exhibition and festival organisation can instantly remind us just how fragile and unstable such “landmark” institutions can be). On the street, though, in movement between the consumption palace and the movie palace,  are the festive and protest banners of Women’s Liberation; prominent among them, on the left of the image, that of the Feminist Bookshop: then barely a year old, but still selling books (and now on-line) today.

When does a movement become an institution? Looking now at images of old demonstrations it’s easy to ask this question—perhaps especially of feminist movements, which do tend to gather for younger activists and “newer” movements a stifling weight and a sense of being “set in their ways” that is commensurate with the relative success of feminism as a long duration, enormously diversified, political forceconstellation. But to give useful answers to this question, answers that we can use in a positive spirit—and here I approach the topic of our panel, “the sustainabilities of women’s cinema”—I think that we need also to ask how institutions can sustain and nurture movements. They do not necessarily do so; we know this. Yet institutions are not only the big, deeply anchored, conservative structuring forces of any society. They can also be (and I’m quoting the Australian Macquarie Dictionary here) any “organisation or establishment for the promotion of a particular object, usually one for some public, educational, charitable, or similar purpose” (end quote)—a purpose like sustaining women’s cinema, let’s say.  And “institution” can also mean, “an organised pattern of group behaviour, well-established and accepted as a fundamental part of a culture”.  (Like the assumption prevailing in Australia when I was young that nice, marriageable girls don’t smoke; our the challenge to which led many of my generation into a lifelong struggle with addiction!).  

So if I ask what has been most “enabling” for me in this publicly, festive, “tradition” of mobilisation that I have been invoking, I find answers less in the wide-screen, objective image of a political movement than in the moments of intimacy, eventfulness, happiness, and contemplation that always, but ALWAYS, occur not on the “margins” of a big historic event, but at its very heart. The young woman gazing thoughtfully on the right of this picture (again, Women’s Day March in 1975) is Gillian Leahy, then an undergraduate in anthropology, who soon began training at a new institution, the Australian Film, Television and Radio School. She has since directed over 16 films, ranging in length from 10 to 55 minutes. Many of her films are documentaries about a wide range of activist issues from youth unemployment to residents’ action and urban development conflicts; her work in fiction explores actual events. My hindsight here is highly personal, but not (I think) eccentric, when I say that to me, this snapshot of a woman looking in the street, in the crowd, involved as events develop—to me, this IS an image of a key sustaining principle of “women’s cinema”: festivity and contemplation, creativity and realism, together. 

And here’s another version, filmmakers Helen Grace and Erika Addis shooting in the city a key Australian feminist “short” of the 1980s, Serious Undertakings. What principle do I have in mind here? Not literally “being in the street”, when so much that is beautiful and energising now comes to life for us in and through computers and other more or less portable technologies. Rather, I mean that “women’s cinema:” is at its most creative when it is working not only on “women’s issues” narrowly defined, but in the midst of all the going issues of a community, a city or a nation, and when it exemplifies an engaged kind of social embeddedness—a kind of engagement that can lead (as it did for Gillian and for me, among many others) to the creation of those institutions-with-a-small-‘i’ (film societies, newspapers, festivals, action groups) that vitally radiate the energy of a moment to other people, in other places and other times. 

It is crucial, however, that such institutions maintain openness not only to newcomers with new issues and values, but also to challenges and to the possibility, even the desirability, of their own demise. And here the trouble lies.  In one of the best books I’ve read about institutions, anthropologist Mary Douglas lays out some of the features of “how institutions think”. Amongst them, these three points sum up difficulties and dangers that will be familiar to anyone involved with sustaining women’s cinema, whether against suppression and censorship at one end of a spectrum of threats, or against commodity boredom and imaginative death at the other end. The first two features of institutional thinking are well known in their negative versions: let’s call these “loss of imaginative independence” and “pressure to conform”. In the 1980s and 1990s in countries like Australia, where the state was willing and able to establish both cultural policy frameworks and film funding bodies to foster local production, many engaged and creative filmmakers fell into what Helen Grace calls “ Development Hell’’: an suffering cycle of repeatedly applying to Development funds and redrafting scripts to please committees and boards, only to find the project rejected once again because of bureaucratically defined “flaws” (for example, not being similar enough to an existing film with a record of critical or even financial success; a.k.a., “track record”).  In institutional life there are many circles of Hell, and to Development I would add (from my experience) Managerial Hell, Cynicism Hell, Political Correctness Hell, and Burn-out Hell.

