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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캐롤> 논란 이후 – 비평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캐롤>과 '하필이면' 

<캐롤>(토드 헤인즈, 2015)의 반갑고도 놀라운 흥행이 이어진 가운데, 상영 후 이어진 토크 프로그램(이하 ‘라이브톡’)에서 <캐롤>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언급을 두고 소셜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논쟁이 벌어졌다. 논란이 된 부분은 다음의 문장이었다. 


“제가 느끼기엔, 테레즈한테는 동성애적인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니고 캐롤이 필요한 겁니다. 근데 하필이면 캐롤이 여자였을 뿐이라는 거죠.” [각주:1]


이 발언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하필이면’이라는 부사였다. ‘하필이면’은 “다른 방도를 취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모든 방도에도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됐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캐롤과 테레즈는 여-남 관계여도 상관없거나 심지어 더 나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선택지가 없어 불가피하게 여-여 관계가 되었다라고 해석될 수 있다. 사소한 부사 하나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필이면’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사랑의 위계가 존재함을 전제한다. 이러한 표현은 영화 곳곳에 세심하게 심어놓은 테레즈가 레즈비언이라는 여러 암시나 수행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부인하고 이성애가 보편적 사랑의 디폴트라는, 혹은 더 진실한 사랑은 ‘동성애적’인 것과 캐롤이 ‘여성’이라는 것을 지웠을 때 가능하다는 (무)의식적 함의를 갖는다. 

물론 이 영화에서 레즈비언 정체성(라이브톡의 용어를 쓰자면 ‘동성애적 사랑’)은 현재와 매우 다르게 형성된다. 1950년대의 미국은 동성애자를 비롯한 다양한 성적 소수자들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던 시기가 아니었다. 대학이나 예술 공동체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 사회를 제외하고 많은 공동체에서 그들은 아직까지도 소문과 험담으로 존재했다. 사회적 억압이 그들을 비가시적이고 산포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성적 소수자들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이름을 붙일 만한 조건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일관된 범주화 내에서 스스로를 명확하게 정체화하기보다는 무리로 묶이거나 개별적 욕망 내에서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여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욕망을 갖고 그것에 대해 심지어 부정적으로 보지 않은 경우에도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고 정체화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은 때때로 막연하게나마 스스로를 주류와 다른 종족으로 이해(넒은 의미에서의 정체성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헤인즈는 이러한 시대성을 매우 섬세하게 몇몇 에피소드로 자연스럽게 엮어 넣는다. 테레즈가 우체국에서 캐롤을 기다리다가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부치 레즈비언을 보는 시선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테레즈는 남성적인 스타일의 여자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본다. 이전에는 아마도 신경 쓰지 않았을, 그녀에게 가시화되지 않았을 존재들이 캐롤과 관계를 가지면서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그녀의 시선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여성인 캐롤에 대한 욕망을 품는 나는 저들과 같게 보이는가?’ 즉 ‘나는 저들과 같은 종족인가?’ 그에 대한 답은 부인일 수도 있다. 헤인즈 감독이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그 순간 테레즈는 “나는 저 짧은 머리의 넥타이를 매고 양복 입은 여자들을 벌써 봤어. 하지만 나와 캐롤은 그들을 닮지 않았어.”(<까이에 뒤 시네마> 인터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부인이 그녀의 여성에 대한 욕망 혹은 레즈비언 정체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동성애 정체성의 개념과 범주화가 비교적 명확하고 그와 관련된 지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오늘날에 비해 테레즈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결부시킬 사례도, 이미지도, 일관된 정체성도 갖고 있지 않기” [각주:2]때문이다. 현재는 너무 쉽고 단일하게 동성애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과거에는 그리고 심지어 롤 모델을 찾아볼 수 있는 현재에도 정체성은 이말년이 만화 캐릭터의 이마에 이름을 써주듯이 간단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적 소수자의 정체성은 각 개인들마다 다른 경로와 이행 그리고 수행을 거쳐 형성된다. 그 과정에는 부인도 있을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이성애 관계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여전히 이성애가 주류인 사회에서는 이성애의 이미지와 사례들이 압도적으로 가시화되기 때문이다.[각주:3]


