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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여자는 왜 여자고, 엄마는 왜 엄마인가: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여자는 왜 여자고, 엄마는 왜 엄마인가: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는 일본의 대표적인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의 최신작이다. <카모메 식당>(2006), <안경>(2007),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2012)를 만든 오기가미 감독은 낯선 곳에 함께 모여 위로하고 기존의 삶의 속도와 무게를 덜어냄으로써 일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소위 힐링 시네마붐을 일으킨 주역이다. 오기가미 감독은 바쁘고 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현대인의 삶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긴 하지만 사회구조적인 논평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기가미 감독의 치유 공동체는 다분히 모든 개인은 선하다는 이상주의적이고 낙관적인 태도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는 따뜻한 풍경과 대안 가족 등 기존의 작가적 관심사를 이어나가지만, 개인과 개인의 연결이 아닌, 사회 내 개인, 가족관계 내의 개인을 그렸다는 점에서 기존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건 아마도 트랜스 여성이라는 일본 사회 내에서 여전히 억압받고 배제된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오래된 페미니즘 쟁점 중 하나인 모성을 질문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장편 극영화에서 트랜스젠더가 주요인물인 영화들이 영화제나 예술영화상영관을 중심으로 부쩍 눈에 띄고 있으며 비평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한국영화인 <꿈의 제인>(2016)<죽여주는 여자>(2016)뿐만 아니라 미국영화 <어바웃 레이>(2016), <탠저린>(2015), <대니쉬 걸>(2016), 칠레영화 <판타스틱 우먼>(2017), 일본영화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 등이 그런 영화들이다. 사실 그동안 트랜스젠더는 성적소수자 중에서도 스크린 상의 재현 자체가 매우 희소하거나 아니면 정형화되어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트랜스 남성을 다룬 영화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1999)<3xFTM>(2008) 같은 좋은 영화들이 있기는 했지만 매우 희소했으며, 반면 상대적으로 트랜스 여성이 조연으로 등장한 영화는 꽤 되지만 지나치게 정형화되어 장르적 장치나 끌리셰로 이용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2000년대 트랜스젠더인 하리수 배우가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후 한국영화에서도 트랜스젠더 캐릭터가 영화에 종종 등장했다. 영화에서 트랜스젠더라고 밝히진 않지만 하리수 배우가 주연을 맡아 그 정체성의 존재감을 지을 수 없었던 <노랑머리2>(2001)부터 성장영화라 할 수 있는 <천하장사 마돈나>(2006)<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7), 그리고 트랜스젠더 정체성이 장르적 반전의 주요 실마리가 되는 <가면>(2007),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시각적 독특함의 장치로 사용한 <하이힐>(2014)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트랜스젠더 정체성은 특히 장르 영화에서 극단적 남성성과 여성성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내는 이색적인 시각적 볼거리나 반전의 속임수 장치 혹은 신뢰하지 못할 주인공의 배경으로 착취적으로 사용되어 온 부분이 있다. 특히 이러한 장르적 사용은 트랜스젠더의 성전환을 다른 목적이 있는 속임수라 여기고 그렇기 때문에 신뢰하지 못할 대상이라는 편견을 강화한 면이 있다. 게다가 이런 착취적 사용은 암묵적으로 성전환이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이루어지거나 메이크오버처럼 외모에 국한되고 단기간에 완결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기도 한다.

 

 

일본영화지만 한국과의 인종적, 문화적 유사성 때문에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는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가 보여주는 현실은 이러한 고정관념을 다각도로 깬다. 이 영화의 주인공 린코는 트랜스 여성으로 수술을 끝낸 상태이지만 심리적이고 관계적이고 법적인 측면에서 여성성과 관련해 끊임없이 도전받고, 협상하고, 저항하고, 재구성한다. 그녀 스스로가 전환의 여정을 일단락 하고 싶다 해도 외부로터의 도전과 압박 때문에 그럴 수 없다. 영화는 트랜스젠더 이슈를 다루면서도 토모라는 초등학생 여자아이의 눈을 통해 쉽고 대중적인 가족영화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만만치 않다.

