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여자’들의 동물성: <스푸어>, <로우>, <로건>
* 해당 리뷰는 한국영상자료원 ‘사사로운 영화리스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늑대-여자들
어떤 영화로 리뷰를 쓸까 고민하며 올해 뽑은 나의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를 한참 노려보다 특정 형상이 떠올랐다. 그건 세대도, 국적도, 상황도 다른 ‘늑대-여자’의 형상이었다. 무정부주의적 에코 페미니스트인 노년의 늑대-여자, 수의대 신입생 통과의례로 날고기를 먹은 후 낯설지만 강력한 자신의 힘을 지각하게 된 식인 늑대-여자, 돌연변이 유전자 실험으로 태어나 초능력을 지닌 십 대의 늑대-여자. <스푸어>(아크네츠카 홀란드, 2017)의 두셰이코, <로우>(줄리아 듀콜뉴, 2016)의 쥐스틴, <로건>(제임스 맨골드, 2017)의 로라가 바로 그들이다(늑대가 아닌 다른 동물로 더 확장해 논의하면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일디코 엔예디, 2017)의 주인공으로, 소 도축장 품질검사관이자 사슴이 된 마리어까지 포함할 수 있겠지만 지면의 한계 상 제외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종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이접, 혼종, 합종하며 인간성,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제 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인간성에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인간은 이 상태로 존재해도 되는가?’이다. 그러나 두셰이코, 쥐스틴, 로라는 인간성을 질문하기 위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깊게 파고 들어가며 또다시 인간 중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방식을 비껴간다. 오히려 폭력적인 악당으로서의 인간은 캐리커처화되고 종을 횡단해 동물성을 탐험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동물성이 아니라 동물이 되어 감각하는 동물성이다. 인간은 그 스스로도 동물의 일부면서 특히 자신 내부의 야만성, 폭력성, 자기중심적 욕구충족, 비성찰성, 폐쇄성, 생존을 위한 이기심과 무한경쟁 등을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묘사하기 위해 ‘동물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왔다. 그러면서 인간을 동물에서 분리해 예외적 특권을 가진 존재로 가정한다. 이러한 위치선점은 인간의 지구 지배를 정당화하고 여타의 동물을 타자화한다.
그러나 <스푸어> <로우> <로건>의 늑대-여자들은 늑대와 혼종하며 동물성을 다르게 감각한다. 그녀들은 절대적 공감, 기존의 기표에 포섭되지 않는 소수자의 욕망, 경계와 고정관념을 흐리며 배치를 다르게 만드는 공동체, 자율과 야성성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소수자를 지지하는 연대를 특징으로 한다. 늑대-여자들은 아웃사이더이며 순응적이지 않고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고립되지 않고 불가능할 것 같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때문에 ‘짐승 같은 야만성’을 강조하는 남성들의 영화가 늘 떼로 몰려다녀도 결국은 반복적으로 ‘고독한 늑대’로 결론 맺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늑대-여자들이 주인공인 이 세 영화에서 기성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남성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에 반격하는, 그래서 살인과 식인도 서슴지 않는 동물성은 소수자의 욕망이다.
두셰이코Duszejko
“블랙코미디 요소를 지닌 무정부주의적인 페미니스트의 범죄 이야기”라고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이 스스로 정의내린 이 영화는 리벤지 스릴러, 미스터리, 액션,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어 때때로 영화가 덜컹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덜컹거림, 그 이종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의 혼종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이고 미학이며 즐거움이다. 그 혼종성은 이 영화의 포스터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늑대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한쪽 눈은 인간의 눈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재미를 위해 잔인하게 동물을 사냥하고, 제도, 법, 종교가 그 폭력을 승인하는 사회(법은 계절별로 사냥 가능한 동물을 지정하고, 종교는 사냥꾼을 축복한다)에 두셰이코는 늑대가 되어 복수를 감행한다. 사냥꾼들은 단지 동물만 죽이지 않는다. 여성과 아이 등 사회의 소수자들에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고 폭력을 가한다. 즉 사냥은 인간의 동물성이 아니라 권력과 위계의 문제다. 서사적으로 보면 이 복수는 사계절에 걸쳐 일어난다. 대부분의 리벤지 스릴러는 최종 보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가장 스펙터클하게 액션을 감행하며 억압되어 있던 분노를 터트리는 식으로 진행되지만, 이 영화는 반대다. 복수는 천천히 이뤄진다. 이러한 서사는 동물과 여성에게 가해왔던 폭력이 그만큼 길고, 오래, 일상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속되어왔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폭력은 한 명의 남성 악당이 아니라 남성 중심 네트워크가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 동물을 보여주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동물은 단순히 풍경이 되지 않는다. 총성이 울릴 때 동물들이 도망치는 인서트에서 흔들리는 카메라는 사냥하는 쪽의 액션이나 스릴이 아니라 도망치는 쪽의 위급함과 다급함을 재현하며, 살인현장에 나타난 늑대와 사슴들은 그들의 시점 쇼트를 갖는다. 그것은 쇼트와 역쇼트의 형식에서 비가시적이었던 시점이다. 동물의 시점 쇼트는 늑대가 되어 복수를 감행했던 두셰이코와 마찬가지로 관객들로 하여금 종을 가로질러 사슴이나 늑대가 되게 하고 그들의 정념을 감각하게 한다.
