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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2016 SIWFF 미리보기] 판타지에서 청춘영화까지, 퀴어 영화의 다양성을 즐겨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2007년 9회부터 '퀴어 레인보우'를 상설 프로그램으로 가져왔습니다. 2016년 올해, 벌써 10년이 되었는데요. 이렇게 지나고 보니 전 세계적으로 퀴어 영화가 조금씩이나마 성장하고 있음을 새삼 실감합니다. 양적으로도 성장했지만, 특히 장르의 다양성은 눈여겨 볼만한 대목입니다. 여성들 간의 사랑을 이국적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는, 지금 여기의 사랑을 사실적으로 다룬 한국 장편 극영화가 마침내 제작된 것도 축하할만한 일입니다. 

올해  '퀴어 레인보우'에는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뿐만 아니라 시대극, 판타지, 멜로드라마, 청춘성장영화,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의 완성도 놓은 극영화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장르 영화에 서브텍스트로서 퀴어적 요소가 은밀하게 표현되는 것을 넘어서, 퀴어 영화 내에서 장르가 다양해지고 있는 현상은 관객 확대의 측면뿐만 아니라 성정체성 내의 장르가 다양해지고 있는 현상은 관객 확대의 측면뿐만 아니라 성정체성 내의 다양한 차이와 복잡하고 역동적인 정서적 관계를 그려낼 수 있는 도구의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몇 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어떤 영화들이 있는지 알아볼까요?

 

1. 퀴어 장르 영화 : 시대극, 판타지 그리고 코미디

 

<걸 킹 크리스티나>

미카 카리우스마키, 2015, 핀란드

 

"왕자로 키워진 여왕, 크리스티나의 지적 열정과 세기의 사랑"

실존 인물인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세기의 사랑과 지적 열정을 연대기적으로 그린 스펙터클 시대극. 핀란드의 대표적 감독 아키 카리우스마키의 오랜 협력자인 형제 감독 미카 카리우스마키가 연출한 영화입니다. 화려한 의상과 고증에 공을 들인 배경이 그 자체로 볼거리를 만듭니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1626년 12월 구스타프 2세와 왕비 마리아 엘레노어 사이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입니다. 구스타프 2세는 크리스티나가 태어난 이후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정하고 크리스티나를 왕자로 교육을 시킵니다. 크리스티나 역시 사냥, 승마, 검술 등의 교육을 즐겼고, 성격 또한 남자 같았다고 합니다. 크리스티나가 6살이 되었을 때 구스타프 2세가 30년 전쟁에서 전사하고 왕비는 그 슬픔으로 정신을 놓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왕위를 무려받고 왕의 유언대로 왕자로 길러집니다. 성장한 크리스티나는 예술과 문화를 사랑했고, 당대의 중요한 예술가와 학자들을 궁정으로 불러 모읍니다. 그 유명한 데카르트 역시 초청받지요. 하지만 신교 국가인 스웨덴에서 가톨릭에 관심을 두게 된 크리스티나는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며 갈등을 겪게 됩니다. 

할리우드의 스타 그레타 가르보 역시 <퀸 크리스티나>(1933)에서 크리스티나 여왕을 연기한 적이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명연기였죠. 이 영화는 가르보의 남장과 크리스티나 여왕의 연인이었다고 알려진 에바 스파레 백작 부인과의 키스를 잠깐 보여주지만, 그녀의 동성애 관계는 서브텍스트로 남겨놓고, 스페인 대사인 돈 안토니오와 사랑에 빠져 왕위를 포기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아마도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 그 정도가 동성애를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이 있겠지요. 크리스티나 여왕은 레즈비언 혹은 바이섹슈얼, 더 나아가 트랜스젠더였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그녀를 규정하는 것은 오히려 그녀의 정체성을 제한하는 일일 겁니다. <퀸 크리스티나>와는 달리, 미카 카리우스마키의 < 걸 킹 크리스티나>는 백작부인과의 사랑을 중심에 넣고 그녀의 예술과 철학에 대한 열정을 자세히 그립니다. 영화는 다소 단순한 서사구조를 갖고 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저 그 사실적 연대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흥미롭습니다. 거기에 볼거리마저 더해진 시대극으로서, 역사, 크로스드레싱, 여성들 간의 열정적 사랑을 보고 싶은 관객이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좋아할 만한 영화입니다. 

