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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재개봉 영화 관객: ‘재(re-)’의 여성화 혹은 다시 만난 여성의 세계

 




 

재개봉 열풍

201511월 개봉 10주년을 맞아 재개봉한 <이터널 선샤인>(2004)은 예상치 못한 열풍을 몰고 왔다. <이터널 선샤인>이 재개봉만으로 33만 명을 모으며 2005년 개봉 당시 기록 17만 명을 훌쩍 뛰어 넘은 것이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었지만, 재개봉은 최근 몇 년간 그 관객 수와 편수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이미 하나의 현상이 되어왔다. 20114, 20128편이었던 것이 201328, 201461, 2015년에는 102편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올해도 작년보다는 적지만 근접한 수치를 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어떻게 재개봉은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을까? 많은 기사들이 분석하듯 일차적으로는 수익성이다. 소규모 수입배급사들은 신작과 비교해 매우 저렴한 가격에 판권을 구입한 영화를 높은 인지도와 재개봉이라는 화제성에 기반을 두고 적은 홍보비를 들여 개봉한다. 이를 통해 위험부담은 줄이고, 작지만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한다. 두 번째는 마니아 관객의 확보다. 이 영화들에 대해 자기만의 추억과 향수를 지닌 3-40대 관객층과 이제는 고전으로 취급받는, 소문으로만 듣던 영화들의 작품성과 대중성을 직접 확인하고픈 20대 젊은 관객이 존재한다. 이 영화들이 내세우고 있는 개봉 ‘10주년’, ‘21주년이라는 태그라인을 보자. 이 문구는 삼사십 대들이 영화와 함께 소중한 추억을 기념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젊은 층에게는 이 영화들이 개봉을 기념할 정도의 필견 목록에 속해 있음을 호소한다. 게다가 재개봉작들은 현재는 스타가 된 배우와 감독의 초기작이 상당수를 이루지만 이미 검증이 끝난 작품이기 때문에 믿고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영화 관람에 있어서도 위험을 줄이고 손해를 피하려는 현 추세와 맞물려 있다.

 

하지만 재개봉 현상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놓치지 말아야할 점은 무엇보다 영화의 장르적 분포와 관객의 성별이다. 재개봉 영화는 흔히 감성 멜로라고 하는 장르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2013년부터 재개봉된 영화의 장르 분포를 보면 휴먼 드라마나 멜로드라마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영화가 절반을 넘는다. 올해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드라마가 53%, 멜로·로맨스가 24%, 액션이 21%, 나머지가 애니메이션(14%)과 코미디(14%)였다. 흥행 순위를 보면 관객의 선호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재개봉 영화 역대 흥행 순위 10위 내의 다수가 로맨스 장르다. 2015년 재개봉에서 33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역대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한 <이터널 선샤인>, 올해 11월 재개봉해 28만 명의 관객을 모았으며 여전히 상영 중이어서 누적관객수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노트북>, 2016년 재개봉작 흥행 2위에 오른 <500일의 썸머>(148), 그 외에도 <러브 액추얼리>(7), <비포 선라이즈>(5), <냉정과 열정 사이>(43), <러브 레터>(23, 이 영화는 2013년 재개봉에 이어 올해 세 번째 개봉을 성사시켰다) 등 커다란 성공을 거둔 영화들이 모두 로맨스였다. 최근엔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인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27년 만에 재개봉해 약 2만 관객을 모으기도 했다.

 

여성의 이야기를 찾아서

로맨스 장르의 전통적 관객은 여성이고, 이는 곧 재개봉 열풍을 이끌고 있는 것이 여성 관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유가 뭘까? 이들 로맨스 영화는 지리적 거리, 계급적 갈등, 시간의 흐름이나 기억삭제에도 불구하고 재회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다. 심지어 죽음도 이들을 갈라놓지 못한다. 이런 로맨스 영화는 연애감정을 가졌거나 친밀한 관계에서도 경쟁적이고 계산적이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광풍, 그리고 여성들을 교감해야할 동등한 파트너라기보다는 성적 이미지로 소비하고 비하·혐오하는 젊은 남성들의 폭력적 태도 속에서 하나의 판타지 공간을 마련해준다. 가을이나 겨울에 맞춰 재개봉한 따뜻하고 달달한 로맨스 영화들이 각박한 세상과 여남관계 속에서 한숨 돌리고 싶은 여성관객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개봉 영화의 흥행코드를 쓸쓸한 연말에 치고 올라오는 연애감정에 대한 욕망이나 낭만적 판타지로 한정시킨다면, 이 현상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하는 것이 된다.

