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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우리 그냥 만나, 그럼 덜 외로울테니까

12번의 순환을 마치고 13회를 준비하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주변의 목소리에 귀를 바짝 대 보았습니다.
'여성영화제에 바란다'는 기획 시리즈의 두 번째 포문을 열어주신 분은 <어떤 개인 날>의 이숙경 감독님과 <귀><친구사이?>의 김조광수 감독님입니다. 11회 상영작인 <어떤 개인 날>은 지역순회상영프로젝트 등을 통한 나눔상영으로 지역 관객들을 가장 많이 만난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그만큼 여성영화제와 인연도 깊으시지요. 감독님이 들려주는 소탈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활개치듯 공간을 마음껏 누빌 13회 영화제, 새로운 2011년을 열어갈 여성영화제는 앞으로도 뜨거운 애정과 차가운 비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11회 <어떤 개인 날>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숙경 감독

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47년을 살아온 저는 1년 전 춘천으로 ‘장기여행’을 왔습니다. 그리고 요즘 다시 짐을 꾸리고 있어요. 동네 근처 큰 마트에서 박스를 얻어다 덜어낼 것들과 가져갈 것 구별지으며 담는 중이에요.

1년 동안 춘천에 살면서 제일 많이 한 일은 걷는 것이었는데, 여기에서는 사람과 부딪힐 일이 없어서 따로 산책로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답니다. 친구들이 저의 춘천행을 보고 제일 많이 던진 질문은 ‘왜?’ 춘천으로 가느냐는 거였는데 사실 딱히 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이라고 대답하곤 했어요,

그냥. 사실 이 짧은 말속엔 떠나온 곳에 두고 온 묵은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럴 땐 ‘그냥’이라고 말해도 알아들어주는 친구들이 좋죠. 가끔 그런 친구들이 춘천까지 와서 머물다 가곤 했습니다.

살다가 이렇게 한 번씩 경계가 될 만한 시간의 선을 하나 그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인 것 같아요. 멀리서 서울을, 지나온 시간들을, 만나온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도 나쁘지 않더라구요.

춘천에 머무는 동안 여성영화제 순회상영회 일정을 따라서 서울 몇 곳과 원주에 다녀온 일이 있었어요. 상영관에는 늘 기적처럼 어디선가 영화를 보러온 관객들과 진행을 도울 여성영화제 스탭들 그리고 권은선 수석 프로그래머가 저를 기다려주곤 했죠.

원주 상영회 때는 눈도 오고 날도 많이 추웠는데 그래서였는지 극장엔 관객들도 그리 많지 않았어요. 영화가 끝나고, 나름 아기자기한 분위기로 GV를 마치고 극장을 나왔습니다. 상영회 진행을 맡은 두 명의 스탭들이 근처 숙소를 찾아 골목을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았어요. 나는 이런 경험 - 낯선 곳에서 며칠 묵는 것-을 좋아라 하는데 저 친구들도 소도시에서 머무는 일이 즐거울까? 원주 시장 뒷골목을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춘천 가는 막차가 끊길 것 같아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아쉽다, 아 아쉽다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늘 이래왔던 건 아니었는지. 사람과 사람, 일과 일 사이에 존재하는 작고 촘촘한 이야기들은 만날 겨를 없이 지나쳐버리는 삶이 허망해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지도 몰라요.

여성영화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관여하면서 만들어낸 역사가 존재하고, 앞으로도 그런 시간들이 흘러갈 테죠. 그런데 요즘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궁금해집니다. 누군가는 저처럼 잠시 춘천 혹은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테고 또 어떤 이는 엊그제 큰일을 당해서 놀란 가슴을 달래며 칩거 중일 수도 있겠죠. 궁금합니다. 다들 안녕하신지, 잘 지내는지. 그래서 ‘그냥’ 만났으면 좋겠어요.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여자들이 ‘그냥’ 만나서 밥도 먹고, 졸리면 잠도 자고, 옆에선 이야기하는데 홀로 구석에 앉아 책도 보고. 그럼 덜 외로울테니까요. 친한 사람들끼리도 좋지만 친해지고 싶은 여자들, 영화하는 친구들하고 편하게 만나고 싶어요. 그냥.


- 이숙경 영화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