 

<걸스 로스트>

알렉산드라-테레세 카이닝, 2015, 스웨덴


"소녀에서 소년으로, 변신 판타지 성장영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전작 <키스 미>(2011)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던 알렉산드라 테레세 카이닝 감독의 신작입니다. 스웨덴의 영 어덜트 소설을 각색한 <걸스 로스트>는 퀴어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판타지 영화입니다. '레즈'라 놀림을 받으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던킴, 모모, 벨라는 신비한 꽃에서 채취한 즙을 마시고 소년으로 몸이 변합니다. 밤에만 일시적으로 소년의 몸이 된 세 친구는 남자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와 조우하게 됩니다. 그러나 곧 변신의 경험은 각자의 성 정체성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관계에도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성 전환의 변신 이야기는 소녀와 소년이 어떻게 다르게 또래 문화를 형성하고, 자아를 형성하는지를 묘사할 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 정체성과 성전환의 과정을 아름답게 알레고리화 합니다. '트랜스젠더 변신 판타리'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걸스 로스트>는 세련된 장르 활용법과 설득력 있는 연기, 젠더와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십대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 마술적 사실주의가 주는 매혹이 균형있게 구현된, 전에 없던 퀴어 영화라 할수 있습니다. 


<미스 블라라카오>

아라 차우두리, 2015, 필리핀


"모성과 여성성을 질문하는 게이 소년의 코미디 소동극"

필리핀에서 온 코미디 소동극 <미스 블라라카오>는 필리핀 작은 마을에 사는 게이 소년 도동과 그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도동은 아버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드렉퀸 대회에 나섭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내치고, 그는 이상한 밤을 겪습니다. 도동이 임신을 한 것 입니다. 도동은 게이로서, 성관계 없이 임심을 한 소년으로서, 의학부터 종교 그리고 황색언론까지, 작은 마을의 여러 통념과 마주하게 됩니다. 힘든 상황에 처한 도동은 친아버지보다 혈연관계도 없는 새어머니 린다에게서 따뜻한 도움을 받습니다. 도동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모성이란 무엇인지, 여성성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됩니다. 권력을 가진 이들보다 마을의 원주민들은 오히려 자생적 통찰을 갖게 되고 도동은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주제는 진지하지만 유쾌하고 발칙한 코미디 영화입니다. 감독인 아라 차우두리가 방문할 예정이니 감독과의 대화도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2. 소녀들은 자란다

 

<바라쉬의 첫사랑>

미할 비니크, 2015, 이스라엘 


"파시스트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픈 이스라엘 소녀 바라쉬의 아릿한 첫사랑"

편견과 무지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파시스트 아버지, 입대 후 실종된 언니, 소심한 엄마, 마냥 어린 남동생. 17살의 나마 바라쉬는 '바라쉬'라는 자신의 성을 버리고 가족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일종의 도피를 선택합니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며 그 모든것을 잊습니다. 답답한 현실에서 나마는 전학생 다나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을 갖게 됩니다. 영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갈등 속에서 과격해지거나 그것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나마의 첫사랑의 설렘을 섬세하게 그립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도피와 다릅니다. 다나는 오히려 나마가 가족의 갈등을 정면으로 해결할 힘을 줍니다. 그러나 사랑은 행복만 주는 것은 아니었고 아픔도 줍니다. 첫사랑 영화는 익숙한 듯 하면서도 늘 새롭습니다. 그러한 풋풋함을 포착한 영화, <바라쉬의 첫사랑>. 감독과 주연배우가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에 참석할 예정이니 많이 기대해 주세요. 