쥐스틴Justine
<로우>는 장르적으로 <캐리>나 <진저스냅> 같은 공포영화의 전통에 닿아 있다. 이 공포영화들은 10대 중후반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위험하고 비규범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그 은유로 주인공 여성이 초능력이나 이질적인 정체성을 지각하게 한다. <로우>는 이 서브 장르를 차용하면서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혐오하는 클리셰를 반복하지 않고 가장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정치학으로 향한다. 부모, 언니가 모두 수의사이고 엄격한 채식주의자이자 모범생으로 자랐던 쥐스틴은 수의대 신입생 통과의례로 강제로 토끼의 생간을 먹게 된다. 그녀가 경험한 수의학과는 동물을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위계가 심한 남성 중심적인 문화로 가득한 곳이다. 여자들은 성적 희롱의 대상이 되고, 게이인 남성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이상한 허기 속에 쥐스틴은 날고기를 먹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충족감을 느낀다. 영화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의 경계와 금기를 거부하고 비체적인 피부 발진, 머리카락, 날고기, 물어뜯기, 오줌 싸기, 토하기 등을 보여주며, 여성의 몸에 대해 질문한다. 날씬한 몸을 위한 식이통제, 가랑이 털을 밀어버리는 비키니 왁싱(자매의 비키니 왁싱 장면은 공포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다!)은 무엇을 위한 고통인가. 이것은 정말 인간적인가.
자신의 식인 욕망이 모계로부터 왔다는 것을 안 쥐스틴은 윤리적 선택에 직면한다. 엄마처럼 엄격한 채식주의자로 살 것인가, 언니처럼 자신의 욕망을 풀어놓고 사회의 심판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부계 혈통의 <늑대아이>와는 달리 이 선택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쥐스틴은 여성으로서 어떠한 곳에 맞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감정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식인 정체성뿐만 아니라 여성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두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윤리적 선택도 가능하다. 쥐스틴과 같은 젊은 여성이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할 때 느끼게 되는 일상적 폭력, 불쾌함, 분노는 잔인한 유머와 함께 클로즈업과 롱테이크, 촬영 속도를 변화시키며 흐르는 듯한 움직임과 거리를 둔 으스스한 금욕적 설정 쇼트를 오가는 카메라를 통해 우아하게 구현된다.
로라Laura
전통적인 남성 장르로 여겨졌던 서부극과 슈퍼 영웅 액션의 혼종인 <로건>은 고독한 ‘늑대-남자’의 죽음이자 새로운 종(트렌시젠) ‘늑대-여자’의 시작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로라를 비롯해 실험실에서 태어난 뮤턴트 아이들은 위의 두 영화에 등장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우리에 갇혔다. 이제 늙고 병든 울버린보다 힘이 센 로라는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에 걸 파워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아빠 딸 Daddy’s Girl‘이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유지할 수 없는 남성들은 딸들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힘을 여전히 확인하는 방식은 그 딸의 힘이 엄마가 아닌 자신에게서 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건>이 흥미로운 슈퍼 영웅 액션 영화인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로라는 울버린이 포기하고 프로페서 엑스가 망쳐버린 뮤턴트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다. 여전히 ‘고독한 늑대’로 서부극의 남성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울버린과 달리, 그의 죽음 후 로라는 다른 뮤턴트 아이들을 이끌고 함께 떠난다. 모가장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두셰이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법을 고민하는 쥐스틴, 억압받는 이들의 공동체를 재건하는 로라, 늑대-여자들은 홀로 떠나지 않는다.
모계를 강조하고 부계와의 단절을 말하는 이 영화들은 사실 세 세대의 페미니즘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60대 여성인 두셰이코의 페미니즘은 급진적 변화를 원했던, 즉 혁명적 비전을 가졌던 이들의 것이다. 그녀들은 기성 시스템을 말 그대로 꺼버리고 무정부주의적 혁명을 원한다. 세계는 다시 변화할 것이고 새로운 사이클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기다린다. 그래서 <스푸어>에서 모든 버려지고 배제된 존재들이 모여 있는 환상적인 공동체는 사적인 소망성취라기보다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다. 쥐스틴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몸이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서 얼마나 억압되고 비인간적으로 통제되고 있는지를 비판하는 2세대 페미니즘의 전통에 있다. 가부장제, 규범성으로부터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해방시키는 것은 여성들에게 엄청난 힘을 돌려줄 것이다. 로라는 여성 또한 강한 힘을 갖고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보는 포스트페미니즘의 걸파워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거침이 없으며 타고난 재능과 힘을 주저하지 않고 발휘한다. 이 세 세대의 페미니즘은 연대기적이지 않다. 이 다양한 페미니즘은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 속에서 함께 공존한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동물 종을 가로지르며 그동안의 인간성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왔는지를 비판한다. 또한 부계의 전통하에 있던 장르들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모계화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폭력과 살인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소수자의 욕망을 위해 사용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 다음 링크에서 한국영상자료원 ‘사사로운 영화리스트’에 게재된 리뷰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kmdb.or.kr/column/bestMovie_view.asp?choice_seqno=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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