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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SIWFF]

우리는 페미니즘 영화 비평을 원한다.

 

우리는 지금 페미니즘 영화 비평을 원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 1회' 씨네 페미니즘 학교를 마치면서

 

 

 

 

 

_손희정 씨네 페미니즘 학교 강사

 

 

얼마 전 한 술자리에서 박찬경 감독이 웹진 텐아시아(http://10.asiae.co.kr)와 한 인터뷰 내용을 듣게 되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90년대 까지만 해도 영화가 페미니즘의 눈치를 봤던 것 같은데 그게 어느 순간부터 완전 무너진 것 같다"고 말하면서 "한국 영화는 너무 마초적"이라고 평가했다. 스크린 상에서 여성 캐릭터는 점점 더 줄어들고 여성혐오적 이미지는 점점 더 늘어가는 현실을 생각하면, 박찬경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더군다나 페미니즘 영화 비평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니, 개인적으로 흥미로웠을 뿐 아니라 반성을 하게 되는 한 마디였다.

 

이 인터뷰가 문득 다시 떠오른 건, <피에타>의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소식이 한국을 강타하면서였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한 남성이 상징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타락은, 그 남자의 엄마라고 주장하는 한 여성의 자궁이 '성스럽게' 열리면서 피에타라는 매우 서구적인 모성 이미지 안에서 구원받는다. 이 영화가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했다고 들썩거리며 '김기덕에 대한 재평가'를 외치는 이 상황은 (전혀 낯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에게 여러 가지 '여전함'들을 확인시켜주었던 것이다. 서구 영화제 서킷은 여전히 아시아의 어떤 글로컬한 이미지에 열광하고 있고, 한국인들은 여전히 서구의 인정에 목말라 있으며, (어떤 남성) 엘리트들은 여전히 김기덕의 유아적인 남성 캐릭터에서 '인류 보편'을 볼 수 있다고 생떼를 부렸다. 여기에 나 같은 페미니스트들 역시 여전히 김기덕이 여성/자궁을 착취하는 방식, 그리고 그를 둘러싼 남성중심적인 담론에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토론토영화제 데일리에서 소개되었던 평론가 13명의 캡슐 리뷰는 <피에타>에 대한 열광이 서구 보편의 감성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역대 국제영화제 최악의 수상작 중 한 편으로 꼽히는 <피에타>에 대한 온갖 독설이 궁금한 분들은 한번 들어가 보셔도 좋겠다. http://cinema-scope.com/cinema-scope-online/tiff-day-10-pieta-x/)

 

이렇게 많은 것이 '여전'하거나 혹은 박찬경의 말대로 '퇴보'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페미니즘 영화 비평의 역할과도 관계가 있다면, 지난 20년 간 짧지 않은 길을 걸어 온 한국 페미니즘 영화 비평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점점 더 커지고 있는 미디어의 영향과 그 미디어를 잠식하고 있는 여성혐오적 재현 속에서, 우리는 페미니즘 영화 비평을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시점에 다다른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씨네 페미니즘 학교를 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매우 반가웠다. 사실 박찬경의 인터뷰나 <피에타>의 수상 소식 이전부터 한국 사회에서의 페미니즘 비평 뿐 아니라 페미니즘 운동 자체에 대해서 고민이 많던 차였다. 다양한 의제와 목표를 가지고 맹렬하게 활동하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일종의 '인정 투쟁'으로만 치부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은 가부장제적 사고방식 및 삶의 태도와 '남성연대'의 반발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일정정도는 페미니즘 내부의 반성을 요하는 현상은 아닐까. 내/외의 한계들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한국의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영화/미디어 비평은 그 힘을 잃어온 것이 아닐까. 이런 저런 질문들로 에너지가 소진되어 갈 즈음, 다양한 분야에 있는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을 '씨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으는 계기가 생긴다는 것은 꽤 괜찮은 기회로 다가왔던 것이다. 결국 내가 담당했던 강좌의 주제가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와 그 영화적 재현을 진단하려는 한 노력'으로 정해졌던 것은, 이런 고민들의 발로이자 이를 다른 여성들과 더욱 적극적으로 나누고픈 욕심 탓이었을 게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씨네 페미니즘 학교는 영화/미디어에 대한 페미니즘 비평이 여전히 유효하며 유의미하다는 것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덕분에 내가 가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 답을 찾아가는 길에 '우리'가 함께 서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시대에 누가 페미니즘 비평에 관심이 있겠어'라는 염려가 무색하게 100 여 명의 여성들이 씨네 페미니즘 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그분들 중에 '1회' 씨네 페미니즘 학교에 흡족해 한 분들도 있고, 불만족 속에서 실망한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제 페미니즘은 구닥다리 아니냐"라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리는 와중에도 페미니즘의 목소리와 태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그런 '우리'의 확인은 여전히 소중하지 않을까. 본격적인 페미니즘 영화/미디어 비평에 대한 진단과 고민은 이 '확인'으로부터 시작되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내년에 2회로 지속되면서, 씨네 페미니즘 학교가 미디어 속에서 범람하는 여성혐오와 그 여성혐오를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서로 만나고, 서로를 교육하고, 서로에게 힘을 주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내년 프로젝트에 대해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1회'라고 이름해 본다.

 

씨네 페미니즘 학교가 열리고 마무리되기까지 미디어 교육실에서 엄청나게 고생했다. 2회를 진행하려면 또 그만큼 고생해야겠지만, 기대하면서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