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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화려하진 않지만 이지적인 배우, 김호정

화려하진 않지만 이지적인 배우, 김호정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20탄 김호정


 

 

한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1996년 여름, 을지로 3가 냉면집에서 시나리오작가 김지헌을 만난 것은 운명적으로 나의 마지막 작품 <침향>을 만들게 했다. 미국 이민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소식도 없이 귀국한 그는 냉면에 열중하다가 반갑다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곧 영화 이야기를 시작했고 또래의 정일성 촬영감독과 셋이 뭉쳐 작품 선정에 나섰다. 아무려면 60년대 충무로 노장들이 요즘 영화만큼 못 만들까? 원작은 내가 읽은 구효서의 소설 ‘나무남자의 아내’로 정하고 제작비는 영진공의 판권 담보 3억 원을 지원받기로 한다. 우리는 이미 여러 작품을 함께 했으며 같은 세대를 살아왔다. 세 사람은 동업 계약서를 만들어, 밑지거나 벌거나 책임을 함께 지자고 공증을 하였다.



































사무실은 서울극장의 배려로 얻게 되었는데 김지헌의 주장으로 합동영화사(서울극장)에게 제작, 홍보, 흥행을 맡기자고 제의했고 그 쪽에서는 3억 원을 투자하기로 하고 합의했다. 그때는 비디오 판권이 있어 3~4억에 거래되고 있어 우리는 합동의 투자를 가볍게 본 것이 큰 뒤탈을 불렀다. 영화의 제목을 ‘인간의 향기’로 정하고 캐스팅에 들어갔는데 쉽지가 않았다. 잘나가는 배우들은 개런티가 수억 원대에 이르렀고 평소 보아둔 얼굴도 없어 고민 중이었는데, 청주대 제자 조민기가 여배우 한 사람을 소개한다. 그녀의 이름은 김호정. 무대 경험은 있었는데 영화는 처음이라고 한다. 나는 그때 조민기를 함께 캐스팅해야 했었는데 상대역 남자로 이세창을 굳이 찾느라 고심했다. 



 

   

 

 영화 ‘침향(1999)’에 출연한 배우 김호정(왼쪽), 배우 김호정(오른쪽) © 한국영상자료원




김호정은 얼굴이 여배우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지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다소곳한 아가씨였다. 그것은 청년작가 이세창이 군복무를 끝내고 돌아와 전에 사귀던 여인들과 어딘지 다른 매력으로 다가오게 했다. 김호정은 대사처리가 정확해서 동시녹음 배우로서 손색이 없다. 더욱이 음색이 아름답고 감정 처리가 완벽했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밉지 않을 정도로 이 신인배우를 찍어놓겠다고 약속하고 크랭크인을 하게 된다. 사실 무슨 러브스토리를 찍는 것도 아니고 소위 문예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여배우의 미모 타령만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평생 영화를 만들면서도 여배우가 예뻐야 한다는 사실을 잠깐 망각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에겐 이것이 109번째 작품이 되는데 아직 단 한 번도 제작에 손을 대본 일이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돈 쓰는 데까지 신경을 쓰며 연출작업을 하게 되어 부담이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제작과 감독을 늘 함께 하던 신상옥 감독이 우러러 보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촬영지는 해남 대흥사 주변이 많았는데 손끝이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이루어졌다. 더욱이 대나무 숲길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선 김호정은 처절한 표정까지 지었다. 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편집실 작업을 시작했는데 합동영화사 사람이 들여다보고 베드 신이 부족하다고 불만이다. 그러나 나는 시중의 영화처럼 마구 여배우를 벗기는 일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 알력이 원인이 되었는데 그쪽에선 자기들 투자액을 돌려달라는 입장이었다. 나는 고심 끝에 비디오 판권 2억 원과 사재 1억 원을 합쳐 극장에 돌려주었다. 그리고 영화는 상영할 극장도 없이 떠돌게 되었다. 오호라 그렇게 열심히 연기한 김호정의 평가는 그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다니! 영화의 제목은 <침향>으로 했는데 김호정의 데뷔작은 향기처럼 물속에 가라앉았다. 이번 임권택 감독의 신작에 김호정은 다시 데뷔한다고 들린다. 


그간 문필가도 아닌 내가 연재를 쓰는데 큰 도움을 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글: 김수용 감독


 

배우 김호정 1968년 서울 출생. 동국대 연극영화과 졸업. 1991년부터 연극배우로 활동, 영화는 1999년 김수용 감독의 <침향>으로 데뷔, 이후 1-2년에 한 편 정도로 연극과 영화에서 꾸준히 활동을 해오며, 최근 임권택 감독의 <화장>에서 주연 맡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상(1995년), 최우수여자연기상(2001년)을 받았고, 영화에서는 2001년 <나비>로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 받음.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 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