 

<Under the Sea>

고은혜, 2015, 한국

 

"나의 사랑은 엄살이 아니야"

귀엽지만 핵심을 찌르는 한국 단편입니다. 지아, 나영, 동해는 바다 여행을 갑니다. 날이 저물고 셋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동해는 은근슬쩍 지아에 대한 짝사랑을 드러내고, 지아는 또래와 달리 자신이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 합니다. 한편 나영은 지아가 아직 적당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사랑을 모를 뿐이라고 충고합니다. 동해와 나영에게 남자애들보다 여자 친구라 있는 것이 더 좋다는 지아의 고백은 별일 아닌 고민이나 적당한 남자를 만나면 해결될 일로 가볍게 취급됩니다. 진지한 고백을 늘 별 것 아닌 지나가는 감정, 엄살이나 한때의 방황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그 친구에게는 커다란 상처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3. 한국 퀴어 영화, 존재감을 드러내다 

 

<연애담>

이현주, 2015, 한국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장편 대상을 수상하며, 2016년 상반기 화제작이 된 말이 필요 없는 영화 입니다. 드디어, 마침내, 한국에서 여성 간의 사랑을 제대로 그린 극영화가 나왔습니다. 환호할 만한 일입니다. 관객으로서, 프로그래머로서, 이런 영화를 얼마나 기다려 왔던지요. 대학원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윤주를 연기한 이상희 배우와 알바를 하며 자유분방하게 살고 있는 지수를 연기한 류선영 배우가 훌륭한 케미스트리를 만들어 내는 이 영화는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여성들의 사랑을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이건 단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첫 만남의 설렘부터 열애 그리고 실연의 상처까지,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거기엔 미숙함과 노련함, 들뜬 열망과 전에 없던 행동, 거부로 인한 상처, 어긋난 타이밍, 사랑을 통한 성장 등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렇게나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지금 여기, 젊은 여성들 간의 연애를 집중해서 그린 장편 극영화는 처음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든 이현주 감독에게 고맙고, 이 영화가 소중할 뿐이네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와 <카트>를 만든 부지영 감독과 이현주 감독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스페셜 토크, 그리고 감독과의 대화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깊고 오랜 사랑>

강지숙, 2016, 한국 

 

 

"누가 그들의 깊고 오랜 사랑을 방해하는가?"

2014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미드나잇 썬>으로 우수상을 수상한 강지숙 감독의 단편 신작입니다. 법과 제도 밖에 놓인 동성 커플의 현실을 멜로드라마 안에 가슴 뭉클하게 전달합니다. 고등학교 소녀시절부터 할머니가 된 현재까지 함께 해온 영희와 순정. 순정이 폐암 진단을 받고 병시실에 누워있지만 영희는 순정을 면회할 수도 없습니다. 이 냉혹한 현실은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강렬한 드라마를 만들어냅니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영화, <깊고 오랜 사랑>입니다. 


<불온한 당신>

이영, 2015, 한국

 

"혐오의 시대를 기록하다"

<이반검열>, <Out - 이반검열 두번째 이야기>로 한국사회에 꾸준히 퀴어 이슈를 제기해 온 이영 감독의 신작. 현재 한국사회에서 뜨겁게 벌어지고 있는 혐오의 현장을 찾아가 그들을 기록합니다. 여기에 이영 감독 특유의 자전적인 성찰이 더해집니다. 자기반영적 퀴어 다큐의 한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는 이영 감독은 자신뿐만 아니라 윗세대의 부치, 혹은 바지씨 이묵의 이야기를 끼워 넣습니다. 그래서 동시대적으로 혐오를 기록할 뿐만 아니라, 계보를 그리며 역사적으로 그 혐오가 어떻게 이어져왔고, 그것이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추적합니다. 씨실과 날실이 엮어지는 가운데 혐오의 태피스트리가 만들어 집니다. 개인적으로 정 들면 또 그런대로 잘들 지낸다고 말하는 이묵. 혐오를 외치는 그들은 무엇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운 걸까요? 감독과의 대화가 있을 예정입니다. 혐오의 시대와 혐오의 정동을 함께 논하는 자리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4. 여성의 남성성: 부치와 젠더 퀴어 

