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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이제 공주는 그만!: 비디오 게임과 여성 캐릭터


비디오 게임은 개발부터 플레이까지 오랜 동안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게임 산업의 규모가 확대되고 콘솔게임부터 PC와 모바일까지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여성 게이머들이 부상하고 있다. 여성들이 게임 플레이뿐만 아니라 개발, 시나리오, 비평까지 적은 규모나마 다양한 영역에서 골고루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영향이 즉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 게임의 스토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플레이 가능한 주인공으로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여성을 수동적인 성적 대상이나 성취해야할 트로피(이런 경우 대부분이 플레이 불가능한 캐릭터[non-player character]로 등장한다)로만 그려왔던 게임 산업 내에서의 남성중심적인 문화를 자성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성평등의 감수성을 문화에서 실현하는 것을 넘어 게임의 재미를 확장하고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고 있기도 하다. 천편일률적인 캐릭터와 게임 디자인에 요청된 새롭고 보다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의 개발은 혁신적인 게임 방식과 새로운 세계관을 불러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 주인공이었던 기존 게임의 시리즈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예시로 <툼 레이더>(1996~ ) 시리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툼 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는 게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 캐릭터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비디오 게임에서는 드물게 여성 플레이어 캐릭터이기도 하다. 라라 크로프트는 많은 이들에게 ‘잘록한 허리, 큰 가슴을 가진 핫팬츠의 섹시한 캐릭터’로 기억되고 있다.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 덕택에 게임을 하지 않은 이들도 탐험가에 어울리지 않는 라라의 ‘섹시한’ 핫팬츠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툼 레이더>는 처음 출시되었을 때부터 많은 인기를 얻으며 꾸준히 시리즈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이 게임은 새로운 기술과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예전만한 인기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13년 <툼 레이더: 리부트>라는 이름으로 신작을 출시하고 비평가들과 게이머들에게 모두 좋은 평가를 받으며 다시 그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 리부트된 라라 크로프트는 외양에서부터 그 차이가 크게 두드러진다. 어드벤처 장르의 주인공에게 어울리지 않는 민소매 탑과 핫팬츠는 긴 바지로 대체되었다. 아래는 라라 크로프트의 변천사이고, 마지막이 리부트로 새롭게 탄생된 라라이다. 


라라 크로프트 변천사, <툼 레이더 시리즈>


바뀐 것은 외양만이 아니었다. 어드벤처 장르였지만 퍼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앞 시리즈에 비해 리부트는 액션이 보다 더 강조되었으며, 내러티브가 강화되면서 캐릭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고 입체적인 그녀만의 성장서사를 갖게 되었다. 리부트에는 왜 그녀가 탐험가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해서 엄청난 생존의 스킬을 갖게 되었는지가 게임 플레이와 컷신을 통해 그럴 듯하게 경험된다. 처음에는 활을 쏘는 법, 암벽을 타는 법도 서툴렀던 라라는 점차 악당들이 모두 두려움에 떠는 존재가 된다(리부트의 유명한 대사 중 하나는 “그 여자가 우릴 모두 죽일 거야”이다). 또한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구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여자 친구, 샘을 구하기 위해 험난한 모험을 강행한다. 이 설득력 있고 몰입감을 강화하는 스토리와 게임 플레이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게이머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러한 게임 스토리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여성 작가의 투입 때문이었다. 이 게임의 작가는 영국의 판타지 소설가 리아나 프래쳇으로 그녀는 심지어 라라와 샘을 동성애적 관계로 그리려 했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이미 라라와 샘의 관계는 많은 팬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캐릭터 묘사는 여성들 간의 관계에 집중하고, 여성들이 서로의 성장과 모험의 동기를 만들어 주면서 여성들 간의 차이에 대해 깊이 있고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즉 아시아계인 샘과 백인인 라라의 (유사 동성애적) 관계에서 구원을 받는 자와 구원자가 되는 구도는 탈식민적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등의 흥미로운 질문을 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샘과 라라, <툼 레이더: 리부트>


