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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나의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 여성, 과학 그리고 SF

나의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SF 문학의 디지털 주체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풀어낸 자신의 저서에 캐서린 헤일스는 이와 같은 제목을 붙였다. 처음엔 이 제목의 의미가 명확하게 해독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마더컴퓨터마더보드같은 은유를 지칭하는 건가? 아니면 여성은 자연, 남성은 기술이라는 유해한 편견을 퍼트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선언인가? 그 의문은 약간의 당혹스러움 속에서 이 책을 펼친 직후 단박에 풀렸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건 환상도 은유도 아닌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좀 길긴 해도 너무나 매혹적인 이 이야기를 잠깐 들여다보자.

 

제목에 붙여

 

닐 스티븐슨의 크립토노미콘에서 허구의 인물인 수학천재 로렌스 프리처드 워터하우스가 상관 얼 콤스톡 중령에게 자신의 새로운 발명품을 자랑하고 있다. 콤스톡이 이렇게 묻는다.

 

저 새로운 기계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뭐라고 하겠나?”

.” 워터하우스가 대답한다. “저 기계의 기본 기능은 수학 계산을 하는 겁니다-컴퓨터처럼요.”

콤스톡이 코웃음을 친다. “컴퓨터는 인간이야.”

 

이 대화는 계산을 하도록 고용된 사람들-이 사무 노동을 하는 이들은 주로 여성이었다-컴퓨터라고 불리던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내 책의 제목 나의 어머니는 컴퓨터였다는 앤 발사모의 젠더화된 신체의 기술에서 가져왔는데, 그녀는 어떤 장을 시작하면서 이 용어에 대해 언급한다. 발사모의 어머니는 실제로 컴퓨터로 일했고, 발사모는 이 가족사의 한 편린을 이용하여 정보기술의 젠더 함의에 대한 고찰을 시작한다. () 오늘날 이 문장이 우리에게 의미론적 충격을 주는 이유는, 노동이 인간에서 기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에 극히 중요한 친족 범주를 위반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장은 누구보다도 한스 모라벡이 우리의 포스트생물학적미래라고 불렀던 것, 인간이 신체를 버리고 의식을 컴퓨터에 업로드할 방법을 찾아내면서 늘 인간의 한계를 정의하는 역할을 해왔던 육체적 체현이 미래에는 단지 선택의 문제가 되리라는 기대를 넌지시 의미한다. () 나는 이러한 포스트휴먼의 비전에 대한 강력한 반대 주장을 펼치면서, 체현(embodiment)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지구상의 인간과 비인간 생명의 강화에 이바지하는 포스트휴먼의 판본을 위해 노력할 것을 요청하며 책을 마무리했다.


 ― 『나의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디지털 주체와 문학 텍스트(N. 캐서린 헤일스, 13-5)

 

이 구절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과학기술의 역사에서 친족의 중요한 한쪽인 여성은 완전히 무시되고 배제되어왔다. ‘계산하는 친족(어머니)’을 가리켰던 컴퓨터는 이후 기계가 되었다. 기술의 과거에서 지워진 여성은 인간과 기계가 결합된 사이보그가 되어 미래를 선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한참 현재가 되어버린 포스트휴먼 시대에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교훈을 던진다. 기술을 고려함에 있어 언제나 성, 인종, 종족, 계급 등이 각인된 신체와 체현을 잊지 마라. 이건 기술과학 철학자 다나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소수자들과 동물들의 하이브리드성을 강조하면서 주장했던 것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들은 정신과 신체가 분리가능하다고 믿고 과학기술을 이성과 정신의 측면에서만 고려해 온 지식체계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이어왔는지를 누누이 지적하며 기존의 과학기술 체계를 재구성하려 노력해왔다. 그럼에도 과학기술계는 성차별과 성편향적 세계관이 여전히 공고한 영역 중 하나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과학기술연구개발인력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418.7%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그중의 반은 비정규직이다. 이러한 성편향을 깨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은 여러 작업을 시도해왔다. 일차적으로 과거 배제되고 지워졌던 여성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성취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작업은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는 문제해결을 위한 근본적 작업은 아니지만 여성들이 수학이나 과학에 관심과 재능이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젊은 여성들에게 롤모델을 제시해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젠더, 인종, 계급적 관점 등에서 보았을 때 인간과 과학발전의 관계도 다르게 쓰일 수 있는 통찰을 마련해준다.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변화하면 그 역사를 보는 프레임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히든 피겨스>(2016)는 바로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다. <히든 피겨스>는 우주과학사에서 부조리하게 지워진, 컴퓨터로 일했던 흑인 여성들의 영웅적 초상을 스크린 위에 매끈하게 그려낸다.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1960년대 초반 미 항공우주국 나사(NASA) 소속의 캐서린(타라지 P. 헨슨),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 메리(저넬 모네이)는 온전히 자신들의 뛰어난 능력과 용기로 흑인과 여성에 대한 이중적 차별을 극복하고 엄청난 업적을 이룬다. 이들이 겪는 차별과 고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하다. 뛰어난 수학실력과 과학적 통찰력으로 핵심부서로 진급해 간 캐서린을 백인 남성들은 동료로 여기지 않으며 음료수와 식기조차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흑백분리정책으로 흑인전용화장실에 가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해 다녀야 한다. 메리는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백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아야 하고, 도로시는 탁월한 리더십과 미래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비전을 갖고 있음에도 관리자로 진급하지 못한다영화는 실제 사건보다 훨씬 더 압축적으로 두 시간 내에 이 모든 고난과 좌절의 극복기를 그려내야 하기 때문에 이 개별 여성들의 뛰어난 재능으로 너무 쉽게 해결되는 듯한 문제들과 성취, 그리고 백인들의 급격한 반성과 흑인 남성들의 조력은 지나치게 달콤한 동화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이 영화는 현재에도 매우 유효한 교훈을 제공해준다. 필요한 인력이기 때문에 고용하면서도 소수자들을 주변화하기 위해 어떤 정책들을 쓰고 있는지 말이다. 예를 들어, 임시직, 비정규직으로 유지되는 흑인 여성 인력들. 그리고 급격한 기술발전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타격을 받게 되는 소수자들. 결정권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관리자, 정규직으로의 진입은 너무나 중요하다. 또한 현재 빅데이터, 사물 인터넷 등으로 대표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날 때 여성, 소수인종, 이민자 등이 일자리에서 가장 크게 타격받을 수 있다는 여러 보고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술발전에 여성들이 어떻게 대비해야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고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여성과 기술이 적대적 관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히든 피겨스>에서 도로시는 컴퓨터인 자신들을 기계가 대치하려 하자, 그것을 파괴하거나 적대하지 않고 그 기계와 시스템을 파악하고 활용하려 한다. 그 이후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기계 컴퓨터가 여성 컴퓨터들을 대체할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간파한 도로시가 동료 후배 여성들을 사전에 교육시켜 프로그래머로 정규직화 할 수 있게 하는 장면은 여성의 과학기술 교육의 필요성과 집단 여성의 힘을 보여준다.



