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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SIWFF]

연말 결산 - 2012년 한국 여성감독 작품 훑기

 

연말 결산 - 2012년 한국 여성감독 작품 훑기

 

여성감독들을 하나로 묶어서 어떤 경향을 그리려는 시도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올해 개봉된 여성감독들의 작품들 중 상당수는 여성주의 영화가 아니고, 40년대 할리우드식 정의인 여성의 영화(woman's film)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들도 훨씬 넓은 캔버스 안에서 보다 다양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2012년에는 여성감독이 만든 두 편의 주류 충무로 장편영화가 있었다. 하나는 변영주 감독<화차>이고, 다른 하나는 방은진 감독<용의자 X>이다. 두 작품 모두 일본추리소설의 번안물이다. 두 영화 모두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여성의 욕망과 같은 소재와 주제를 상당한 비중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들을 영화의 대표 메시지로 이해한다면 영화의 상당부분을 잃고 말 것이다. <화차>는 IMF 이후 경제 위기의 충격이 한국인 서민에게 끼친 영향이 더 큰 주제이고, <용의자 X>는 폭력의 희생자인 여자주인공을 지키려는 남자 수학자의 활약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화차> 변영주 감독, 스틸

 

 

                                                                                                                         <용의자 X> 방은진 감독, 스틸

 

<열세살 수아>를 만든 김희정 감독<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을 내놓았다. 올해에 나온 여성감독들의 영화들 중 가장 ‘여성의 영화’에 가까운 작품이다. 그것이 꼭 장점인지는 의심스럽다. 중학교 때 일어났던 어떤 사고에 기억이 묶여 있는 세 여자의 심리를 추적하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여성의 정확한 심리묘사보다는 이런 종류의 ‘여성영화’가 종종 빠지는 추상적 관습에 더 몰입해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청포도 사탕 : 17년 전의 약속> 감독과 배우, 스틸

 


참여한 감독이 모두 여성은 아니지만 여성감독이 참여한 여성주의 영화에 가장 가까운 작품은 보건복지부에서 저출산 이슈를 그리는 프로젝트로 제안한 옴니버스 영화 <가족 시네마>다. 모두 높은 수준을 과시하는 작품들이지만, 이중 여성주의적 목소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크게 내고 있는 작품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유일한 남성인 김성호 감독이 만든 <인 굿 컴퍼니>이다.

이 들 중 가장 큰 호응을 얻었던 작품은 신수원 감독의 실직가장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 <순환선>으로 이 작품은 칸영화제에서 비평가주간 카날플러스상을 수상했다. (신수원 감독의 차기작인 장편 <명왕성>은 내년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된 상태이다.) 다른 작품들도 주목할 만하다. <4인용 식탁>의 이수연 감독<E.D. 571>로 SF 장르에 도전했고, 홍지영 감독<별 모양의 얼룩>은 역시 옴니버스 영화였던 <무서운 이야기>에서 같은 감독이 연출한 <콩쥐, 팥쥐>보다 더 오싹한 호러이다.

 

                                                                                                  <가족 시네마-인 굿 컴퍼니> 김성호 감독, 스틸

 


올해 여성감독들의 활약이 가장 컸던 부분은 다큐멘터리이다. 아시아의 여러 국가의 여성들의 삶을 그린 경순 감독<레드 마리아> 있었고, 한국 비혼모들의 이야기를 다룬 백연아 감독<미쓰 마마>, 결혼과 동거, 임신에 대한 지민 감독<두 개의 선>같은 작품들이 많은 호응을 받았으며 특히 <레드 마리아>와 <두 개의 선>은 개봉 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통해 먼저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이들 중 가장 주목을 받았던 작품들은 재판 기록과 경찰의 증언을 바탕으로 용산참사의 진실을 마치 추리물처럼 냉정하게 파헤친 김일란, 홍지유 감독<두 개의 문>과 건축가 정기용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정재은 감독 <말하는 건축가>이다. <두 개의 문>은 성적소수자들을 위한 영상문화운동이 보다 넓은 현실참여로 이어진 경우로서 주목할 만하다.
부지영 감독이 세 명의 배우(김꽃비, 서영주, 양은용)와 함께 만든 <나 나 나: 여배우 민낯 프로젝트>는 영화 만들기와 참여의 새로운 자유를 보여준다.

 

 

(왼쪽부터) <레드 마리아> 경순 감독, <미쓰 마마> 감독과 배우, <두개의 선> 지민 감독

 

(왼쪽부터) <두개의 문>홍지유, 김일란 감독, <말하는 건축가>정재은 감독, <나나나 : 여배우 민낯 프로젝트>양은용, 김꽃비, 서영주 감독

 


아마 올해 극장 개봉된 여성감독의 영화로서 가장 괴상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는 구혜선 감독<복숭아 나무>일 것이다. 구혜선 감독은 몇 년 전부터 주변의 피드백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씩씩하게 자기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아쉽게도 이 영화들은 지나치게 자신에 함몰한 나머지 관객들과 진지하게 소통할 여력이 없어 보인다. <복숭아 나무>는 그런 경향이 가장 극대화된 작품으로,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구혜선과 팬들뿐이다. 구혜선과는 조금 다른 예로, 올해 부산영화제에 <뜨개질>이라는 단편을 출품한 배우 윤은혜를 들 수 있는데, 완벽하지는 않아도 예상 외로 영화적 감각과 아이디어가 좋다. 감독 일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좌)<복숭아 나무> 구혜선 감독, (우)<뜨개질> 윤은혜 감독

 

 

_ 영화평론가 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