◀1950년대 샌프란시스코 Mona's의 풍경, 모나스 클럽은 미국 최초의 레즈비언바로 알려져 있다▶ 

특히 역사적으로 50년대 미국은 아직 성적 소수자 정체성이 명쾌하게 개념화 되어 있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체성은 보다 더 다양한 창조적인 경로와 수행들 속에서 발현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우체국에서 테레즈의 시선을 부치 레즈비언들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으로 해석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자신과 캐롤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정체성 인식의 첫 단계로 볼 수 있다. 이 장면은 테레즈가 레즈비언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소수자에 대한 억압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감독의 말을 따르자면 주변성 때문에 창조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욕망과 관계를 표현하고 설정하던 시대에 대한 감독의 재해석인 것이다. 더군다나 테레즈는 자신의 욕망을 부인하기는커녕 캐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 스스로를 명료하게 이해하게 된다(’내 인생에 이렇게 머리가 맑았던 적이 없다‘고 테레즈는 말하지 않는가). 또한 이후 캐롤은 자신이 던지던 시선을 되돌려 받는다. 캐롤과의 재회 이후 참석한 파티에서 그녀는 한 여자(캐리 브라운스틴 分)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게이다(직감적으로 게이임을 알아보는 눈, gay+radar)‘를 작동시켜 테레즈가 레즈비언임을 알아보고 접근한다. 외부의 시선이 ’그녀‘가 ’그녀‘와 같은 종족임을 말해준다.

한편, 이동진 평론가의 발언에 대한 비판을 무화하려는 이들은 토드 헤인즈 감독 또한 ‘<캐롤>은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는 인터뷰를 했음을 지적하며, 이동진 평론가의 발언이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라 옹호한다. 실제로 둘의 언급은 문자 그대로만 보면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그 발언의 맥락을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아래는 위의 인용 바로 다음에 이어진 이동진 평론가의 토크이다.

“그러니까 어떤 동성애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상대방이 여자라는 게 핵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성애적인 정체성에서 내가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 사람을 말하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최근에 개봉을 앞두고 있는 <대니쉬 걸> 같은 바로 그 영화가 그런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 이동진, <캐롤> 라이브톡


아래는 토드 헤인즈의 <포지티브>와의 인터뷰이다.

(영화 속 배경인 1950년대 초 뉴욕에서) 사회는 결코 영웅적이지 않은 개개인에게 대단한 압박을 준다. [캐롤]에서 나는 개인의 욕망과 욕망이 수반하는 장애물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는 모든 위대한 사랑 이야기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만남을 방해하는 이 두 가지 상반된 힘(욕망과 장애물)을 발견한다. 진보적인 오늘 우리 사회에서 거의 모든 이들은 커플이 될 수 있다. 나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금기를 지닌 설명하기 힘든 시대와 장소를 다시 발견해야 했다. 나는 동성애 이슈를 위해 행동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한 등장인물의 선택을 통해 참으로 흥미로운, 이 시대에 숨겨져 있던 서브컬처의 표현과 관련된 이 순간들을 탐색하고자 했다. 자신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이 게이와 레즈비언의 창의성을 자극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배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지닐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사회 내 주변성을 상실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각주:4]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의 내용은 유사해 보이지만 그 강조점과 발언의 벡터가 완전히 다르다. 위의 토드 헤인즈 감독의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주변성’이다. 주변성은 헤인즈 감독이 5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이다. 현재 동성결혼까지 합법적으로 가능해진 미국에서 동성애 정체성은 주변성을 점점 잃어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헤인즈 감독은 주변성을 재탐색하기 위해, 다시 말하면 퀴어의 ‘퀴어함’을 찾기 위해 미국의 50년대를 선택한다. 따라서 헤인즈 감독이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고 한 발언은 안정되며 일관된 정체성을 지향하는 일부 미국 동성애 문화의 주류화에 대한 비판이지 캐롤이 여자가 아니어도, 즉 레즈비언 관계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아래 <가디언>과의 인터뷰를 보면 이러한 맥락이 더 명확해진다.

