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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아시아 단편경선, 아이틴즈 부문 예선 심사위원 구정아, 최지은 인터뷰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대표 경쟁부문아시아 단편경선아시아 여성영화인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참신한 부문으로 주목받아 왔다. 2016년 제1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경선 부문에는 한국을 비롯 중국, 홍콩, 인도, 인도네시아, 이란, 이스라엘,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베트남 등 아시아 여성 감독의 작품이 총 419편의 영화가 출품되었다. 

국내 10대 여성감독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아이틴즈(I-TEENS)부문은 2014년 신설되어, 미래의 여성감독을 발굴하고 있다. 올해에는 십 대들의 재기 발랄함과 현실의 고민을 잘 담아낸 작품이 다수 출품되었다.  

3월 한 달 내내, 아시아 단편경선 부문과 아이틴즈 부문을 심사한 두 명의 예선 심사위원에게 최종 심사회의 직후, 올해 아시아 단편경선, 아이틴즈 출품 작품의 경향과 심사 소감을 물었다. 



1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예선 심사위원 

(좌)구정아 중앙대 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전공했다. 독립영화배급사 인디스토리 창립멤버로 영화일을 시작했으며 2011년에는 <티끌모아 로맨스>(송중기, 한예슬 주연)를 기획, 제작했고 2015년에는 문소리 감독의 '여배우 시리즈'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PGK) 운영위원으로 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 프로듀서로 한국의 큰 여성감독님들과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우)최지은 2006년 대중문화웹진 [매거진t]에 입사, [10아시아]와 [아이즈]의 기자로 일했다. 언제나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어 하지만 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2015년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대중문화 영역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식과 여성주의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대한 인상 및 이미지는 무엇인가? 

최지은 대학 때 여성학 수업 과제로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후로 오랫동안 ‘마음은 있지만 게을러서 미루다 보면 어느새 끝나 있는’ 행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작년에 SNS에서의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캠페인과 관련된 오픈토크에 초대해주셔서 참석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는 자리가 아니었는데도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활발하게 참여하시는 걸 보며 이렇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정아 영화과 대학원생이던 시절 여성영화제의 탄생을 목격했고, 흥분했었다. 2회 때에는 자막 작업도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봤던 <팝의 여전사들>과 같은 영화는 실로 가슴을 뛰게 했고 한참을 매해 참여하면서 즐겼었다. 처음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편파성이 맘에 들었지만, 어쩌다 영화를 업으로 삼게 되고 나서는 그 편파성에 조금 거리가 생기기도 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여성영화제의 구경꾼으로 지내다가 (게다 내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는 모두 여성주의 시각이 결여된...) 작년에 인연이 닿아 피치&캐치 담당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여성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리고 이제는 예전에 거리감을 느꼈던 그 편파성이 이상하게도 편해졌다. 


- 아시아 단편경선, 아이틴즈 심사를 진행하면서 올해 출품작의 경향 및 몇 개의 키워드를 선정한다면? + 심사 소감

최지은 가정 내에서의 억압과 착취, 주로 여성에게 부과되는 감정노동과 돌봄노동, 혼자 사는 여성이나 미성년자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 주거나 생계 문제로 고민하는 20대 여성들에 대한 작품들이 많았다. 이런 주제들은 수많은 여성들이 일상 속에서 느끼는 것인데 TV 드라마나 상업영화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거나 아주 피상적으로, 혹은 왜곡된 채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고민과 고통을 공유할 수 있어 슬프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경험이었다. 

구정아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다. 아무래도 서울여성영화제의 취지상 보기에 힘들고 어려운 영화들이 많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러나 예상 외로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잘 만든 단편들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 내내 떠나지 않는 이미지는, 굳이 하나로 묶자면 ‘위기의 여자들’이었다.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들이 (남성 주인공들도) 모두 어떤 위기를 겪고 있다. 벼랑끝엔 선듯한 그 모습들이 다 얼얼했다. 그리고 ‘일하는 여성들’이 겪고 있는 위기 또한 심각했다. 20대 주인공 중에 취직을 하고 안정된 삶을 사는 이들은 없었고, 일을 하는 경우에는 대개가 성을 매개로 한 감정, 육체 서비스 직종이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내 노동, 그리고 열악한 노동 조건의 비정규직 등이었다. 단편 영화는 상업영화에 비해서 훨씬 더 직접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현재 이곳의 여성들의 모습은 분명 위태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점 없이 현실을 관조하기만 하는 영화들보다는 만든 이의 관점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영화들을 선택하고자 했다.  

- 아시아 단편경선, 아이틴즈 심사를 수락하게 된 이유? 