However, it is possible to flip these two features of institutional thought into positive modes. Looking carefully at Douglas’s words, we can see that loss of independence occurs when we LET institutions do the thinking for us; we can, instead, also change the ways in which institutions do their work of “classifying” and administering social realities. The long, honourable history of pragmatic political reformism has this task at heart. Second, “squeezing new ideas into a common, familiar shape” does not necessarily mean co-optation or conformity; it is what we do when we aim for accessibility and non-elitist community-building, and it is also what we do when we teach—particularly, when we teach by telling stories. The new is not always lost in such “squeezing” because (unlike putting old wine in new bottles, but a lot like struggling into clothing that no longer fits), there is always something left over, something added, that transforms the whole. That said, I think the ambiguity of institutions is best captured by the third feature listed here: the narcissism with which they value their own ways of working. Women entering long-established, male-dominated institutions have always encountered this institutional self-love, but feminist institutions can suffer from itand stagnate from it too. 


Mary Douglas, How Institutions Think 

• When we let institutions make classifications for us, we lose some independence we might have had.

• We build institutions ourselves, squeezing new ideas into a common, familiar shape.

• Institutions are “narcissistic”; they love their own ways of organising the world, and refuse to see value in others.


How then should we “inhabit” these institutions that sustain our work, while at the same time confronting us daily with both the “circles of Hell” and the paralysing temptations of “bad” narcissism, i.e. a self-regarding closure? Here I want to give a serious meaning to what I’ve called “the festive principle” in institutional life. As an event organiser myself I have always known its importance; in the most hard-headed, practical way, you must plan in detail for people to enjoy themselves if you hope to generate political and cultural energy, and this is often the most arduous, painful part of your organisational labour. However I only began to think seriously about this when I started looking for images of women filmmakers “snapped” at moments of “engaged social embeddedness”, and I found that all those I have personally from the past 8 years in Asia so heavily feature FOOD!

These images are different in some ways from those I showed before. Except for the Helen Grace production shot they’re all “private” in the sense that they were taken for purposes of personal memory and celebration. But the demonstration photos from the 1970s also record events that were in themselves staged to be seen. The festive principle at work and of enduring importance here is one of showing not only the collective solidarity of a marginalised group but also their happiness, joy, and beauty in being together: that is why this kind of festivity is also a “show of strength”. The more recent “food photos” were not taken to be seen like this, and they’re like family photos. Set in restaurants, rather than the street, and focussing on the group rather than the crowd, they also celebrate the public institution of the conference (like our gathering today), and the more intimate festive principle of hospitality. Framed by an individual life, this shift from the 1970s to the 1980s could be read chronologically as a story of feminist embourgeoisement, a withdrawal from mass struggle to cloistered zones of privilege, and in my case that would be broadly true! 

But it is also misleading, because what I would ask you to consider is the vast archive of festive “family photos”—some based on actual kinship, others featuring (like mine), families based on alliance and affinity—that would spread before you if you could simultaneously see all the photos taken that day by all of the people with cameras here, AND all of their subsequent photos of moments somehow touched or launched by participating in this march. So, without denying historical change, I would see these two modes of festivity—exhibition (the public show of strength) and hospitality (intimate care of the self and of others)—as co-existing and interacting across time, and as vitally sustaining (supporting and nourishing) women’s institutional work. There are other modes, of course! But all of them take a lot of planning, organising, rescuing when things threaten to go wrong; all the hard, gruelling and (if we are not careful with ourselves) embittering labour of love.  

And thus for me, the “festive principle” in institutional work is a political principle which manoeuvres between the harsh “reality principle” which institutions are dedicated to reproducing, and the “pleasure principle” which alone (I think) can over the historical long term sustain the “good” narcissism of collective self-love and shared self-respect that social movements must affirm if they are to flourish. The festive principle can be consumed by the energy and power of either of these forces, and it can be destroyed when they come into conflict—as they often have in the history of women’s movements. But when it succeeds in drawing strength from both, the festive principle has a unique force of its own that I would call the pragmatic creation of joy. So these food photos represent an enabling tradition, too.

It is time to conclude, so let me note that my “festive food photos” commemorate moments from the most successful institution-building experiment I’ve ever been involved with: the “Inter-Asia cultural studies” movement, in which women filmmakers and activists have played a role since its beginnings in 1992. Deliberately working to create new educational spaces and networks across Asia, this movement corresponds in time and motivation with what Ashish RAJADHYAKSHA and KIM Soyoung have called, in a special issue of the Inter-Asia Cultural Studies journal, “the rise of a new set of spaces, not necessarily under state control, from where the experience of cinema might emerge”.   In her own article in this issue, Kim Soyoung further observes that “today there seems to be a need to conceive and imagine the (cinematic) alternative public sphere within the era of transnational capitalism”.   Among the developments she has mind are, of course, inter-Asian social movement spaces, including digital networks and creative practices, but also the expansion of “cinema” back out to the streets and buildings of the city.  (Perhaps to its restaurants, as well!) 