 

<로얄 로드>

제니 올슨, 2015, 미국

 

"히치콕의 <현기증>을 부치 레즈비언의 시선으로 다시 쓴 서정적 에세이 필름"

영화사학자이자 90년대 북미에 큰 영향을 미쳤던 퀴어 웹사이트 '플래닛아웃'의 공동 설립자, 그리고 퀴어영화 전문배급사 '울프'의 부사장인 제니 올슨의 두 번째 영화. <로얄 로드>는 기억하기, 노스텔지아, 부치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는 아름다운 시적 영화 에세이입니다. 캘리포니아 사가(saga)로서 영화는 스페인의 식민지 시기와 멕시코-미국 전쟁 같은 탈식민적 주석을 늘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1950)와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 같은 할리우드 고전 영화를 탐사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올슨 자신이 어린시절 짝사랑했던 줄리엣이라는 이름의 소녀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까지 끼어듭니다. 소수자의 시점으로 도시를 쓰고 읽기. <로얄 로드>는 2015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소개된 이후 당해 미국 최고의 독립영화 중 하나로 뽑히기도 했는데요. 영화, 부치 감수성, 도시, 역사를 사랑하는 이라면 반드시 봐야할 작풉입니다. 

 

<딜런>

엘리자베스 로바우, 2015, 미국

 

"트렌스 남성, 딜런의 자유를 향한 걸음"

영화 <딜런>은 트렌스젠더 남성 딜런이 자신의 정체성, 신체적 그리고 감정적 변화와 변형에 대해 덤덤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실제 인터뷰에 근거한 드라마 다큐 형식을 갖고 있는 <딜런>은 퀴어 커뮤니티에서의 모험, 가족과의 관계 등 자신의 삶에 대한 변화를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고 인정하므로써 어떻게 자유로워졌는지를 설명합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공개하지 못하는 마지막 장면은 충만한 자유의 감각을 관객들과 함께 공유하도록 해줍니다. 단편 영화의 매력을 새삼 알려주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팔씨름 대회>

엔지웨스트 & 잭 눈스, 2014, 영국

 

"여성들, 남성성을 겨루다"

한 무리의 여성들이 모여 런던의 대표적인 퀴어 펍, "로얄 복스홀 태번'에서 남성성을 표현하고 겨루는 축제의 자리를 갖습니다. 레즈비언, 트랜스 남성, 이성애 여성 등 다양한 이들이 자기만의 개성적인 스타일로 남성성을 드러내고 팔씨름 대회를 통해 신체적 강인함을 자랑합니다. 이 영화는 남성성이 일관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꾸어지는 것임을, 그리고 여성 역시 근대적 남성성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해왔음을 시종일관 유쾌하게 보여줍니다. 


퀴어 레인보우 센션 외에도 다른 섹션에서 퀴어 요소를 갖고 있는 영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우정사이의 감정을 섬세한 뉘앙스로 포착한 김소영 감독의 <러브송>(2016, '새로운 물결'), 고전 레즈비언 소설을 각색한 프랑스의 여기숙사 이야기 <올리비아>(1951, '프랑스 여성영화 120년'), 그리고 여성의 여성에 대한 매혹과 질식할 것 같은 관계를 그린 <숨 막히는>(2013, '프랑스 여성영화 120년')이 그것입니다. 다른 섹션에서도 퀴어 이야기를 골라보는 재미를 놓치지 마세요. 그럼 6월 2일에서 8일 사이에 메가박스 신촌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프로그래머 조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