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를 되치는 여성들: <비밀은 없다>와 <미씽>의 모성과 여성연대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자기만의 견고한 세계에 살고 있다. 그 세계는 너무나 견고하여 근거없는 의심조차 확고한 신념이 되며, 타인의 타당한 문제제기는 기어이 무력화되고 만다. 그 세계는 주술과 심상이 지배하는 세계다. 그러므로 현실에 그 세계가 드러나는 순간, 연홍은 어김없이 실패를 경험하고, 정상성을 벗어난 것으로 배척당한다. 손희정은 이런 연홍의 모습을 들어, 이 영화가 맘충의 역습을 보여주는 모성 복수극이라고 말한다 (손희정, <씨네21>).
영화의 초반, 평범해 보이던 연홍의 세계가 견고한 자기 안의 세계로 향하는 것은 물론 딸의 실종이 계기가 된다. 영화는 두 번의 잠금해제 장면을 통해 이 세계의 변화를 감지한다. 초반부에 정치 스릴러 혹은 범죄 스릴러처럼 진행되던 영화는 민진의 이메일의 비밀번호가 풀리는 순간, 파편화된 이미지의 나열과 함께 일시적으로 사이코 드라마 혹은 오컬트로 옮겨간다. 이때부터 연홍의 광기어린 행동들이 시작된다. 미옥을 최면술사에게 데려가 소득없는 증언을 하게 만들거나 가위로 자신의 손을 찔러 남편의 선거사무소 사람들을 협박한다.
두
번째 잠금해제는 민진을 죽인 범인의 휴대폰이다. 연홍이 무당인 친구를 찾아가 굿을 하는 모습과 액정이 깨진 휴대폰의 패턴을 풀기 위해 미친 듯이 손가락을 움직이는 미옥의 모습을 교차시킨다. 굿판에서는 남편 김종찬에게 주술을 거는 듯 붉은 글씨들이 휘날리고 있다. 점점 굿은 절정으로 치닫고 휴대폰의 패턴을 아무렇게나 만드는 미옥의 손도 신경질적으로 빨라지다가 일순간 휴대폰의 패턴이 풀려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 미옥과 연홍은 동시에 각성한다. 그리고 이 각성을 알리듯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들린다. 잠금해제된 휴대폰에는 눈을 뜨고 죽은 민진의 얼굴 사진이 뜬다. 곧이어 민진의 시체가 발견되고, 미옥은 웃는다. 그리고 이제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미친 동네에선 아무도 믿으면 안돼”라는 연홍의 말과 함께 광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영화의 톤은 다시 냉정함을 되찾고 연홍은 범인을 찾는 탐정의 역할로 돌아간다.탐문의 결과 연홍은 딸을 살해한 범인이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단죄의 방식은 대개의 사적 복수가 이뤄지는 것처럼 인간으로서의 생명권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정치적 생명을 앗아오는 것이다. 그의 사회적 지위의 박탈은 호모 소셜한 남성 연대의 사회에서 그를 영원히 낙오자로 만드는 것이며 그로 인해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다.
민진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자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쓴다. 그러나 국가 시스템에 자신의 보호를 기대했던 민진의 꿈은 깨지고, 가부장에게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기대했던 연홍의 꿈 역시 가족을 제 손으로 죽이는 가부장에 의해 파탄난다. 결국 한국사회를 지탱해오던 두 축의 판타지 – 가족의 생명을 지키는 주체로서 가부장,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주체로서 국가의 수장 – 는 무너지고 만다. 남은 것은 이 두 축의 붕괴를 경험한 이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돌보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 서로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감응하는 주체, 즉 미옥과 민진 그리고 연홍으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등장은 절대적이다.
<비밀은 없다>에서 중산층 가정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던 연홍과는 달리 <미씽: 사라진 여자>(이하 <미씽>)의 주인공 지선은 싱글맘이자 워킹맘이다. 자신의 일 때문에 다가오는 아이를 밀쳐내거나 아이의 콧물을 먹는 보모 한매에게 ‘더럽다’는 표현을 쓰는 지선의 모습은 ‘무책임한 엄마’ 혹은 ‘매정한 엄마’로 보인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이 ‘맘충’으로 표현되는 비호감 엄마라면 <미씽>의 지선은 여자가 ‘너무’ 똑똑해서 ‘재수없는’ 이른바 ‘배운 여자’를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선은 상사로부터 “이래서 애 엄마들하고 일하기 싫”다는 혐오의 발화를 견뎌야 한다.
