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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11회(2009) 영화제

레인rain




 

1. 이런말 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흑인을 볼 때면 시커먼 피부색과 단단해 보이는 체구 때문에 위화감 가득한 시선을 보내거나, 심야 공중파에서 익히 본 기아에 찌들고, 제대로 된 옷쪼가리 하나 걸치지 못한 채 맨발로 걸어다니는 불쌍한 인종이란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처음 레인에 대해 접한 이미지가 홈피에서 깡 마른 어린 흑인 소녀가 홀로 달리고 있는 사진이었으니, 위의 감상과 별 다를 바 없는 영화일 거라 짐작했습니다.

 게다가 11 상영되는 벚꽃 동산을 시작해서, 하트컷, 쏘냐를 연달아 보고 마지막에 보는 영화이니 조금 지쳐서 의자에 구부정히 앉아 커피만 쪽쪽 빨고 있었죠. 미리 읽어본 레인의 짧은 줄거리로는 영 제 흥미를 끌만한 소재가 아니었어요.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상영 시간 내내 훌쩍훌쩍, 글썽글썽 하게 만들었던 레인은 바하마의 외딴 섬에서 할머니의 식사를 챙겨 주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레인은 어릴 적 엄마에게 버림받고 할머니 손에서 컸지만, 반항기나 구김살 하나 없는 어리고 순수한 소녀입니다.

그런 레인에게 어느 날 시련이 닥칩니다. 언제나 그녀를 특별한 아이라고, 신께서 축복한 아이라고 레인에게 용기와 사랑을 주었던 상냥한 할머니가 그녀가 밖에 나간 사이, 조용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레인은 결코 감정 표현이 풍부하고 살갑게 행동하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단 하나뿐이던 할머니를 잃고서도 엉엉 소리 내어 울지도 통곡 하지도 않고, 그저 텅 비어 버린 방 침대 위에 홀로 앉아 할머니의 옷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흐느낍니다.

 


3.
레인에게 어머니란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멀고, 아득하고, 자신을 버렸다 하더라도 어딘가 신비롭고 신성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천박한 옷차림을 하고, 자연스럽게 남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엄마 글로리를 보고 혼란에 빠집니다. 그녀는 자신을 끔찍히도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던 할머니와 달리, 이런 저런 따뜻한 인사말이나 포옹 하나도 해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혼란스러웠던 건 비단 레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글로리 역시 갑자기 나타난 딸을 보며 자신과 다르게 바르고 티 없이 맑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만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돈을 받고 남자에게 몸을 팔았고, 그 돈으로 노름을 하고, 마약을 사는 낙오된 인생을 살고 있었으니까요. 레인이 혹시나 자신처럼 살게 될 까봐, 자신의 이런 모습들을 보고 경멸하게 될 까봐 전전 긍긍 하며 레인을 대합니다.

 

 

 


 
4. 레인은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멘토 아담스 선생님을 만납니다. 육상부에 들어 자신이 달리기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자신과 다르게 거침 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친구 마들렌도 사귀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엄마 글로리와는 서먹하고 어정쩡한 관계가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두사람은 서툴고, 겁을 먹고 있습니다. 레인에게 창부임이 알려지는 게 두려운 글로리아는 레인이 물었을 때에 필사적으로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레인에게 마약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녀가 다가왔을 때에 화를 내고, 윽박을 지릅니다.

반면에 레인이 미치광이에게 희롱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에 망설임 없이 덤비며 그녀를 구해내기도 하고, 통조림에 손을 베었을 때에도, 혹여 레인에게 에이즈가 옮을까 크게 고함을 지르며 상처를 감추기도 합니다.

제대로 엄마 노릇을 하지 못한다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과 압박이 글로리아를 잠식하고, 언제나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레인은 자신의 존재가 짐 같다고 느끼게 됩니다. 달릴 때엔 모든 고민이 사라져요 라고 말한 레인이 계속 달리는 이유는 자신의 이런 주체 못할 감정들을 잊기 위해, 어쩌면 어머니 글로리를 이해하기 위해 달렸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매번, 매번, 그런 식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두 사람은 점점 지쳐갑니다.

 


5.
분명 두 사람의 사랑이 분명히 보이는데, 그것이 전해지지 않고 일방적이게 되는 것을 보며, 보는 이 의 마음까지 쓸쓸하고, 외롭고,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서로 손 내밀기를 무서워 하는 두 사람을 보며 비단 이것이 저런 영화적 요소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 엄마에게 버림 받은 아이가 아니더라도, 아이에게 떳떳하지 못한 모습이 추하게 느껴지는 엄마가 아니더라도, 조금만 둘러 보면 자신의 가족이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모와 자식간의 벽이 커지고, 흘러 넘치는 감정에도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서투른 내 사람들이, 우리들이 자연스레 녹아 있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간신히, 정말 아슬아슬 하게 레인과 글로리의 손끝이 닿고 끝이 나지만, 그것이 말로 다 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복잡하고 위태로운 감정과 갈등이 눈 녹듯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서로 눈을 피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손끝만 닿아 있는 상태이니까요. 보는 내내 울컥하고 마음 짠하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 미처 넣지 못했던 이야기

 

-하나, 자연스레 흘러 나왔던 흑인 음악이 감정을 고조 시키는데 한 몫 단단히 했습니다.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소름 끼쳤어요. (무슨 내용인지 알아 듣지 못한 게 아쉽지만요-.)

 

-, 배우들의 연기가 100점 만점! 할머니, 엄마, 선생님 역에는 프로 배우였다고 해요. 주인공 레인은 감독이 직접 뽑은 아마추어라는데 물 흐르듯 자연스런 연기가 아니라 어설픈 듯한 연기가 레인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어찌 보면 흔히 사용되는 스토리이지만 심금 울릴 만큼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레인의 어색한 듯한 시선이 무척 어울렸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레인과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아마추어 배우! 바로 레인의 친구 역을 했던 마들렌 역 여자아이 입니다. 아 정말 그 게슴츠레한 눈빛은 그냥 ㅋㅋㅋ 어우.

 

-, 바하마의 문화가 잘 스며든 영화에요. 관광 수입이 가장 큰 나라인 만큼 아름다운 풍경과 바다가 절묘하게 녹아 있습니다. 화려한 관광지 뒤에 숨어 살고 있는 뒷골목 사람들 이야기를 그렸다는 것도 흥미로웠구요. 글로리가 비 속에서 레인을 찾아 다닐 때 바하마의 축제 장면이 나오는데, 모두가 춤추고 노래 부르는 사이에서 혼자 레인을 찾아 헤매는 장면은 특히나 인상 깊었습니다.

 

-, 조금 아쉬운 거라면 마지막이 너무 급히 끝났다는 느낌과, 글로리의 과거를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라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말대로라면 꽤나 영특한 아이였을 글로리가 어떻게 해서 창부가 되었는지, 왜 레인을 버려야 했는지, 등등

 

 


 
-다섯, 인기 짱이었던 감독님 ㅋㅋㅋ 게스트와 만남 끝나고 우리들한테 계속 붙잡혀 있으셨다는! ㅋㅋ 굉장히 미인이신데다가 사인도 해주시고, 사진도 찍고 악수도 해줬던 감독님!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좋은 얘기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