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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보라]

10대를 위한 미디어 교실, 신나는 성장통(性長通) 후기

10대를 위한 미디어 교실, 신나는 성장통(性長通)

 


손희정"신나는 성장통" 강사 / 영상문화연구가

 


 2014년 여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함께, 해 본 적도 없을뿐더러 자신도 없는 일이 시작되었다. 10대를 위한 미디어 교실, 신나는 성장통(性長通)이 바로 그것이다. 쉽게 말하면 영화를 비롯한 미디어를 활용한 10대 연애 교실이었는데, 내 연애도 쉽지 않은 판에 10대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애 교실이라니. 하겠다고 덥석 맡은 후에 준비를 해가면서 얼마나 책상에 머리를 박았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곤란했던 것은 내가 10대와 무언가를 해 본 경험이 거의 없고 그들에 대한 이해 역시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미지의 대상에 대한 공포같은 것이 나를 사로잡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 강좌는 처음부터 연애 교실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시작은 성폭력 피해 여성 치유를 위한 문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미디어 교육실에서 이런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기획하자는 제안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면서 치유 프로그램은 그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온 전문적인 단체에서 진행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말고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유의미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은 어떨까?싶어졌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의논하면서,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가지게 되었다.

 

첫째, 성폭력이라고 하면 극심한 신체적, 물리적 폭행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성별화, 성애화 되어 있고 또 폭력적인 성문화에 노출되어 있지 않나? 그리고 미디어는 고정적인 성역할 및 성규범과 관습적인 성문화를 생산·재생산하는 공간이지 않은가? (10대의 성의식과 성정체성 형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또래집단과 미디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진행하는 성교육이라면 미디어 리터러시교육 역시 병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 이렇게 일상적으로 성별화되어 있고 규범화되어 있는 성문화가 결과적으로 다양한 성적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근본적인 차원에서 폭력이 아닌 관계에 방점을 찍고 교육을 진행하는 것은 어떨까? 다시 말해, 평등하고 소통이 가능하며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는 관계를 맺는 방법을 함께 찾아나가는 그런 교육을 진행하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교육은 어째서 대체로 여성들만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것일까? 많은 경우 성폭력 피해 방지교육이 강조되지만, 사실 성폭력 가해 방지교육도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모든 10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여남이 함께 모여 관계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이와 같은 몇 가지 질문들을 바탕으로, 아하 성문화 센터에서 성교육을 진행했던 백목련 선생님을 만나 자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들을 묶어낼 수 있는 틀거리로 연애 교실을 그리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땡볕 내리쬐는 여름 방학, 황금 같은 토요일에 10대들의 관심과 시간을 사로잡을 만한 내용을 준비해야 한다는 어떤 현실적인 부담감 역시 없지 않았다.

 


그래도 애초에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해야 하는 법. 연애 교실이라는 틀거리 안에서 우리는 미디어가 재/생산하는 성역할, 남성의 성은 적극적이고 때로는 공격적인 것으로 재현될 때에도 여성의 성은 언제나 돌덩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그려지는 문제, 우리의 욕망이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고 심지어 구성되는지에 대한 비평적 접근, 다양한 성과 그를 둘러싼 우리의 고정관념에 대한 토론, 욕망을 솔직히 표현하는 법과 데이트 성폭력의 문제 등을 충실히 다루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은 무엇보다 참가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토론을 통해서 그 결이 더욱 풍부해져갔다. 아직 연애에 관심이 없는 참가자, 이제 연애가 궁금해지기 시작한 참가자, 불타는 연애와 고통스러운 이별을 경험했던 참가자,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일 지도 모르는짝사랑을 하고 있는 참가자 등.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다양한 질문, 다양한 생각, 다양한 대답, 다양한 혼란들이 등장했다.

 

몸풀기 프로그램에서 영화 감상 및 감독과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5강의 강좌를 진행하면서 강사로서 많이 가르쳤다기보다는 오히려 많이 배운 시간이었다.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느꼈던 것이지만, 수업 참가자 중에서 제일 고리타분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강자 본인이었다. 참가자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시선과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대중 매체에서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은?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할 때에는 <남고괴담>은 없나?같은 질문이 등장했고, 남성의 자위가 코믹하게 그려지는 단편영화를 보고 나서는 남성의 자위는 코미디의 소재가 되지만 여성의 자위는 거의 다뤄지지 않거나 다뤄져도 과하게 야한 것으로 다뤄지는 문제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기도 했다.

 


결국 교육 프로그램에서 강사의 역할이란 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동료들과 토론하고, 그것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는, 바로 그 선까지였던 것 같다. 한 참가자는 어딜 가나 튀는 아이였는데, 여기서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다 귀 기울여 주는 것 같아 좋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것이면, 또 충분하지 않은가.

 

글의 앞머리에서 이야기했던 미지의 대상에 대한 공포 역시 서서히 사라졌다.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감 안에서 자라나는 것인 모양이다. 부담감을 내려놓고, 그저 나는 자리를 깔 뿐 이 시간은 온전히 당신들의 몫,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에너지를 얻기 시작했다. (물론 성장통의 참가자들은 자발적으로 찾아왔거나 적극적으로 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는 특별한 경우였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청소년 운동을 했던 한 지인은 이 알 수 없는 에너지를 10대 뽕이라고 표현했다. 그 말은 10대란 10대를 지나와 버린 사람들의 언어로는 쉽게 규정되지 않는 복잡하고도 오묘한 사람들이어서, 그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일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흥분된 상태로, 한 여름이, 휘리릭, 흘러갔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는 모르겠다. 이런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열정적인 순간들을 경험하게 해 준 참가자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여러분들도 즐거운 시간이었기를.

 

 


필자소개

손희정

영상문화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성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에 관심이 많고, 그 관심을 바탕으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다년간 일하면서 실천적인 영상운동으로서 씨네페미니즘에 눈뜨게 되었다. 저서로는 공저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2005)와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2010)가 있고, 역서로는 《여성괴물-억압과 위반 사이》(2008)와 《호러영화-매혹과 저항의 역사》(201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