 

현재 북미를 중심으로 젊은 여성들에게 코딩 교육을 시키는 운동이 벌어지는 이유도 여성으로서 어떻게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최근 제작된 <코드 걸>(2016) 같은 다큐멘터리는 이러한 운동의 이유와 효과를 매우 흥미롭게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그래서 필요하다. 과거의 여성과 현재의 여성 간의 대화는 단순히 영웅을 필요로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어떻게 과학기술을 이해하고 대응해야할지에 대한 힌트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늘 기술과 여성 간의 관계를 고민해 온 선구적인 실험영화 감독 린 허쉬만의 사이버판타지 <컨시빙 에이더>(1997)는 시간을 뛰어넘어 이루어지는 여성과학자들 간의 대화를 아예 영화의 설정으로 가져온다.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실존 인물 에이더 러블레이스(1815-1852, 틸다 스윈튼이 에이더를 연기한다)와 버추얼 리얼리티를 통해 만나게 되는 현재의 에이미는 100년 전 에이더가 그녀의 과학적 창조성을 방해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억압당했던 것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고통 받는다. 남자친구는 그녀가 과학기술에 이바지하기 보다는 아이를 낳기를 바란다. 에이더와 에이미는 100년이라는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DNA처럼 서로 얽혀 닮은꼴을 이룬다. 그녀들을 공통되게 가로막는 가부장제는 여전히 굳건하다.





 

한편, 기술과학 발전은 인력의 문제나 일자리의 영역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의 놀이 문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비디오 게임과도 같은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을 활용한 엔터테인먼트에의 여성의 진입은(플레이어와 개발자 모두로서) 남성지배적으로 형성된 기존의 게임 문화에 균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여성의 유입은 분명 시장의 확대와 새로운 창조성의 계기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했다고 여기는 남성 게이머들과 프로그래머들은 이 상황을 달갑게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성혐오적인 공격을 퍼붓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일어난 클로저스 게이트’(비디오 게임 클로저스의 캐릭터 목소리를 담당했던 김자연 성우가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자 남성 게이머들의 사이버공격이 이루어졌고, 뒤이어 게임사인 넥슨이 김자연 성우를 해고한 사건)나 북미에서 여성 게이머와 프로그래머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게이머 게이트등이 그 증거다. 남성 게이머와 개발자들의 이러한 여성혐오적 공격은 하이테크를 활용한다고 생각되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로(초기 영화에 사운드가 도입되고 기술적 발전이 일어나면서 여성인력들을 배제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최첨단 기술을 남성의 영역으로만 여기며 여성들을 배제하려는 낡은 편견에 근거하는 측면이 있다.


 

<히든 피겨스>에서 인간 vs. 기계라는 낡은 적대 방식을 벗어나 컴퓨터 여성들의 미래를 준비한 도로시의 비전이야말로, 혁명적으로 비약하고 있는 자동화와 정보화로 4차 산업혁명이 다가오는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여성의 일자리, , 삶의 방식, 놀이 등 전방위에 걸쳐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은 정말로 돌봄노동이나 가사노동 등에서 인류를 해방시켜줄 수 있는가? 아니면 서비스 업종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인가? 빅데이터로 집적된 자동화와 드론 기술 등으로 인해 정말로 더 이상 직접 시간을 들여 쇼핑을 할 필요가 없어질까?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창조적인 영역까지 확대되어 상용화될 수 있을까? 혹은 더 오래된 문제들은 어떻게 변화할까? 예를 들어, 앞으로 더 발전될 과학기술은 재생산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성별 선택과 시험관 아기, 피임과 낙태의 확산, 양육에 대한 국가적 지원, 유전자 조합, 줄기세포 등은 여성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미래를 가늠하고 상상하기 위해 미래에 대한 예견뿐만 아니라 과거의 여성 창작자들이 바라본 미래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재생산 노예로 전락한 여성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디스토피아 미래를 그린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이 소설은 현재 엘리자베스 모스 주연의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 중에 있으며, 독일 감독 폴커 슐렌도르프에 의해 1990년에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나 오늘날 시험관 아기 생산과 유사한 메커니즘을 페미니스트의 대안적 미래로 내높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학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1970)를 통해 여성의 눈으로 여러 갈래의 미래세계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위에서 언급된 영화나 관련 이슈를 다룬 일부 작품들을 19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2017.6.1-7) "쟁점 섹션"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조혜영/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