“어린 아이들이, 그러니까 10대에 커밍아웃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그러나 이러한 것에는 우리가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 오늘날 외부는 어디에 있는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려고 하는 이들이 있는가? 기업 문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는가? 이미 시장이 승리했다. 시장은 게이와 레즈비언의 삶을 수용한다. 왜냐면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빈곤과 인종의 이슈에 더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왜냐면 그들은 돈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각주:5] 


반면 이동진 평론가는 <캐롤>이 동성애 영화임을 부인하며 이 영화를 주변부보다는 주류에 위치 지으려 한다. 즉 그의 발언은 소수자성보다는 주류성에 강조가 있다. 헤인즈 감독이 동성애라는 말조차 조심스럽고 그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을 정도로 억압받고 있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던 시대 속의 성적 소수자들과 그래서 더 도드라지는 사랑의 표현을 말하고자 했다면, 이동진 평론가는 테레즈가 레즈비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주류를 지향한다. 다시 말하면 헤인즈 감독이 시대의 변화와 지역의 특수성(미국의 특수성)을 고려하며 주변성에 대한 성찰 속에서 사랑의 보편성을 획득하려 한다면, 이동진 평론가는 역사적이고 지역적인 맥락의 고려 없이 주류의 기준에 따라 만들어진 보편성으로 주변성을 덮으려 한다. 따라서 이동진 평론가가 해명문에서 자신은 ‘테레즈가 동성애자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이성애자(혹은 양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던 것은 이 영화의 방향성과 의도, 혹은 감독의 인터뷰를 잘못 읽은 것이 된다. 비평이 단순한 상찬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선 내가, 어디서, 어느 시대에,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 관객과 비평가들은 글로벌 네트워크 시대에 동성애 재현 및 문화와 관련해 현실과 스크린 모두에서 훨씬 더 진보적인 북미나 유럽의 재현들을 거의 동시간적으로 수용하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와는 엄청난 간극이 있는 다중적 시간에 살고 있음을 이해해야 헤인즈 감독의 발언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영화의 디테일들을 잘 포착한다고 알려진 평론가조차 영화에서 소수자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잘못 독해하거나 혹은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동일시가 잘 되지 않는 불편함 속에서 그 인물을 주류적 감성에 편입시키려 하는 것은 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의 영화문화 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여성 및 소수자에 대한 재현의 양적, 질적 생산과 그와 관련된 이슈와 미학에 대한 비평적 관점이 모두 문제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논란을 통해 오히려 한국의 영화 평론과 소비문화의 이성애중심성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동성애 영화’를 부인하기
이 지점에서 또 다른 복잡한 질문을 던져보자.

-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창작자나 그러한 이슈를 다루는 영화들은 왜 라벨링을 거부하는가? 

- 소수자 정체성의 부여는 어떤 효과를 낳는가?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창작자와 그/녀의 작업에 대한 라벨링은 오랫동안 논란의 여지가 있어왔다. 성별이 여성인 감독에게 ‘여성감독’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 여성의 이슈와 삶을 다룬 영화에 ‘여성영화’라 이름 붙이는 것, 동성애를 다룬 영화에 ‘동성애 영화’라 이름 붙이는 것, 혹은 유태인을 다룬 영화에 ‘유태인 영화’라 이름 붙이는 것 등 말이다.[각주:6] 종종 창작자들은 분명 그러한 소재를 다루고,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 문화에 대해 자부심과 깊은 이해를 보여주면서도 특정 이름과 범주 안에 자신의 영화를 두는 것을 거부한다. 그 대표적 예로 샹탈 아커만을 들 수 있다. 아커만은 페미니스트/레즈비언/유태인 감독으로서 그러한 정체성에 대한 탁월한 성찰들을 주제적, 형식적 차원에서 완성도 높게 풀어내면서도 자신의 영화를 여성영화제, 퀴어영화제, 유태인영화제에서 상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자주 인터뷰한 바 있다. 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일견 이러한 발언은 난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때로 이러한 발언은 그 진의가 왜곡된 채 그녀가 페미니즘이나 레즈비어니즘을 거부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커만은 최고의 페미니스트 영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 <잔느 딜망>에 대해 말할 때 이 영화는 분명 자의식적으로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만들었고 당대 페미니즘의 영향을 깊이 받았지만(스텝들도 가능한 여성들로 구성했다), 페미니스트 이슈나 주장에만 머물지 않으며 그러한 관점을 영화적 시공간의 연출을 통해 구현했음을 기회가 될 때마다 누누이 강조하곤 했다. 아커만의 우려처럼 소수자 정체성을 다루는 영화들에 대한 라벨링은 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그 영화가 가진 복합적인 가치들을 단일한 주장이나 정체성으로 환원하기도 한다. 그 결과 라벨링은 의도와 달리 그 영화를 게토화하고 낙인찍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창작자로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지속적으로 사전에 닫혀 버리는 경험은 당연히 썩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헤인즈 감독 역시 마찬가지로 ‘동성애 영화’임을 부정할 때 <캐롤>은 전형적인 ‘커밍아웃 스토리’나 동성애 이슈의 구호에 머물지 않고 ‘사랑의 표현’에 공을 들였음을 강조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롤을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은 헤인즈 감독의 정체성과 필모그래피, 여성 둘이 주연이라는 것에 선입견을 갖고 영화를 보지도 않은 아카데미 회원이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따라서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창작자들은 특수와 보편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하면서 경계를 넓혀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활동영역이 애초에 한정되어 버리는 조건 속에 있는 소수자 정체성의 창작자와 영화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좌. 토드 헤인즈/우. 샹탈 아커만


