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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지혜를 전수하는 조상할머니 : 북유럽 신화의 여신들




[다시 듣는 씨네 페미니즘 학교1] 

북유럽 신화의 여신들 

안인희 


북유럽 신화는 매우 남성적인 특성을 보인다. 애꾸눈의 창조주 오딘(Odin), 망치를 들고 거인들을 때려죽이는 토르(Thor), 파괴의 주 로키(Loki)를 중심으로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들이 잔뜩 등장한다. 신들의 라이벌은 태초에 신들보다 먼저 태어나 쓸모도 없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막강한 거인들.

오딘과 형제들은 태초거인 이미르(Ymir)를 죽이고 그 시신을 알뜰살뜰히 이용해서 천지와 우주를 창조했다. 아홉세계와 시간을 만들고, 난쟁이도 만들고, 질서도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도 만들었다. 오딘의 아들 토르는 인간이 농사짓고 물고기를 잡아 살 수 있도록 인간의 삶을 가로막는 거인들을 때려죽이는 일을 한다. 서리거인, 암벽거인, 얼음바다거인, 등등 태초 자연의 상태에 망치 묠니르(Mjöllnir)를 내리쳐서 정리를 해 인간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그래서 토르는 농업의 신. 그가 거인에게 망치를 내리칠 때 천둥소리가 나기에 천둥의 신이기도 하다.

불의 신 로키는 오딘의 여행길을 자주 따라나서고, 토르의 모험에도 자주 함께 한다. 약방의 감초처럼 여기저기 잘도 끼어든다. 또한 땅속에서 광석을 다듬어 보물을 만드는 난쟁이 대장장이들은 대개 로키에게 복종한다. 불을 써야 하기 때문. 덕분에 난쟁이가 만든 보물을 신들에게 전달하는 보물 전달자 노릇도 로키가 한다. 다만 그 자신은 보물을 몸에 지니지 않는다. 그는 본디 오딘의 아들이 아니라, 거인과 어느 여신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오딘이 만든 세계에는 종말의 예언이 내려져 있으니, 신들과 거인들이 크게 한 판 붙어서 양쪽이 모두 멸망한다는 예언이었다. 신들과 거인들의 마지막 전쟁의 이름은 라그나뢰크(Ragnarökr). 전쟁과 지혜의 신인 오딘은 저승 저편까지 넘나들며 죽은 여자예언자들에게서 이 예언을 알아냈다. 근심에 찬 오딘은 최후의 전쟁에 대비하여 죽은 용사들의 혼령을 훈련시킨다. 곧 유령부대다.

그러나 최후의 전쟁을 불러오는 신은 다름 아닌 로키. 불의 신의 진짜 모습은 바로 파괴의 주(主)였던 것. 그래서 로키는 라그나뢰크의 신이다. 그가 괴물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괴물 자식 셋과 로키 자신이 라그나뢰크의 시간에 거인들의 선봉에 서서 신들과 맞붙는다. 그리고 물론, 신들도 거인들도 모두 죽는다. 그런 다음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것.

이렇게 시작과 종말이 분명한, 선(線) 굵은 신화에서 언뜻 여신들의 역할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남신들의 막강한 힘에 버금가는, 다만 눈에 덜 보이는 힘을 가지는 게 여신들이다.

먼저 강력한 마법의 능력을 지닌 프라야(Freyja) 여신. 오딘에게 마법을 전수한 오딘의 스승이기도 하다. 물론 오딘처럼 저승 너머 세계까지도 갈 수 있고, 신들 중에 유일하게 자신의 상징보물 목걸이도 손수 장만했다.

오딘이 훈련하는 유령부대 절반이 프라야 여신의 궁전인 폴크방(Folkwang)에 머문다. 당연히 유령부대의 훈련에도 완전무장을 갖춘 프라야 여신이 오딘과 함께한다. 사랑의 여신 프라야는 애초에 온 세상의 존재들에게 ‘황금열망(굴바이크)’을 퍼뜨린 여신. 프라야 여신은 북유럽 신화 체계에서 로키만큼이나 복합적인 특성을 지니는 신이다.

그리고 오딘의 아내이며 신들의 어머니 프리크(Frigg) 여신, 젊음의 사과를 관리하는 이둔(Idun), 스칸디나비아에 이름을 준 스키어들의 신 스카디(Skadi), 덴마크 사람들에게 몹시 소중한 셸란 섬을 선물한 게프욘(Gefjon). 이들은 남신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모두 자신들만의 이야기 영역을 가지는 여신들. 그리고 중요한 남신들의 아내 여신들도 물론 있다. 토르의 아내 지프, 로키의 아내 지긴.

3의 배수로 패거리를 이루는 여신들 두 그룹이 있다. 먼저 죽은 용사들의 혼령을 오딘의 궁전이자 인간들의 낙원인 발할(Walhal)로 데려가는 발퀴레(Walküre) 여신들. 3, 6, 9 등의 수를 이룬다. 하늘을 나는 말을 타고 용사의 혼령을 데려가는 발퀴레들은 아름다운 처녀여신들로, 신격(神格)이 조금 밀리는 편. 자주 영웅의 애인 노릇을 하기도 한다.

또 다른 그룹이 노르네(Norne)들. 이들 역시 3의 배수를 이루는데, 가장 유명한 노르네들은 신들의 세계에서 우주나무 이그드라실(Yggdrasil)을 보살피는 운명의 여신들이다. 이들은 실을 자아서 신과 거인과 인간의 수명과 운명을 결정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운명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면 라그나뢰크를 예언한 저 죽은 예언자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오딘이 창조한 아홉세계 바깥에, 즉 저승의 바깥에 죽어서 누워있는 죽은 여자예언자 발라(Wala)이다.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몇 명인지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우주의 처음과 끝에 대한 모든 비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죽어서 무심히 누워있으니 아무도 이들에게서 그 비밀을 캐낼 수 없다. 오직 오딘만이 마법의 힘으로 이들을 억지로 깨워 일으켜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다. 그리고 프라야 또한 이들을 깨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오딘이 만든 세계의 시작과 종말을 알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들. 라그나뢰크의 실제 상황은 북유럽 신화의 출전문서인 《에다(Edda)》에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그에 대한 예언만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라그나뢰크의 예언만을 들을 수 있다.

북유럽 신화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들이 《에다》 곳곳에 등장하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할머니, 또는 죽은 여자예언자이다. 땅을 선물하는 게프욘 여신도 그 중 한 명이다. ‘에다’라는 말 자체가 ‘조상 할머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발라는 곧 에다이다. 우리에게 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는 옛이야기를 해주는 할머니들인 것이다.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옛날이야기를 손주에게 들려주는 할머니들. 

저 위대한 남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들이 없었다면, 그러니까 《에다》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몰랐을 것이다. 오딘과 토르와 로키 이야기가 재미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 할머니들에게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할 것이다.

남자들이 세상을 만들고 부순다고? 그럼 만들고 부수고 그냥 영영 사라져라. 만일 이야기꾼 할머니들이 없다면 누가 그 엄청난 이야기를 기억이나 해줄까? 세상을 만들고 모험을 하는 모든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 《에다》라는 문서 자체가 곧 여성성의 영역이다. 적어도 북유럽 신화에서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