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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보라]

여성, 그대의 이름이 궁금하다



시무시했던 올 8월 폭염 속에서 만났던 인연들이 날이 갈수록 싸늘해지는 바람 덕에 마치 옛 추억이 된 듯 느껴집니다.
구로문화재단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엄청난 영화학과’라는 이름 하에 내 손으로 영상 한편 만들어 보겠다고
모인 선생님들과 저와의 만남이 이루어졌지요. 이분들과의 만남에 날씨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 건, 강의 날만 되면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가며 찾아와 수강생들은 강의를 들으러 가는 게 아니라 극기 훈련 수준이었을 겁니다.^^   

영화제 사무국에서 강의 의뢰를 받고 첨엔 약간의 고민이 되었지요.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짧은 영상 한편 제작하기에도 녹록치
않은데 거기에 ‘여성주의적인 시각들을 어느 정도의 수위로 녹여야 할 것인가’였지요. 또한, 구로예술대학에선 영화학과를 이제 막 시작
하는 단계인지라 영화제작에 관련된 기자재들이 구비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기자재를 함께 쓰는 공동작업을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주제가 없이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영상제작강좌에서 어떤 코드로 공동작업팀을 구성해야 할까라는 고민도 들었지요. 하지만
이런 고민도 잠시! 카메라 한번 잡아 본적 없는 분들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여성주의적인 제작 과정이라고 생각해 왔던 방식을 밀고
나가 보기로 했지요. 여성인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모든 분들이 길이, 장르, 방식에 상관없이 개별 작품을 만들어 보는 것이지요.
기자재와 여러 여건들이 걱정 됐지만, 구로문화재단과 여성영화제에 도움을 주겠지라는 약간의 막무가내 근성(^^)을 깔고 말입니다. 













첫 강의 내내 저의 모토는 ‘나의 이야기로 영상 하나씩 만들어 봐요’ 였지요. 이때까지만 해도 참가자 분들은 이 단순 명료한 한 마디가
얼마나 인내를 필요로 하는 과정인지 예상할 수 없었죠. 소재를 찾고 기획안을 쓰고 어떤 방식으로 제작할지를 고민해 나가면서 제작
단계의 초반부가 마무리 될 즈음까지는 강사가 이끌어 나가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 라는
상념의 도돌이표를 반복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홀로 끌어나가야 하는 막막함과 고독한 시간들에 부딪히지요. 여성이 자신의 경험과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는 것,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고 참 힘든 일이지요. 평소에 보는 수많은 영상매체들을 접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하고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영상을 접할 때는 큰 감동을 받던 사람들도 막상 자신의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서 끄집어내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니까요. 맘속에 담아 두었던 생각들을 보여준다는 부담감이 있었을 텐데 기획안을 받아본 저는 큰 감동을 했지요. 선생님
들의 기획안들 모두가 용기 있게 자신의 고민과 생각들을 담겠노라고 외치고 있는 듯 했으니까요.   

하루 2시간씩 10회의 강좌로 자신의 이야기를 끌고 나가 영상으로 완성한다는 건 시간적으로 매우 무리였지만, 강좌를 거듭할수록
선생님들의 열의는 더욱 높아갔지요. 그건 아마도 제작 과정에서 생긴 자기 작품에 대한 애정이 큰 추동력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준비된 기자재들이 개별 작품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는 공지를 한 후, 참여자분들은 10년 동안 꺼내 보지 않았던 카메라를
들고 오시고, 고장난 친구의 카메라를 수리해서 들고 오시기도 하고, 심지어 이번 기회로 계속 작업을 하시겠다며 소형 캠코더를 장만
하셔서 촬영을 해오시기도 했지요. 
 












영화제작 강좌라는 이름으로 모인 우리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많았고, 영상 자료로 쓰기위해 가져온 개인 사진들, 편지들, 촬영
본들을 체크할 때면 다들 각자 작업을 하다가도 몰려와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자료들을 구경하곤 했지요. 참여자분들은 20대 대학생부터
중년층의 주부들과 60대 할머니까지 다양했는데,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고삐가 풀린 자신의 이야기는 실로 방대했지요. 기계를
다루는 일이라 젊은이들에게 방해가 될 거라며 첫 강의부터 걱정하시던 양선생님은 전 강좌를 모두 출석하시며 60평생 자신의 삶을
영상으로 담는 작업을 하셨고, 밤샘 작업을 하며 새벽에도 저와 문자를 나누며 작업에 올인 하셨던 박선생님은 아내로 엄마로 지낸 시간
을 뒤로 하고 영화계에 종사하고 싶었던 당신의 꿈을 다시 꾸는 이야기를 담으셨지요. 또 인상적이었던 한 분은 암에 걸려 투병 중이셨던
여성분이었는데, 연애시절에 남편과 주고받던 연애편지며 과거의 기억과 흔적들을 자료로 가져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그 이야기를 영상에 담으셨지요. 젊은 분들은 실업문제로 고민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의성 있게 담아 많은 공감을 사기도 했고, 자신뿐만 아니라 참여자분들을 배우로 섭외해 짧지만 강렬한 멋진 단편영화를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주었죠. 

저는 또 이렇게 제작 강의를 하며 영상을 통해 다른 여성들의 삶을 듣고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지요.
여성들이 자기의 경험을 풀어낼 기회와 시간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또 한번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구성안과 시나리오를 함께 논의
하는 과정에서 만난지 몇 번 안 된 분들에게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와 삶의 지혜를 듣기도 하는 감사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23일 구로에서 열리는 축제에 수료 작품들이 상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이 대중 앞에 첫 선을 보이는 것에 많은 박수를 보내고 싶고, 첫 상영을 했던 예전의 저의 모습이 떠올라 잠시 웃음 지어 봅니다. 열정으로 가득했던 참여자 분들의 눈빛이 인상적이었던 첫 만남부터
예상치 못했던 제작과정의 고단함을 저와 소통해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해준 선생님들을 떠올리니 뿌듯해집니다.


2010. 10. 20. 사포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