<툼 레이더: 리부트>의 성공 사례는 투자사와 제작사들이 게임 스토리텔링과 개발에서의 여성 캐릭터의 잠재성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 다른 블록버스터 게임의 예를 들어보자.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더 라스트 오브 어스>(2013)는 플레이스테이션 3 기반으로 출시된 당해 최고의 게임으로 극찬 받았던 게임이었다. 좀비 생존 어드벤처 장르인 이 게임의 주인공이자 플레이어 캐릭터는 비디오 게임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중년의 남성, 조엘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10대 소녀 엘리가 인기를 얻자 개발사인 너티독은 엘리가 조엘을 만나기 전의 시간을 배경으로 해서 죽은 친구 라일리와의 사연을 담은 다운로드 컨텐츠(DLC)를 출시했다. 이 게임에서는 엘리가 플레이어 캐릭터가 된다. 두 소녀의 특별한 관계를 묘사하며 엘리의 캐릭터에 깊이감을 더해준 ‘레프트 비하인드’라는 제목의 이 게임은 액션보다는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면서 많은 게이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특히 엘리와 라일리의 키스씬은 많은 화제를 나았다. 그러나 모두가 엘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이야기를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남성 게이머들은 그녀는 레즈비언일 수 없다며 인터넷에서 동성애혐오적인 발언을 퍼붓기도 했다. 


조엘과 엘리, <더 라스트 오브 어스>

라일리와 엘리, <레프트 비하인드>


여성 캐릭터에 입체감과 사실성을 부여하고 개발과정에 여성 인력들이 참여하는 이런 경향들은 한편으로는 비디오 게임을 자신들의 것으로 소유하고 이성애 남성중심적인 게임 문화를 고수하려는 기존 남성 게이머들의 반발(backlash) 또한 불러왔다. 그 중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바로 아니타 사키시안을 둘러싼 논란과 기존 남성 게이머들의 폭력적 공격이었다. 페이스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파쿠르에 기반한 1인칭 액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발한 <미러스 엣지>의 리부트(EA, 2016, a.k.a. 미러스 엣지: 카탈리스트)에 유튜브 채널 등 인터넷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게임문화 비평가인 아니타 사키시안이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는 루머가 돈 적이 있었다. 이에 일부 남성 게이머들이 페미니스트적 관점이 게임의 재미를 반감시킬 것이라며 아니타 사키시안을 <미러스 엣지> 개발에서 제외하라는 청원(https://www.change.org/p/ea-games-remove-anita-sarkeesian-from-mirror-s-edge-2-game-development)을 냈다. 순식간에 몇만명의 사람들이 이 청원에 참여했다. EA는 곧 사키시안은 개발에 참여하고 있지 않으며 그 청원은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라는 보도를 냈다. 청원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게임에서 여성들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기존의 일부 남성 게이머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미러스 엣지: 카탈리스트>


하지만 아니타 사키시안에 대한 공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사키시안은 어린 시절부터 오랜 동안 게임을 해온 게이머로써 여성 게임 캐릭터들이 남성 영웅의 구원을 기다리는 '곤경에 빠진 처녀(damsel in distress)'나 영웅에게 도움을 주는 보조적인 역할, 혹은 영웅의 복수의 동기를 마련해주기 위해 잔인하게 살해당하거나 스스로를 악으로 규정하며 남성들에게 자신들을 죽여 달라고 요청하는 자학적인 역할로 등장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녀는 여성혐오적인 게임문화를 바꾸기 위해 킥스타터 모금으로 ‘페미니스트 프리퀀시’라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게임 비평을 시작했다. 이후 사키시안은 여성혐오적인 남성 게이머들에게서 실질적으로 살해 협박과 온갖 폭언, 온라인상에서의 성적 폭력을 당했다. 그러나 사키시안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비평의 범위를 게임에서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시각대중문화로 돌려 페미니스트 인터넷 비평을 활발히 하고 있다(아래 비디오는 비디오 게임에서의 여성 캐릭터 역사를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돌아 본 첫번째 에피소드다. 한글 자막도 제공되니 감상해 보시길 바란다).