Within this framework, I would add the possibility of making festive use of state institutions as one of the ways in which we work for alternative public spheres, cinematic and otherwise. I have no time here to reflect on the fact that all the women filmmakers whose images I have used (with their permission) are also scholars, writers and teachers: Gill Leahy, Helen Grace, Laleen Jayamanne and Kim Soyoung all work now in universities. So do I, although I did not begin to do so full-time until the year 2000, when I moved to live in Hong Kong. And it is in academic institutions, rapidly globalizing in a neo-liberal mode as they are across most of Asia, that we can see what is at stake in “sustaining the festive principle”, and its pragmatic, political value. The neo-liberal academy is dedicated to maximising the economic value of research to nations and, increasingly, to corporations, even in the Arts; and to do this, it violently subjects us to time-management disciplines and time-consuming rituals meant to eliminate wasteful moments of pleasure from our everyday working lives. Neo-liberalism is an enemy of the festive principle: we should make no mistake about this. Consider, for example, how the rituals of performance review and contract renewal force out those scholars who are often best at running programmes because they have a genius for hospitality and making other people feel good, but who can’t always churn out refereed articles; or how, as our workloads increase exponentially, we slowly become ruder and more instrumental in our dealings with each other. This must be fought, because that way leads to the Cynicism and Burn-out circles of Hell.

I’ll end with an image supporting my belief that this can be done, and that we can fight the corrosive negativity of the institutions that also sustain us and give us space to work. This is a picture of my colleagues at the Lingnan Department of Cultural Studies, taken at the end of what should have been an exhausting and debilitating day of “retreat” preparing (in one of the key rituals of ne-liberal management) a departmental Strategic Plan. On the far right of the picture is another woman filmmaker, scholar and author, YAU Ching, whose wonderful Ho Yuk: Let’s Love Hong Kong screened at this festival a few years ago. I’d like to give the last word to this noted LGBTQ activist, since in a recent article on her own work with and for film festivals she explains very clearly what the stakes of such work can be:

“In places like Hong Kong or Taiwan, the roles of film critics and curators are often mixed and interchangeable. Despite the richness of Hong Kong film history, there has been a significant lack of LGBTQ film culture here …. I see my writing, my curatorial, and, in fact, my filmmaking activities as mostly motivated by this lack. There are just not that many people in the community who can afford to be out and have the time, resources, and energy to do so much volunteer work” .      

 Along with a sharp definition of the practical needs of a local context there is a sense of obligation here, a commitment to that engaged, social embeddedness that I have tried to describe to today in this 10th Anniversary festival conference—enabled as this conference has been by the kind of work to which I have wished to pay tribute. Yau Ching calls her article “Bridges and Battles”, and I hope I have explained why I see “the festive principle” not as in contrast with a fighting activism, but precisely as a way of making and taking bridges—and as itself one of the battles to sustain women’s cinema.

Thank you.     







  1. 1) ‘두번째 십년’이라는 용어는 “Notes on the Second Decade”와 같은 초기 페미니즘 저작들에서 사용된 것으로, 미국의 단명하는short-lived 페미니즘 영화 배급조직을 이르는 말이다. [본문으로]
  2. 2) 많은 주요 텍스트들이 여성들의 영화제작 실천과 ‘여성 영화’라는 용어를 중심 모티프로 삼았다. 일례로 Lucy Fischer의 Shot/Counter Shot: Film Tradition and Women’s Cinema (1989) 참고하라. [본문으로]
  3. 3) 시카고의 ‘women in the Director’s Chair’가 최근의 희생자이다. 이것은 24년 동안 존속했었다. [본문으로]
  4. 4) iv. Priya Jaikumar, “Translating Silences: A cinematic Encounter with Incommensurable Differnce,” in Katarzyna Marciniak, Aniko Imre, and Aine O’Healy, Transnational Feminism in Film and Media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7), 207-225 [본문으로]
  5. 1) The term “second decade” is used in such early feminist writings as “Notes on the Second Decade,” and it was the name of a short-lived feminist film distribution organization in the US. [본문으로]
  6. 2) Many other significant texts took women’s filmmaking practice and the term “women’s cinema” as a central motivation. See, for example, Lucy Fischer, Shot/Counter Shot: Film Tradition and Women’s Cinema (1989). [본문으로]
  7. 3) Chicago’s Women in the Director’s Chair is the most recent casualty; it lasted twenty-four years. [본문으로]
  8. 4) For example, MadCat in San Francisco. [본문으로]
  9. 5) Priya Jaikumar, “Translating Silences: A cinematic Encounter with Incommensurable Differnce,” in Katarzyna Marciniak, Aniko Imre, and Aine O’Healy, Transnational Feminism in Film and Media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7) 207-22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