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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SIWFF]

아이찌국제여성영화제를 만나다

1. 떠나기 전 이러쿵저러쿵

9월초 아이찌국제여성영화제에서 심포지엄에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개강과 영화제 일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심포지엄을 위해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더니 영어로는 정말 최소한의 정보만 있고 일본어로 된 리플렛이 고작이었다. 아이찌측에서는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하면 된다지만 막상 가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함께 가는 몇몇 감독을 인터넷으로 검색 중 한국 언론에 아이찌국제여성영화제에 가는 바로 그 감독들을 둘러싼 아이찌여성영화제 관련 정보를 간단하게나마 접할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쾌재를 불렀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사진설명 : 아이찌여성영화제 리플렛. A와 O안에는 <미쓰 홍당무>와 <파주>의 스틸사진이 보인다.)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 12회에서 상영했던 최현영 감독의 <그후>와 김진영 감독의 <나를 믿어줘>를 비롯해서 김영제감독의 <알게 될거야> 김선민 감독의 <가리베가스>, 1회 수상작이었던 박찬옥 감독의 <있다>와 이경미 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 등 7편이나 되는, 우리 단편경선이 배출한 작품들의 상영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박찬옥 감독과 이경미 감독은 최근에 만든 <파주>와 <미쓰 홍당무>를 상영함으로써 명실공히 우리 영화제 출신 감독들이자 한국의 대표 여성감독들에게 초점을 맞춘 특별한 행사라는 것에 시선이 갔다. 이걸 알게 되자 지금까지 안보이던 일본어로 된 리플렛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심포지엄 제목이 가제이긴 하지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아시아영화]라는 것과 함께 가는 단편감독들이 일본의 학생, 시민들과 4일 동안 워크숍을 통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안심도 잠시 그저 나의 순발력이 도와주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9월 7일 인천공항을 떠났다. 준비가 필요  없다고 해놓고 가제라고는 하지만 이런 제목을 가진 세미나를 해도 된단 말인가? 불안감만큼 궁금증이 점점 커져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2. 아이찌국제여성영화제를 만나다


2010년 15회를 맞는 아이찌국제여성영화제는 우리의 ‘새로운 물결’ 섹션에 해당하는 작품 16편(<파주>와 <미스 홍당무> 포함), 일본영화명작선 6편, 그리고 한국단편 7편(<오 뷰티풀 라이프!> 포함) 일본 단편 3편 등 32편으로 이루어져있다. 영화는 여성영화제 우산 아래 <허트 로커>나 <프로즌 리버>같은 대중영화에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에 헌정하는, 그의 영향 아래 있는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프로그램 선택에 있어서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 우리 영화제에서도 상영한 <아제미치 댄스>나 <오리우메>를 만든 히사코 맞추가 감독의 <레오니>가 돋보일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찌 여성회관(WILL)에 자리 잡은 2개관으로 되어있는 상영관에 들어가 보니 관객들은 열혈관객보다는 그 지역 시민들이 많았다. 40대 이상의 여성들이 거의 대부분이고 가끔씩 나이든 아저씨들이 눈에 띌 정도였다. 반면에 기자회견장이나 개막식에 가면 여성들만큼 남성들이 보다 많이 눈에 띄었다. 
(사진설명 : 메인섹션을 설명하는 리플렛. 왼쪽 두번째가 <미쓰 홍당무>  오른쪽 상단의 작품이 <파주>이다)
영화제는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지 않은 채 기자회견과 개막식을 시작으로 며칠 동안의 강행군이 이어졌다. 그중 인상적이었던 것이 나를 걱정케 한 문제의 세미나와 ‘토크쇼’였다. 세미나는 한국에서 온 다른 감독들은 영화촬영준비로 바쁜 사이에 아이찌여성영화제의 수석프로그래머인 키마타 준찌 씨의 사회로 김진영 감독과 내가 패널로 참가해서 진행되었다. 나는 들어가기 전에 “준찌상은 그럼 질문만 하고 아이찌영화제에 관해서 나는 질문을 할 수 없나요?”라고 했던 터라 마침 하고 싶은 질문을 해도 좋다고 하기에 “잘 아시겠지만 우리 영화제는 올해 아시아지역의 여성영화제와 NAFF(아시아여성영화제네트워크)를 꾸려서 협력과 연대를 도모하기 위한 첫 삽을 떴고 아이찌여성영화제는 이렇게 한국교류전을 하는 등 아시아지역의 여성영화제가 최근 굉장히 고무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앞으로 아이찌여성영화제는 어떤 전망을 갖고 있나?” 라고 했더니 “난 항상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부러워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NAFF에 대한 답은 내년은 되어야 답할 수 있을 듯하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아이찌여성영화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수석 프로그래머 기마타씨는 종횡무진 엄청난 에너지로 일을 벌이고 해나가는데 그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 수근거리거나 말거나 그저 웃음으로 대응하는, 그러면서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흔들리지 않고 일을 진행하는 무서운(?)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세미나와 토크쇼 모두 맨 앞줄에 앉아 “난 한국영화가 좋다. 그걸 들으러 멀리서 찾아왔다 근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너무 조금밖에 들을 수 없어 아쉽다” 하고 고함치듯이 말하는 남성 참여자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분은 모든 영화제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열혈관객이라 토크쇼가 끝난 후 자원활동가 중 한분이 내게 조용히 다가와 대신 사과와 위로를 할 정도였다. 질문은 핏대를 올리면서 하지만 답변만 나오면 얼굴이 미소와 함께 한없이 풀어지는 이 남성 참여자는 토크쇼가 끝나자 나중에 복도에서 내게도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는 정말 귀여운(!) 아저씨였다. 최근 우리 영화제에서도 벌어지는 현상이지만 관객 중 남성관객의 질문이 늘어가는 것을 일본에서도 목격하니 묘한 기분이었고
여성 관객들의 환호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순간이 이어졌다. 한국영화 섹션을 통해서 내가 아이찌에서 만난 관객들은 ‘한국영화’에 관심이 있어 온 관객들이거나 영화의 내용에 공감하는 관객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거기 온 남성 관객들이나 관계자는 전부 그렇지는 않겠지만 ‘한국영화’를 보는 재미나 한국영화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서 뭔가 자기가 추구하는 관심사와 이해관계에 기반해서 방문한 것이라면 대다수의 여성관객들이나 자원활동가, 그리고 인턴들은 상영되는 영화와 이 행사에 공감하며 방문객들에게 호의적이고 따뜻하며 친절했다. 게스트라운지에서 만난 한 자원활동가는 한국어를 전공하고 평일에는 직장에 나가다가 영화제 기간 중 주말에만 자원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원활동가가 몇 명이나 되나 궁금해서 물었더니 매년 70명~100여명 정도의 자원활동가가 아이찌여성영화제를 돕는다고 한다. 우리 영화제도 그렇지만 자원활동가들의 활약은 가시적, 비가시적 영역 모두에서 눈부셨고 분명히 영화제를 버티는 힘으로 제 몫을 하고 있었다.