<페미니스트 프리퀀시>, 아니타 사키시안


일부 남성 게이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고, 산업을 확장하길 원하는 시장 역시 여성 게이머들의 부상을 반가워하고 있다. 특히 블록버스터 게임 외에도 다양한 캐릭터 개발과 스토리텔링, 창조적인 세계관과 레벨 디자인을 시도하고 있는 인디 게임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디 게임 제작사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여성 캐릭터들과 기존에는 비디오 게임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던 감정적인 영역들까지 확장하고 있다. ‘곤경에 빠진 처녀’와 그 처녀를 구하는 남성영웅 게임 스토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슈퍼 마리오>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역사의 실수(이 게임에서는 특히 원자폭탄의 개발과 사용)를 되돌릴 수 있는지, 게임의 시간성과 죽음을 어떻게 고찰할 수있는지를 철학적으로 질문하며 그 성찰 자체를 게임화한 <브레이드>, 1인칭 슈팅 게임으로는 드물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기계와 여성신체, 감정과 이성, 통제와 독립에 대한 흥미로운 사유들을 소화하면서 예술적이고 독창적인 퍼즐 게임으로 만든 <포탈> 시리즈(이 게임에는 플레이어 캐릭터 첼외에 첼의 적으로 GLaDOS라는 컴퓨터가 여성 목소리로 등장한다. <포탈1>에서 적이었던 이 둘은 <포탈2>에서 남성 컴퓨터 코어 휘틀리에 대항해 서로 연대하게 된다), 1인칭 인터액티브 어드벤처로 사라진 동생에 대한 단서를 찾는 언니를 플레이어 캐릭터로 설정한 <Gone Home>(※스포일러! 마우스로 블럭을 치면 볼 수 있습니다: 동생은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며 집을 나갔음이 밝혀진다), 알콜중독인 아버지의 학대 속에 살고 있는 입양아의 판타지 게임 <Papo & Yo>, 이누이트 부족 소녀의 모험담을 담은 퍼즐 게임 <Never Alone>,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액션 어드벤처 <Life Is Strange>, 경찰에게 수사를 받고 있는 한 여자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그 여성이 범죄자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추리게임 <Her Story>, 디스토피아 국가인 아스토츠카에 입국과 추방을 관리하는 출입국관리관이 되어 난민과 이민자 수용의 문제를 성찰하게 하는 퍼즐 게임 <Papers, Please>, 상실의 감정을 다룬 <Everybody's Gone to the Rapture>, 암으로 죽어가는 아들과 그 아들을 지켜보는 게임 개발자인 부모의 고통을 게임화한 <That Dragon, Cancer>(이 게임은 다큐-게임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했다) 등 다양한 장르와 스토리, 게임성, 사회정치적인 비판, 감정 체험의 가능성을 가진 게임들이 출시되고 있다. 비디오 게임은 이미 우리 문화의 매우 큰 영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저 중독성, 폭력성, 선정성을 가진 매체로 간단히 취급하며 막무가내로 규제하거나 폐기할 수 있는 매체가 아니다. 바라보기보다는 체험을, 동일시보다는 원격현존의 몰입감을 강조하는 비디오 게임은 감각적 차원에서부터 각기 다른 세계와 그 세계의 규칙을 학습하고 경험하도록 만든다. 그런 면에서 비디오 게임은 여성 문화의 관점에서도 더 확장하고 활용할 수 있는 매우 큰 잠재성을 갖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비디오 게임에 보다 더 많은 여성들의 적극적 개입과 목소리가 필요한 때이다. 

  

글: 조혜영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