하지만 창작자의 전략과 별개로, 비평과 관람 문화에서 동성애 영화나 여성영화로 호명하는 것이 낙인 찍기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이런 주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영화적으로 직설적 주장을 하거나 아마추어적인 연출에 한정되어 있다는 편견을 깰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명칭은 또 다른 비평적 범주일 뿐임을 평론가나 영화학자들이 더 치밀하게 논해야 한다. 소수자적 관점은 당연히 그러한 관점을 적절하게 표현할 영화적 미학과 형식과 함께 간다. 사안이 복잡하기 때문에 영화적 미학이나 장르 또한 복합적이고 경계를 넘나들 수밖에 없는 지점들이 발생한다. 또한 정체성으로 묶인 그 범주 내에도 다양한 형식과 관점의 영화들이 존재한다. 특수성의 보편성은 어떤 면에선 특수성 내의 다양성을 통해 확보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영화들이 ‘동성애 영화’ 혹은 ‘여성영화’로서, 그 소수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보편적인 고전이나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음을 인지하고, 기존의 정전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 논란의 와중에 <캐롤>은 ‘단순 동성애 영화로 보기에는 너무 영화적 완성도가 높다’면서 ‘보편적인’ 감성을 호소하는 ‘예술영화’의 위치에 놓는 것이 이 영화를 위해서도 더 좋다는 식의 주장을 올린 댓글이나 트윗이 있었다. 동성애 영화와 예술 영화는 겹쳐질 수 없는 범주인가? 분명 이러한 태도는 이성애 중심적인 예술영화 팬들의 선점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테레즈를 주변성에서 ‘구원’해 주류로 이동시키려는 이동진 평론가의 관점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반대의 동학, 주변성의 핵심에서 보편성이라고 일컬어 졌던 것을 확장시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 특수성,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보편성이 아닌가.


리터러시 교육으로서의 비평

특수성/주변성/소수성의 핵심에서 보편성을 확장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를 들어, 씨네필 개념의 재고가 될 수도 있다. 스크린에서 오랫동안 자신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재현과 캐릭터를 찾을 수 없었던 과거의 퀴어 관객들은 영화에 대한 대단한 열정과 욕망을 갖고 이성애 영화에서 퀴어적 순간들을 읽어냈다. <셀룰로이드 클로짓>(1995)은 퀴어적 시선을 통해 다시 읽어낸 할리우드 고전영화사라 할 수 있다. 씨네필(cinéma+phil)은 말 그대로 열광적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씨네필은 영화를 사랑하기에 장면을 반복해서 디테일하게 뜯어보고 열정적으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셀룰로이드 클로짓>에 나오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퀴어 관객들은 이성애 영화에서 장면의 서브텍스트를 읽고 열정적으로 욕망과 의미를 투여한다. 


<셀룰로이드 클로짓>(1995)