구정아 앞서도 밝혔듯이 나는 서울여성영화제의 탄생을 지켜보고 환호했던 세대이다. 20대였던 그 당시 세상은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의 공기가 미약하나마 분명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세상이 나빠질 수도 있겠다는, 아니 조금은 더 나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SNS를 통해 활발하게 펼쳐졌던 ‘나는 페미니스트다’ 선언들을 보면서, 아니 어째서 이제 와서 다시 페미니스트라는 걸 밝혀야만 하는 상황이 됐는지 당황스러웠다. 영화계에 있으면서 특별히 여성 차별을 느낀 적도 없었고 이제는 나만 잘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최근에 결국 낑낑대며 올려놓은 돌이 굴러 떨어지는 건 한 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마저 들었다. 계속 낑낑대야 하는 것이 숙명이라면 이제야 비로소 받아들이자고 생각하기도 했고. 편하게 살고 싶었는데 나 혼자 편하게 산다고 그게 아닌 걸 알았다. 너무 거창하게 말한 것 같지만...정말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 쓴 줄 알고 너무한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가마니를 벗는다는 심정으로 여성 창작자들이 만든 좋은 영화를 보고 고르는 일에 기꺼이 함께 했던 것 같다. 

최지은 일단 시장을 통해 걸러지기 전의 다양하고 새로운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나이를 먹어가는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여성이나 청소년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조금이라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 두 심사위원 모두, 페미니스트가 된 (또는 페미니즘 시각을 갖게된) 계기 또는 순간은 언제 였는지? 

최지은 어릴 때부터 여자라서 겪는 부당한 일에 대해 참지 않고 화를 내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사실 딸만 둘인 집에서 자라 여고-여대를 졸업했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성차별이나 성폭력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조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지내다 보니 오히려 무뎌진 감이 있었는데, 지난 해 옹달샘의 팟캐스트 여성혐오 발언 등을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한 대중문화 영역에서의 여성혐오/비하/차별 이슈를 보며 반성했다. 그동안 명백히 존재해온 문제에 대해 기자로서도 여성으로서도 제대로 직면, 대처하고 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페미니스트라고 여기며 살아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다시 정신 바짝 차리려고 한다. 

구정아 나는 딸만 넷인 집의 첫째이다. 계속 아이를 낳은 이유는 단 하나, 아들을 낳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런 태생이 날 때부터 내가 여자라는 자각을 계속 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게다 초중고, 대학교를 남녀공학을 다녔고 특히 대학교 때는 여학생이 절대적으로 적은 과에서 학교를 다녔다. 남성적 문화가 팽배한 그 곳에서 (그 때는 정확히 몰랐지만 아마도) 견디기 위해서 다섯 명뿐인 여학우들끼리 여성학 스터디를 시작했었고 그런 독학을 통해서 자신감도 많이 생기고 시야도 넓어졌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사실 대개 어떤 절실함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혹자가 생각하듯 어떤 욕심이나 여유로부터가 아니라.

 

- 지금 현재의 관심사 또는 이슈는 무엇? 

최지은 대중문화, 특히 방송 영역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1년 전에 결혼을 했는데, 아이를 낳을지에 대해 매일 고민하고 있다. 양육은 부부가 함께 하는 거지만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수유를 비롯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개인으로서의 온전한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피로하고 수많은 폭력에 맞서야 하는지, 또 거기에 물들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과연 한 인간을 이 세상에 내보내는 게 정말 그를 위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만일 아이가 여성이라면 겪을 어려움은 훨씬 더 커질 것 같다. 살면서 가장 내리기 힘든 결정이다. 

구정아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여성의 재현은 심지어 과거와 비교해도 후퇴한 것 같다. TV를 켜면 남성들만 보인다. 왜 세상의 절반이 여성들인데도 이렇게도 배제될 수밖에 없는지 여러 모로 생각이 많다. 


- 끝으로 아시아 단편경선, 아이틴즈 섹션을 관람할 관객들에게 한 마디 

최지은 관객의 입장에서 재미를 느끼고, 여성의 삶과 그를 둘러싼 사회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될 만한 작품을 선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시아 단편경선은 한국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기에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룬다는 면에서 흥미롭게 보실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아이틴즈 부문에는, 이 어둡고 험한 세상에도 지지 않는 에너지와 사랑스러움이 담긴 작품들이 있다. 

구정아 일단 재미있다. 아무리 전달하려는 의도가 좋아도 영화적으로 흥미롭지 못하다면 매체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영화적으로 재미있고 보고 나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뽑고자 함께 노력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놀랍게도 아이틴즈 섹션에서 경선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좋은 작품을 많이 만났다. 아이틴즈 작품들은 말 그대로 애정을 담뿍 담아 선정했으니 부디 눈여겨봐주기를 바란다.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1차 예선심사부터 3차 최종 심사까지, 다양한 국가와 문화 안에서 각 세대 여성들의 현실과 고민을 잘 담은 영화,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세계관이 확장되는 영화를 선정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했다. 두 예선 심사위원과 함께 심사를 진행한 사람으로서 올해 아시아 단편경선과 아이틴즈 본선 심사 과정 역시 우열을 가리기 꽤 어려운 심사가 진행되리라 예상한다. 현재와 미래의 여성감독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안에서 발견하는 역할을 '관객상' 투표를 통해 관객도 함께 할 수 있다. 고심 끝에 최종 선정한 아시아 단편경선 본선 진출작 19편과 아이틴즈 본선 진출작 7편은 오는 4월 8일(금) 영화제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다.  


인터뷰 및 정리: 강바다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