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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서구적 외모의 ‘춘향’, 홍세미

서구적 외모의 ‘춘향’, 홍세미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7탄 홍세미

 

 

한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내가 아는 역대 춘향은 문예봉, 조미령, 최은희, 김지미, 문희에 이어 홍세미가 아닌가 생각한다. 모두 다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을 갖춘 품위 있는 여배우들이다.



1968, 세기상사(대한극장)는 전국에서 춘향 공모를 했는데 1,800여 명의 응모자가 몰렸다. 일주일간의 카메라 테스트를 거쳐 20명의 후보자를 뽑는데도 진이 빠졌다. 눈을 감아도 떠도 온통 여자들 얼굴만이 보이던 그때는 참 피곤했다. 도홍숙은 군계일학처럼 당선되었다. , 코가 뚜렷하고 목과 어깨 선이 품위 있게 흘렀고 한복이 너무 잘 어울려 향수처럼 번지는 품위가 압도한다. 우리는 새 춘향과 함께 저녁밥을 먹었는데 그 자리에서 여배우의 이름을 짓게 된다. 동석한 배우 어머니는 예명에 기러기 홍()자를 넣어달라고 청한다. 기러기 꿈을 꾸고 난 아이라고. 내가 세기상사에서 뽑은 아름다운 기러기 같은 아가씨가 어떠냐고 했더니 모두 다 찬성, 새 성춘향의 이름은 홍세미가 되었다


 여배우 홍세미 ©한국영상자료원




춘향전은 우리의 고전이 된 계급사회를 풍자한 러브 스토리. 이야기 줄거리는 이미 결정되어있고 어떤 선남선녀가 고난과 유혹을 이기고 절개를 지켜가느냐가 관람 포인트가 된다. 나는 여러 개의 춘향전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변사또보다 이몽룡이 젊고 미남이란 것을 알게 됐다. 춘향은 비록 형틀에 묶여 매를 맞지만 늙고 초라한 벼슬아치보다 싱싱한 서방님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인지상정. 그렇다면 변학도를 젊고 매력있는 인물로 앉혔을 때 춘향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일까? 나는 그것이 알고 싶어 박노식을 한껏 젊고 멋지게 분장시켜 동헌에 앉혔다. 사실 박노식은 액션영화에 빠졌지만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남이다. 물론 춘향은 시나리오대로 그런 사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인행색의 이도령을 옥중에서 만난다. 나는 향단을 태현실로 정했는데 미모로만 보면 춘향을 앞지르는 여배우 아닌가. 이렇게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감독의 작업이라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나졸에 박시명, 송해가 처음 등장하고 기생 점검 때 뚱뚱이 백금녀가 박노식에게 애교를 떨다 혼나는 장면도 시나리오에는 없다. 하여튼 대한극장 개봉에서 16만 명을 동원한 홍세미는 스타가 되는 데 걸림돌이 없었다.



홍세미의 두 번째 작품은 <본능>, 이정호 각본에 박근형이 공연한다. 이야기는 생략하고, 홍세미는 제왕절개로 출산을 하는데 지인의 병원에 부탁해서 촬영 일정을 정했다. 산모의 흔쾌한 승낙으로 카메라가 수술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되어 아기의 탄생을 기록적으로 묘사했다. 창작이란 무엇인가? 세상에 없던 일을 새로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편집에서 홍세미의 얼굴을 교체 삽입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검열의 가위가 여지없이 그 장면을 잘라냈다. 아 원수 같은 영화검열이여!



딸이 갑자기 스타가 되니까 아버지는 왕회장에게 데리고 가 자랑을 했다. 일제시대 탄광에서 같이 일한 바 있는 두 사람은 강원도 동향 사람들이다. 나는 그때 여배우가 돈의 그물에 걸렸다는 풍문을 지금도 믿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소문은 확산일로, TV에서 별당아씨로 자리를 굳히던 여배우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일본의 어떤 영화사는 동양여성이 서양여성을 누를 수 있는 유일한 여배우라고 전속을 하기 위해 찾았지만 홍세미는 꽁꽁 숨었다.



몇 년 전 서울의 한 TV가 그녀를 불러 다시 대중 앞에 세웠다. 그때 그녀는 위스키 40병을 나에게 선물했는데 그것은 모두 다 미니어처(축소판 작은 병)였다. 그리고 화면을 보니까 춘향은 간 데 없고 어머니 월매가 움직이고 있었다. 홍세미는 어머니가 교사 출신이며 동생들도 모다 그 길을 지향했다. 예의 바르고 품위 있고 정열적이던 여배우, 지금 그녀의 성숙한 아들 딸들은 엄마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궁금하다.



   

글: 김수용 감독



 

홍세미 1947년 인천 출생. 동덕여대 국문과, 경희대 영문학과를 졸업. 67년 세기상사 신인 '춘향' 공모에서 선발되어 <춘향>으로 데뷔, 70년을 전후 해서 활발히 영화에 출연하다가, 70년대 중반부터 <사람 나고 돈 났지>, <별당아씨> 등 TV드라마에 출연하면서 탤런트로 활동. 78년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가 90년대 이후에 몇 년간 연기활동 재개하다 다시 도미.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