 

 

11살 소녀 토모의 엄마는 싱글 맘으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토모를 버려두고 집을 나간다. 그럴 때마다 혼자 사는 삼촌 마키오를 찾았던 토모는, 이번에는 삼촌 역시 애인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삼촌의 애인은 바로 트랜스 여성 린코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굴던 토모는 엄마와 달리 자신을 따뜻하게 돌봐주는 린코에게 마음을 연다. 토모, 린코, 마키오는 서로를 이해하며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나간다.

 

오기가니 감독은 개인적으로 출산과 육아를 하면서 모성에 대해 더 질문하게 되었다고 인터뷰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모성에 대한 의문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모성의 다양한 모습을 세심하게 그린다. 토모의 엄마는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은 아니다. 그녀는 토모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남자친구 때문에 딸을 방치한다. 반면 린코는 생물학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트랜스 여성이지만 토모의 엄마보다 돌봄에 뛰어나다. 토모의 기분을 세심하게 살피고, 같이 놀아주며, 귀여운 도시락을 싸주고, 머리를 묶어주며, 사춘기의 신체적 변화에 호기심을 갖게 된 토모에게 자연스럽게 여성되기의 정보를 나눠준다(린코야 말로 여성되기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고 많은 정보를 가진 성교육의 적임자일 것이다). 린코는 사회가 전형적으로 엄마들에게 기대하는 바와 관련해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는 린코의 돌봄 능력 혹은 모성을 이상화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린코의 돌봄 능력은 직업적인 것일 수 있다. 린코는 간호사로서 요양병원에서 노인환자들과 동료들을 뛰어나게 보살핀다. 그녀의 돌봄 능력은 직업적인 탁월함인가 혹은 개인적인 능력인가, 아니면 여성성이나 모성의 발현인가. 그것도 아니면 간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여성 특정적인 직업인가. 린코의 상황은 사실 이 질문들이 *시스젠더 여성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드러내며, 여성성에 대해 급진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린코가 진정한 모성을 갖고 있고, 토모의 엄마는 그 반대라는 식으로 대립시키지 않는다. 사실 그 둘 모두가 어찌 보면 모두 모성의 모습이다. 여기에 자식의 정체성혼란을 함께 겪으며 트랜스젠더 딸에게 뜨개로 만든 가슴을 선물해주었던 린코의 엄마, 그리고 바람핀 남편에게 상처를 입고 토모의 엄마에게 엄격하게 토모의 할머니, 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깊은 상처를 입힌 토모의 같은 반 친구 카이의 엄마까지, 다양한 엄마들의 입장과 갈등, 욕망을 보여준다. 영화는 엄마들이 저지르는 아동방임, 혐오발언, 정서적 폭력 같은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애써 변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모성을 배척하지도 않는다. 엄마되기 역시 여성되기 혹은 성전환처럼 한 번에 완성되거나 완결되는 것이 아니며 과정으로서 언제든 실수할 수 있고 변화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삼촌은 토모에게 토모의 엄마도 한 명의 개인으로서 자기만의 사정이 있을 수 있으며 이상적인 모성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한편 토모는 자살 기도한 카이에게 네 엄마도 틀릴 수 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다양한 엄마들은 소위 정상 가족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질문하게 만든다. 다양한 엄마들에 둘러싸인 주인공 토모는 오히려 생물학적 엄마의 계보, 그리고 린코 엄마의 계보를 모두 받아들인다. 토모는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엄마를 이해하며, 린코의 엄마가 린코에게 뜨개 가슴을 선물했던 것처럼 린코가 만들어 준 털실 가슴을 받으며 그녀를 또 다른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어떤 면에선 뜨개질, 요리를 비롯한 가사노동, 돌봄 노동, 꽃 달린 가디건과 원피스, 지나치게 정돈되고 부드러운 제스처 등으로 묘사된 린코가 지나치게 정형화된 여성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가부장제가 강요한 전형적 여성성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사실 이 여성성은 누군가의 취향, 누군가의 재능과 능력, 혹은 직업 정신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성이 강고하게 존재하는 현실의 상황에서 늘 혹독하게 자신의 여성성과 관련해 도전받고 증명을 요청받는 트랜스 여성들에게 선택의 폭이 넓은 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여성성은 린코의 취향과 개성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재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강고한 성별이분법의 현실의 반영일 수도 있다. 