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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12회(2010) 영화제

전경린, 변영주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만남>



4월 10일 토요일 오후 3, 아트레온 1층 열린 광장에서 전경린 작가와 변영주 감독의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만남이 열렸다.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변영주 감독의 재치 있는 입담과 전경린 작가의 미소 띤 대답으로 이어진 대화는 훈훈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변영주 감독의 <밀애>의 원작인 전경린 작가의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신작 <풀밭 위의 식사>를 전경린 작가와 변영주 감독이 번갈아 낭독하며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전경린: 이렇게 감독님을 다시 만나니까 예전에 <밀애> 시사회 생각이 나는데요. 저는 당시에 영화를 보면서 참 힘들었어요. 소설이라는 것은 혼자만의 작업이잖아요. 쓰는 것도 혼자 하고 읽는 것도 그렇고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제 이야기로 만든 영화를 본다는 것이 참 당황스러웠어요.


변영주: 작품이 어떻게 영화화되는지 모르셔서 더 당황하셨을 거예요. 작가님의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만남>을 제 첫 극영화 원작으로 결정한 이유 중 하나가 작가님의 글에는 저에게 부족한 이면의 섬세함이 있거든요. 그리고 미흔이라는 캐릭터가 굉장히 다층적인 점이 인상 깊었어요. 원작을 영화화한다는 게 사실, 원작을 영화화하는 것이 아니라 원작을 읽은 내 마음을 영화화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왜 영화 제목을 원작 그대로 안 가고 <밀애>로 바꿨냐면요. 전경린 작가님 팬들조차 소설 제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웃음) 사실 저는 <주부생활>이라는 제목으로 하고 싶었는데 제작사 쪽에서 표정이 좋지 않더라고요.


 

전경린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134페이지 낭독.



전경린: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더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죠. 미흔은 남편이 준 상처를 일방적으로 받고 고통에 빠졌지만 아파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상처를 가지고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선택했어요. 자유를 입증하며 고통을 책임진 거죠. 자신이 더 나빠지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한 거죠.


변영주: 정말 마음에 들었던 것이 미흔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욕망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것이었어요.



 

전경린 작가,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82페이지 낭독



변영주: 이 낭독을 들으니 전경린 작가님께 사랑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네요.


전경린: 많은 단어들이 잘못 사용되기 때문에 인생이 꼬이는 것 같아요. 사랑이라는 단어는 수수께끼이자 미스터리죠. 어떨 때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다르게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지금 읽은 부분은 사랑이라는 말이나 의식이 있기 전에 먼저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사랑은 아니지만 이것이 없으면 절대 사랑일 수 없는 그런 순간이랄까요.


변영주: <내 생에..>는 미흔과 언제나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만 책을 다 덮고 나면 그런 부분이 생각나는 게 아니라 지독히도 외로운 이 남자의 냄새, 호흡이 기억에 남아요.



 

변영주, <풀밭 위의 식사> 48페이지, 낭독.



전경린: 원래는 다른 페이지를 낭독하려고 생각했었는데요. 이번 개막작을 보고 바꿨어요. 제 책은 30대 중반을 넘어선 이 여성들이 아이를 갖고 싶다면 내년까지밖에 시간이 없다고 선고를 받는 내용인데 개막작을 보게 되면서 모성이라는 것에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모성이 여성의 본능인가, 시대가 강요해서 생존하기 위한 학습된 방편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변영주: 20대에 결혼한 친구들은 독립하고 싶어서 결혼을 선택하더라고요. 그건 이해가 됐어요. 그런데 30대에 결혼한 친구들은 아이가 갖고 싶어서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이렇게 말씀 드리면 뭐하지만 전 애들이 싫어요. 가장 공포스러운 게 엘리베이터에서 어린 아이와 둘이 갇히는 상황이에요. (웃음)


전경린: 이번 개막작에 나오는 어머니는 테러 활동을 위해서 딸을 버리는데요. 30년 후에 딸이 어머니를 찾아왔을 때 어머니가 딸에게 처음으로 하는 말이 이거예요. “왜 왔냐전 처음에 참 뻔뻔스러운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우리의 의식이 자유로워진다면 모성이라는 것은 어떻게 존재할까, 조금 더 모성이 자발적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감독님이 난 애들이 싫다고 말하는 것처럼요. (웃음)

 


변영주: 전경린 작가님은 이번에 <풀밭 위의 식사>에서 10대 시절 당한 성폭력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누경이라는 인물이 나오잖아요. 폭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것은 그 동안의 작품 중 처음인 것 같아요.


전경린: 여성이 성장기에 폭력적인 상처를 입기 쉬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대한민국의 여성 중에서 그러한 외상적 스트레스를 겪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이거나 굉장히 운이 좋은 예외적인 경우일 겁니다.


변영주: 여기에 나오는 기현이란 인물은 완벽해요. 안정적으로 돈도 잘 벌고,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누경에게 종합선물세트 같은 남자거든요. 근데 누경은 기현을 받아들이지 않죠.