심지어 퀴어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가진 영화에 대해서도 퀴어적 독해를 하기도 했다. 트랜스섹슈얼을 살인자로 묘사해 비판을 받기도 했던 <양들의 침묵>(조나단 드미, 1991)에서 레즈비언 관객들은 어린 시절부터 톰보이 역할을 해왔고 커밍아웃을 하기 전부터 이미 레즈비언들의 아이콘이었던 조디 포스터의 시선에서 퀴어적 순간을 읽어냈다. 살인자를 체포하고 정식 FBI 요원으로 임명받는 자리에서 클라리스 스털링(조디 포스터)은 관중석에 앉아있는 누군가에게 환한 미소를 보낸다. 이 순간 많은 관객들은 스털링의 사수인 잭 크로포드 요원이 다음 쇼트에 등장할 것을 기대한다. 이성애적 연결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원작소설은 클라리스와 잭의 이성애적 관계를 명시적으로 묘사한 반면, 영화는 둘 간의 성애적 관계를 배제시켰다. 따라서 관객들은 마지막에 성적 긴장이 해소되길 더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그 쇼트는 예상과 달리 스털링의 절친한 친구인 아델리아(케이시 레몬스)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스털링이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는 쇼트가 등장하고, 그 다음에 박수치는 잭을 보여준다. 북미 레즈비언 관객들에게 아델리아가 잭보다 먼저 스털링과 시선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들은 편집의 순서에서 퀴어적 의미를 읽어내며 이 장면을 열정적으로 반복해서 봤다. 2-3개의 쇼트로 이루어진 짧은 장면은 가장 강렬도 높은 순간이 된다. 이들이야말로 영화를 사랑하는 씨네필이 아닌가. 사랑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 같았던 영화적 순간을 반짝이게 만든다. 씨네필 문화와 개념이 영화사에서 교과서적으로 인정한 ‘작가’와 ‘정전’ 중심을 벗어나 다양한 소수자 문화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씨네필 문화도 다양해지고 더 사랑이 넘치게 될 것이다.


<양들의 침묵>(1991)


하지만 이러한 개념과 문화의 변화는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퀴어 관객들이 이성애 영화에서도 자신들이 동일시 할 수 있는, 자신들의 욕망을 투여할 수 있는 순간들을 찾아낸 것은 그만큼 자신들을 반영하는 재현이 희소했기 때문이다. 간절함이 찾아낸 순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 때문에 퀴어 관객 및 여성 관객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다른 여러 인물들에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동일시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를 사랑의 보편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반면 이성애 남성 관객들은 상대적으로 자신과 다른 정체성에 동일시하기를 힘들어 한다. 여성관객과 달리 남성관객들은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잘 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성애 남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워낙 동일시할 남성 캐릭터들이 많기 때문에 소수자들과 달리 굳이 열정적 독해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연습이 되어있지 않다. 이러한 불균형은 이성애 남성관객들로 하여금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 정체성을 지닌 캐릭터나 관계에 대한 리터러시(literacy 읽고 쓰는 능력)를 떨어지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수년 동안 <잔느 딜망>을 텍스트로 영화전공 강의를 하면서 흥미로운 경험을 한 바 있다. 일부 남학생들은 한 명의 여성이 거의 혼자서 3시간을 이끌어 가는 이 영화에 동일시하는 것을 매우 힘들어 했다. 결국 어떤 남학생들은 거의 세네 장면 정도 나올 정도로 부수적인 잔느의 아들이나 영화의 마지막 즈음 잔느가 살인하기 전 화장대 앞에 앉아있을 때 보이는 죽은 남편의 사진에 동일시를 해 그들의 입장에서 잔느를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도덕적으로 평가했다. 이것은 남성 관객들이(심지어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학생들마저도) 얼마나 여성인물에 동일시하기를 어려워하는지 그리고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사례였다. 주류 정체성, 특히 이성애 남성은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들의 감정과 제스처, 관계, 환경과 조건을 읽고 쓰는 능력을 익힐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선 아마도 제작부터 더 많은 여성 캐릭터와 소수자 캐릭터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나와야 할 것이며, 어린 시절부터 가능한 성별/인종/성적 정체성/계급 등의 균형을 맞춰서 재현물을 보는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평 역시 상상력을 넓히는 교육으로서 소수자 캐릭터나 문화에 대한 리터러시 능력을 키우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캐롤>에서 ‘게이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체성의 부인과 형성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조건 지워지는지, 레즈비언의 성애적 관계에서 두 여성간의 시선교환(흔히 ‘eye kiss/eye sex’라 불리는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스처가 왜 그렇게 강조되는지, 왜 두 캐릭터 모두 여성스러운 스타일로 설정했는지, 당시의 부치 문화와는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남성 동성애 영화와는 달리 모성의 문제가 왜 개입되는지, 다른 로맨스 영화에서라면 상투적이었을 해피엔딩이 이 영화에서는 왜 그렇게 소중한지 등 읽어 내야할 것이 너무나 많다. 영화비평은 이러한 리터러시를 키우는 교육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비평이 죽어가고 있다고 한탄하는 이 시대에,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무릇 교육의 역할은 기존의 지식과 세계관을 습득하고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외부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에 있지 않은가? 그 외부를 상상하는 능력, 그것은 스크린 위의 소수자 재현에 대해 읽고 쓰는 능력을 키우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최근 트랜스섹슈얼로 커밍 아웃한(사실은 아우팅 당한) 릴리 워쇼스키가 발표한 글에서 인용한 호세 에스테반 무뇨스의 명언이 여기에도 적용될 것이다.