 

현재 상영작의 면면을 보자. 스크린은 CGI3D, 4D 등의 스펙터클한 전시에 집중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수퍼 히어로 시리즈, 그리고 주연인 남성들 사이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동성사회를 끈끈하게 만들어 주는 교환물로 소비되는 소위 브로맨스한국 영화들로 도배되어 있다. 여성이 주인공인 드라마는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여성관객들은 비교적 시장이 작아서 안정적이며 검증이 끝난 재개봉 영화에서 자기 서사와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찾게 된 것이다. 이 영화들에서는 적어도 여성들이 주연이고, 여성들의 감정을 세밀히 살피고, 때로는 자기 인생의 주체로서 결단력을 보여주는 여성들을 내세운다.

 



흥행 성적이 압도적이진 않았지만 재개봉으로 화제가 된 영화의 목록을 두루 살펴보면 이런 분석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시간을 달리는 소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퐁네프의 연인들>, <그녀에게>,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렛미인>, <몽상가들>, <바그다드 카페>, <잉글리쉬 페이션트>, <글루미 선데이>, <베티 블루 37.2>, <하울의 움직이는 성>, <피아노>, <시카고>, <색계> . 이 영화들에서 여성은 다양한 시대를 배경으로 서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 더 나아가 여성들 간의 우정과 연대, 사랑을 긍정적으로 의미화하고, 여전사부터 뱀파이어, 스파이, 장애여성까지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투자 자본의 양극화로 점차 축소되고 있는 중소 규모의 상업영화라는 특징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전통적인 시네필관객이 타깃인 영화들과도 구분된다. 예술의 신전에 모셔진 유럽 남성 작가 영화에서 다뤄지는 여성 캐릭터 역시 폭력적이고 가학적일 정도의 비극에 빠지며 남성들의 예술적 성찰의 도구나 각성의 동기 정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왕왕 있어왔다. 결국 재개봉영화, 그것도 멜로드라마에 여성관객들이 몰리는 이유는 여성의 서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다양성을 잃어가는 예술독립영화와 대규모 상업영화 모두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스크린에서 찾는 차선책

따라서 재개봉 영화에서 멜로드라마 비중이 높은 것에 대해 다양성이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는 일부의 염려 어린 분석은 영화 전반의 남성지배적 문화를 간과한 해석이다. 주류 개봉 루트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여성들은 이 두 번째 스크린에서 차선책이나마 자신들의 세계를 만나려 한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무조건 낭만적 도피나 과거로의 퇴행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여성 관객들은 여성의 이야기가 앞으로 더 만들어져야하고 그 여성의 세계를 만날 관객이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re-)’의 여성화는 재개봉 현상에만 있지 않다. 최근 할리우드에서 과거 흥행한 남성 버전의 시리즈를 여성 버전으로 리메이크 혹은 리부트하는 현상이 일고 있다. <고스트 버스터즈>(2016)나 여성판 오션스 일레븐’ <오션스 8>(2017)이 그것이다. (re-)’의 여성화 현상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고 그러한 영화를 관람해 여성의 서사에 대한 요구가 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여성 스스로 얻어낸 것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고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위험부담을 지지 않으려는, 이미 검증을 거친 것에만 소심하고 안정적으로 투자하려는 자본의 남성중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씁쓸함이 남는다. 왜 여성들은 늘 두 번째 자리에서만 자신들의 세계를 만날 수밖에 없는가?

 

 

본 기사는 <영화천국> 53(20171·2)에 게재되었던 글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