3. 우리 여성감독들과의 만남 그리고 영화제는 계속된다


아이찌국제여성영화제는 아이찌현과 4개의 도시의 지원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영화제 기간 동안 그 4개의 도시에서 이번 아이찌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을 상영한다. 우리 영화제 역시 ‘찾아가는 여성영화 상영회’를 하고 있는 터라 잔뜩 호기심을 가진 채 <미쓰 홍당무>를 상영하는 야토미 시로 이경미감독과 동행했다. 야토미 시는 금붕어로 유명한 네덜란드처럼 육지가 바다보다 낮은 도시라고 하는데 340석이라는 객석을 가득 채운 여성관객들의 빛나는 눈동자와 영화 상영후의 열정적인 환대를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고야에 도착한 첫날 점심도 거른 채 진행된 다도 교육에 이어 여기서 나는 두 번째로 다도교육을 체험하게 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다도를 배우다보니 그동안 여러 차례 일본에 다녀왔을 때 보고 배운 것 이상으로 어쩐지 일본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된 것만 같았다. 이번에 아이찌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어머니의 길 딸의 선택>의 교코 가샤 감독이 자신의 영화 도입부와 마무리에 다도를 배우는 모습을 등장시킨 게 이해가 되었다.
세미나가 열린 다음날, 그러니까 나고야에 도착한 셋째 날에 열린 토크쇼는 이경미 감독, 박찬옥 감독과 내가 패널로 참여해서 1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과의 옛 추억을 인상적으로 말하는, 우리 영화제에도 게스트로 온 적이 있는 히비노씨가 진행했다. 보고 싶은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기에 바로 그런 영화를 보고 싶어 이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히비노씨의 편안한 진행 덕분에 여기저기 웃음이 간간히 터지는 자리였다. 아마 준비가 필요 없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 말일 터이다. 이경미 감독과 박찬옥 감독이 자기 영화 자체에 대한 것 말고 일상적인 영화작업을 둘러싼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흥미로운 자리였다고 할까. 다른 영화제에 와서 다른 프로그램과 다른 진행을 보고 있자니 나를 포함, 우리가 영화제 행사를 너무 딱딱하게 진행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경미 감독의 농담과 박찬옥 감독의 미소가 빛을 발하는 유쾌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나도 웃었고 많은 관객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사진설명 : 왼쪽 하단 리플렛에는 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경선에서 낯익게 보았던 단편 감독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아이찌여성영화제는 한국단편을 별도의 섹션으로 묶어 상영했다)

이번 아이찌여성영화제 방문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은 역시 우리 감독들과의 만남이었다. 우리 영화제 기간에 바쁘다는 이유로 서로 인사만 하던 감독들과 낯선 곳에서 비슷한 목적으로 5박 6일을 함께 보내다보니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다만 우리 단편감독들의 경우 나고야영상위원회에서 지원하고 아이찌여성영화제에서 진행하는 워크숍 프로그램에 참여하다보니 일에 쫒기고 지친 이들을 밤에 잠깐 만나는 게 고작이었다는 것이 아쉽다. 더구나 충분히 소통이 안 된 상태에서 상당히 무리하게 진행되는 워크숍을 지켜보고 있자니 상당히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무리한 일정을 그래도 소화하고 차질없이 나고야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날 상영까지 마친 우리 감독들의 내공이었다. 상당히 어려운 시간이었을 텐데 함께 한 시민들의 정성과 열정을 저버리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마무리를 한 우리 감독들에게 다시 한 번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아이찌에서 돌아오니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진다. 물론 우리 영화제에 대한 것이다. 영화제 안팎에서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요구들이 들어오는 이때 영화제는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전망을 가져야할까? 등등. 분명한 것은 국제영화제인 만큼 영화제 마다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다양한 협력과 연대의 모델을 찾아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국 영화의 미래이자 현재의 주춧돌이 될 여성감독들이 지속적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영화제 차원에서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를 상영하고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할지 만큼 우리 영화제를 찾는 관객들과 국내외 게스트들에게 우리 영화제가 추구하는 목표를 선명하게 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도 이 때문이다.

- 변재란(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순천향대학교 공연영상미디어학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