그러나 ‘배운 여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지선은 아이가 사라지자 신고를 하는 대신 개인적으로 한매를 찾아다니다 보이스피싱을 당하기도 한다. 경찰에게 끊임없이 도움을 호소하고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려는 <비밀은 없다>의 연홍과는 달리 지선은 애시당초 경찰은 믿지 못하며 늘 혼자 움직이고 스스로 해결하고자 한다. 아이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아이의 양육권을 걱정하여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은 얼핏 비현실적인 신경증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그녀의 ‘과잉된’ 예민함은 일종의 환각 형태로 드러나는데, 지선이 한매의 환영(혹은 꿈)을 보는 장면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한매를 추적하다 새벽에 시골의 사진관을 찾게 된 지선은 뿌연 밤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한매와 자신의 아이 다은을 본다. 황급히 따라간 지선이 한매를 불러세우자 한매는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거기에서 마주한 얼굴은 피를 흘리고 있는 지선 자신의 모습이다. 지선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깬다. 한매에게서 고통받는 자신의 얼굴을 보는 동일시의 환각은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지선이 한매에게 갖는 연민이자 이후 피해자인 지선이 가해자인 한매에게 사과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영화에서 지선과 한매의 동일시는 반복적인 플래쉬백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 플래쉬백은 종종 지선의 얼굴에서 시작해 한매의 과거를 보여준 뒤 지선의 얼굴로 끝난다. 지선이 안마업소를 찾아가 한매의 동료를 기다리는 동안 사장은 지선에게 “진짜 하는 짓 똑같네”라며 한매(목련) 역시 지금의 지선처럼 같은 쇼파에 앉아 손톱으로 쇼파의 가죽을 뜯어냈다고 한다. 그 순간 지선의 얼굴을 비추던 카메라는 지선의 시선을 따라 쇼파 위에 놓인 손으로 옮겨간다. 카메라가 다시 틸트업 하면 그곳에는 지선 대신 한매가 있다.
수잔 헤이워드는 플래쉬백이 진실을 보여주는데 연대기적인 이야기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는데 이것은 “플래쉬백이 갖고 있는 자기 고백적인 특성과 플래쉬백이 수수께끼에 답을 주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1 그러나 <미씽>에서 한매의 플래쉬백 장면은 지선의 시선으로 시작되거나 종료된다. 자기고백할 주체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 고백을 대신하는 것은 지선이며 이 지점에서 둘은 지속적으로 연결된다.
지선은 한매의 과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지선의 아이 때문에 한매의 아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실제로 한매의 아이를 병원에서 내쫓은 것은 지선이 아닌 지선의 남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과잉으로 해석된 죄책감이다. 앞서 지선의 예민한 행동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런 과잉 해석과 예민함이야말로 여성간의 공감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우에노 치즈코는 이를 좀 더 극단으로 밀고 나가 여성은 이중의 혐오 – 남성의 여성에 대한 혐오와 여성으로서의 자기혐오-를 마주하고 살아간다고 이야기하며, 2 자비에 돌란은 이런 예민함과 신경증은 이성애자 남성이 아닌 이들이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3 이언희 감독은 한매와 지선의 계급적 차이에 앞서 여성들이 놓이게 되는 편견과 폭력적인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4 여성이면 누구나 한매도 될 수 있고 지선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5 그러므로 지선과 한매의 동일시와 지선의 과잉 죄책감은 편견과 폭력의 피해자가 느끼는 공감이자 연대의 단초가 된다. 비록 지선은 한매를 구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배주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크리틱]' 카테고리의 다른 글
[SIWFF] 새로운 물결 “2018년 여성영화의 흐름을 한 눈에!” (0) | 2018.05.04 |
---|---|
[SIWFF] 개막작 “아녜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0) | 2018.05.04 |
여자는 왜 여자고, 엄마는 왜 엄마인가: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0) | 2018.02.19 |
‘늑대-여자’들의 동물성: <스푸어>, <로우>, <로건> (0) | 2017.12.19 |
[2017 SIWFF 미리보기] 새로운 물결 (0) | 2017.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