“퀴어라 함은 본질적으로 지금 여기를 거부하고 다른 세상의 잠재력을 주장하는 것이다.”

 


Sneak Peek



<로얄 로드>(2015)


2016년 6월 2일~8일에 개최될 1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설 프로그램 ‘퀴어 레인보우’에는 위에서 언급한 퀴어-씨네필 비평의 놀라운 사례를 보여주는 작품이 포함될 예정이어서 살짝 소개한다. 2015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며 호평을 받았던 <로얄 로드The Royal Road>(2015)는 씨네필과 퀴어적 비평이 어떻게 중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아름다운 에세이 필름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읽어 낸다. 영화사학자이자 90년대 북미의 가장 큰 퀴어 포탈이었던 ‘Planet Out’의 설립자 중 한 명이고, 퀴어영화전문배급사인 울프비디오 온라인의 부사장이기도 한 제니 올슨 감독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완전히 매혹되어 있었던 <현기증>의 배경이자 멕시코 영토였으며 가장 크고 오래된 퀴어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며 퀴어로서의 사적 경험과 탈식민적 비평을 영화적 풍경으로 써내려 간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진 리스)가 다락방에 갇힌 로체스터의 미친 아내 버사를 중심으로 <제인 에어>(샬롯 브론테)를 다시 쓰듯, <로얄 로드>는 초상화의 주인공이자 비극적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카를로타의 관점에서 <현기증>을 다시 쓴다. 외부자의 시점으로 다시 쓰고 읽기. 사색적이며 감성적이고, 지정학적이면서 사적인 이 영화는 그야말로 매혹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적 순간에 대한 매혹, 여성에 대한 사랑, 퀴어적 열정, 도시의 역사적 지층에 대한 탐구......  그 모든 것들이 이 영화 안에 있다.  


글: 조혜영 (프로그래머)  




  1. 1) <캐롤> ‘라이브 톡’의 녹취 전문과 이동진 평론가의 ‘<캐롤> 논란’에 대한 해명문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m.blog.naver.com/lifeisntcool/220617905215 http://m.blog.naver.com/lifeisntcool/220619949004 [본문으로]
  2. 2) <캐롤>에 대한 또 다른 비평문인 “<캐롤>이라는 영화-<캐롤>이라는 레즈비언 영화”(이나라)의 전반적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 글에서 번역 인용한 토드 헤인즈의 인터뷰가 <캐롤> 논란과 관련해 자주 인용된 <씨네21> 인터뷰 기사(www.cine21.com/news/view/mag_id/80147)보다 헤인즈 감독의 진의를 더 잘 알 수 있기에 해당 글의 인터뷰 인용을 재인용한다. 출처: http://slownews.kr/51613 [본문으로]
  3. 3) 주디스 버틀러가 말했듯 ‘정체성은 수행을 통해 형성된다. 정체성을 가진 주체가 먼저 있고 일관된 행동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 있고 정체성이 발현되게 된다. 주체는 미리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담론적 실천의 효과가 된다. 정체성은 그것의 결과라고 말해지는 바로 그 표현들에 의해 수행적으로 구성된다. 미셸 푸코 역시 섹슈얼리티가 얼마나 역사적이며 담론의 효과에 의해 구성되는지 역설한 바 있다. [본문으로]
  4. 4) “<캐롤>이라는 영화-<캐롤>이라는 레즈비언 영화”(이나라)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 5)http://www.theguardian.com/film/2015/nov/15/todd-haynes-interview-carol-frock-film-cate-blanchett-rooney-mara [본문으로]
  6. 6) 여성감독의 라벨링에 대한 최근의 논의로 다음을 참고. http://www.bustle.com/articles/140526-what-women-in-hollywood-really-think-of-being-called-female-directors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