전경린: 종합선물세트라는 표현이 맞아요. 누경이에게 이 남자를 선물해주고 싶었어요. 사실 기현은 정말 완벽해요. 부모님도 안 계시잖아요? 이렇게 좋은 조건의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웃음) 하지만 조건이 좋다고 마음이 가지 않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의 그 잔인한 속성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변영주: 저도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질투를 느낀 것이 읽어보니 신작이 가장 좋더라고요. 창작자로서 그만큼 좋은 게 있나요, 발전해나가고 있다는 얘기잖아요. 전경린 작가님의 소설은 여성의 상처를 극복하는 내용이 많은데 그런 점에 있어서는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을 빼놓을 수 없죠. 20살 여자애의 이야기인데 1980년대가 배경이고요. 선생님 나이 또래, 그 친구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죠. 세상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와 맞서는 여자 이야기고요.


전경린: 20살 무렵은 가정, 부모와 자신을 분리하고 자기만의 역사를 시작할 징후와 기미가 보이는 때예요. 하지만 징후와 기미에 불과하기 때문에 막연하고 더듬게 되고…… 힘겨운 시기죠. 감독님의 영화인 <발레교습소>도 그 무렵의 이야기 아닌가요?


변영주: 저는 그 무렵은 소비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정신차리자 다짐하고 도서관에 갔다가도 다음날은 어쩔 수 없이 술집으로 또 이끌려 들어가는 그런 것이 그 시기에는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12살짜리 조카가 자기가 주식중개인이 되겠다고 할 때 오싹하더라고요. 너무 구체적인 꿈인 거죠. 어린 아이에게 그런 구체적인 꿈이 필요할까요? 여러 가지 다양한 꿈을 꾸어야 할 나인데.





질문타임 


- 여성이 사회적 폭력에 노출되기 쉬운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하셨는데, 작가님은 20대 초반의 저희 또래도 그랬으리라 생각하시나요?


전경린: 상처라는 것은 그런 거죠. 요즈음에 사회의 성폭행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났잖아요? 제 선배 한 분은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땅이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과 슬픔을 느낀다고 해요.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직접적인 피해자만 상처를 입는 게 아니에요. 그 사건을 접하고 알게 된 우리 모두가 상처를 입는 거죠. 요즘 젊은 분들이 상처가 줄어든 세대일 수는 있겠지만 그 상처가 가벼워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전경린: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질문이 있는데요. 저번에 보니 변영주 감독님이 꼰대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던데, 그건 어떤 의미인가요?


변영주: 선생님, 이런 자리에서 꼰대라는 단어는 좀…… (웃음)


전경린: 저는 단어의 어감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웃음)


변영주: 제가 작업을 하다가 일이 안 되고 졸리기도 하고 해서 밤에 밖에 나갔어요. 큰 길가로 나가니까 각 학원에서 애들이 쏟아져 나오더라고요. 그 애들 무리를 보면서 죄의식을 느꼈어요. 저는 그 아이들보다 행복했던 것 같거든요. 제가 20살 때보다 더 불행해 보이는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근데 골목으로 들어가니까 14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저를 보면서 굉장히 애처로운 눈빛으로, 10대 남자애가 그렇게 애처롭게 부탁을 한 건 정말 몇 십 년 만의 일이었어요.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2500원을 제 손에 쥐어주면서, 저 말보로 멘솔 좀 사다 주세요. 그래서 저 사다 줬어요. 그러면서 한 마디밖에 못 하겠더라고요. 이거, 되게 끊기 힘들어.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이냐고요. 겨우 그런 말밖에 못하는 제가 한심하죠. 이런 죄의식이 저를 꼰대로 만들어요

 

변영주: 저도 영어 잘 못하는 사람이지만 2010년의 대한민국은 정말 컴플리케이티드해요. 2006년에 여성평등지수를 조사한 게, 우리나라가 세계 4위로 나왔어요. 법에 명시된 평등지수를 조사한 거였는데 이게 4위로 떨어진 것도 성폭력지수가 너무 높아서죠. 근데 2010년에 조사한 여성평등지수는, 이건 관습적 면에서 반영된 건데 115위예요. 케냐가 우리보다 높아요. 요르단이 우리보다 높아요. 근데 이 4위 기사는 어디에 링크되어 있냐 하면, 밀리터리 카페, 뭐 군대 다녀오신 분들…… 이런 데에 있고 115위 기사는 여성 관련 그런 클럽 같은 데에만 올라가 있고. 서로 우기기에만 급급한 게 안타까운 현실이죠.


 

첫번째 질문자: 단도직입적으로 다시 묻자면, 남자는 상처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전경린: 그건 전혀 다른 문제죠. 남자분들이 상처받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도 아니에요. 다만 제 몫이 아니기 때문이죠. 저는 제가 이 땅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자라지 않았더라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남성작가가 남성의 상처를 천착해주길 바라죠.


변영주: 제가 김훈 작가님에게 왜 여성의 상처는 작품에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한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근데 그건 제가 생각하기에 굉장히 포악한 질문이거든요. 저는 남성의 상처를 가장 잘 묘사하는 분이 김훈 작가님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분에게 왜 여성의 상처를 쓰지 않느냐고 묻는 건 잘못된 거죠.



변영주: 밀애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전경린 작가님을 만나서, 작가님의 새로운 소설과 옛 소설들을 다시 읽으면서 작가님을 새롭게 다시 알 수 있었던 기회인 것 같아요. 즐거웠습니다.

전경린: 저도 오랜만에 감독님 만나서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두 분의 대화 이후 이렇게 전경린 작가님의 사인회가 이어졌습니다.
매우 유쾌한 시간이었던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만남'!!

IWFFIS BUGS 어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