아마도 현실의 성별이분법의 경계가 흐려지면 트랜스젠더들의 젠더 표현도 함께 폭이 넓어지고 다양해질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한 개인에게 있어 그녀가 시스젠더든 트랜스젠더든 젠더의 표현은 고정적이지 않으며 삶의 경험에 따라 충분히 유동적이며 변화가능하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쟁점과 관련해 일종의 전복을 보여주는 모티브는 108개의 뜨개 남성성기다. 젠더 정체성은 내적인 인지와 감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시청각적인 것이기도 하다. 오기가미 감독은 사물이나 요리 등을 통해 감정을 보여주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 왔다. 이 영화에서는 바로 뜨개질이라는 행위,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남성성기에 번뇌를 불어넣는다. 온갖 불안, 혐오, (신체적/심리적) 고통, 분노, 집착, 미련 등이 뜨개질을 하며 엮어진다. 신체적, 법적 전환만이 성전환이 아니라 이러한 감정들 역시 전환의 과정에 포함된다. 그리고 그 전환은 또한 개인적이지 않으며 관계 속에서 함께 이루어진다. 그것이 마키오와 토모가 린코의 뜨개질에 동참하는 이유다. 게다가 곧고 꼬부라지고, 작고 크고, 단색이고 무지개인 다양한 모양의 남성 성기는 다양한 남성성, 여성성이 존재함을 보여주며, 성기의 물신화를 무너트린다. 108개의 성기는 전환(transition)이 단기간의 결과가 아니라, 물론 계기의 순간들이 존재하지만 지속(duration)이며, 성기가 유일한 전환이 아니라는 점을 외화한다. 다시 말하면, 물신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물신화를 무너트린다(각자 엮는 속도와 방법에 따라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뜨개라는 행위는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사실 성기에 대한 집착과 물신화는 성기수술 등으로 성별전환의 가부를 결정하는 과 트랜스젠더들에게 성기와 관련해 관음적이고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 시스젠더 가부장제사회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108개의 뜨개 성기를 태우는 장면은 한편으로 해방적이지만 사실 한계이기도 하다. 오기가미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는 개인에 대한 사회적 억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카이 엄마의 혐오발언과 병원 입원 시 남자병동에 들어가게 된 린코의 상황은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인권침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전 작품들처럼 침해와 억압의 순간에 번뇌를 태우고 개인적으로 해소하는 방식으로 해결한다는 면에서 가족영화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트랜스젠더 정체성의 캐릭터가 나오는 이 영화에서 흥미롭게 볼 부분은 배우의 캐스팅과 연기연출이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를 캐스팅할 때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시스젠더 남성 배우, 시스젠더 여성 배우, 트랜스젠더 배우이다. 예를 들어, 트랜스 여성을 연기하기 위해서 시스젠더 남성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 이 영화처럼 보통 예쁘장하거나 선이 여리여리 하다고 평가를 받는 배우를 캐스팅한다. 이 영화는 쟈니스 주니어 출신의 아이돌 배우 이쿠타 토마를 캐스팅했다. 이런 경우 매체들은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들이라는 수식어를 달곤 한다. 시스젠더 여성 배우를 캐스팅할 때는 체격이 상대적으로 큰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가 많다. 이 캐스팅의 과정과 연기의 방식은 우리 사회가 여성성과 남성성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고정된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하게 한다. 최근에는 <죽여주는 여자>의 안아주 배우, <탠저린>의 두 주인공을 맡은 키타나 키키 로드리게즈와 마이야 테일러, <판타스틱 우먼>의 주인공 다니엘라 베가처럼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가진 배우들이 직접 트랜스젠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경우가 조금씩 보이고 있다. 아마도 가장 이상적인 경우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 앞으로 더 많이 그리고 더 다양하게 트랜스젠더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사회에서 지정받은 신체적 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한 성별 정체성이 일치된다고 느끼는 사람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