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면서도 은유적이고, 무뚝뚝하면서도 역동적이다.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식 트레일러는 공개되자마자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올해 영화제를 향한 기대감을 불러 모았다. 배우가 주고받는 대사는 간결하고 시간 또한 1분 남짓으로 매우 짧지만, 그 안에는 ‘재기발랄하고 힘이 넘치는 편한 친구’로서 존재하겠다는 영화제의 마음이 묻어난다.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며 연기력을 입증해낸 매력적인 두 배우 김꽃비와 정하담이 출연하며, <소공녀>(2017)와 <키스가 죄>(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페르소나>, 2019) 등을 통해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인정받은 전고운 감독이 연출했다. 세 사람과 만나 트레일러 작업 과정부터 올해 영화제 추천작까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각자 영화제와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안다. 처음 영화제를 찾았을 때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
전고운_ 자원활동가로 영화제와 처음 인연을 맺었고, 이후 2009년 <내게 사랑은 너무 써>라는 단편으로 첫 상영과 수상을 경험했다. 나로서는 스크린을 통해 관객과 만난 첫 번째 순간이기도 해서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작품 선정 소식을 전화로 들었는데, 길 한가운데서 말 그대로 오열했다. 건국대학교 영화과 1기 출신이다. 학교에 마땅한 공간도 없고, 선배도 없고, 영화제에 관한 어떤 데이터도 없는 상태였다. 전에 만든 작품은 영화제마다 다 떨어졌는데 졸업작품인 <내게 사랑은 너무 써>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다는 거다. 그 이후에는 어디에서 영화를 상영하든 울어본 적이 없다. (웃음)
정하담_ <플라이>(임연정, 2016)를 통해 처음 방문했다. 그때 역시 기존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던 기회여서 즐겁게 참여했다.
김꽃비_ 와, 사실 되게 오래전이라 잘 기억이 안 난다. (웃음) 아마도 2012년 <나나나 : 여배우 민낯 프로젝트>(연출 부지영, 김꽃비, 서영주, 양은용)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후 <거짓말>(연출 김동명)이 2015년에 새로운 물결 부문에서 상영되었다.
전고운 감독은 트레일러 작업을 맡기까지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다.
전고운_ 원래 이런 작업 정말 안 한다. 내가 선택하는 일은 두 종류다. 돈이 되거나, 재밌거나. ‘봉사’하듯 만들고 싶지 않았고 잘할 자신도 없었다. 짧은 영상일수록 너무 어렵더라. 솔직히 말하면 간결하면서도 시선을 확 잡아끌기 위해서는 그만큼 돈을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안 주셨을 때 계속 거절했다. 근데 박광수 집행위원장님도 만만치 않으시더라. (웃음) “전 감독이 트레일러를 만들지 않으면, 올해는 트레일러 없이 가겠다. 그냥 검은 화면 틀겠다.”고 하시는 거다. 놀라면서 내심 기분 좋기도 했다. 내가 어디 가서 이렇게 귀여움을 받겠나. (웃음) 이후에도 설득과 거절을 반복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한 번 만나서 식사나 하자기에 나갔다가 결국 수락했다. 이야기 나눠 보니 ‘이 언니 멋있는데’ 싶으면서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계속 안 한다고 버티면 집에도 못 갈 것 같았고. (웃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제안이 아니라면 절대 맡지 않았을 작업이다.
주제, 내용, 분량 등 영화제 쪽이 제시한 조건이 있었나.
전고운_ 요구사항은 없었다. 마음대로 하면 된다고 했는데, 사실 예산이 정말 적거든. 천 원 주고 짜장면 사 먹은 다음에 나머지는 사고 싶은 거 다 사라는 느낌이랄까. (웃음) 물론 적은 예산으로도 아이디어 내서 찍는 감독들이 분명히 있다. 난 그게 안 되는 거다. 게다가 개인 작업이 아닌 영화제 공식 트레일러로 공개되는 상황에서, 인건비는 정확히 지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주어진 조건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고 싶었기에, “무슨 대작을 만들려고 그러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한 달 내내 궁리하는 시간을 보냈다.
김꽃비 배우와 정하담 배우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 몰랐다. 캐스팅에서는 어떤 점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나.
전고운_ 나는 어울릴 줄 알았다. (웃음) 영화와 다르게 내가 원하는 배우와 바로 작업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다른 사람이 옆에서 이 배우는 어떻고 저 배우는 어떻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필요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배우에게 연락했다. 관객 역시 나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독립영화를 좋아하고 꾸준히 봐온 관객이라면 누구나 두 배우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까. 꽃비 배우의 경우에는 내가 봐온 저 사람의 모습을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김꽃비라는 사람이 살아가는 행보가 흥미로웠다.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데도 편안해 보이고, 타인의 시선에 갇히지 않는 모습이 용감하다고 느꼈다. 멋진 사람이라는 걸 알리고 싶었고,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미지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담 배우는 이국적이면서도 에너지가 느껴지는 얼굴이 마음에 들어왔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마스크이고, 특히 무표정할 때 발산하는 힘이 매력적이다. 두 사람과 재밌는 걸 만들어서 보여주면 나처럼 곳곳에 숨어 있는 여자 관객들이 반응하리라 예상했다. (웃음)
배우 입장에서는 어떤 인물을 연기한다기보다는, 평소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는 느낌이다. 사전에 논의하고 연습한 부분이 있다면.
전고운_ 촬영을 준비하며 나만의 콘셉트를 ‘노메이크업, 노브라’로 잡았다. 영상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건 내 방식도 아니라서 보는 사람들이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런 결정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배우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동의를 구했다. 꽃비 배우는 “감독님이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면서 시원하게 반겨줬다. (웃음)
김꽃비_ 맥락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지 루카스 감독이 <스타워즈> 촬영 중 배우 캐리 피셔에게 브래지어를 벗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나. 그 상황에서 감독의 요구는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폭력이 될 수도, 반가운 제안이 될 수도 있다. 일차적으로는 전고운 감독의 의견과 태도에 동의했고, 평소 활동할 때 특별히 문제가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어려운 문제이고 나 역시 여전히 고민하는 중인데, 이번 작업은 반갑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전고운_ 현장에서 해방감을 느꼈던 것 같다. 노메이크업, 노브라 상태로 카메라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홀가분하더라.
<소공녀>로 연을 맺은 이솜 배우가 스타일링에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다.
전고운_ 꽃비 배우의 경우에는 본인이 가진 것들 중에서 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평소 스타일이 좋기도 하고, 내가 상상하는 트레일러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더라. 영화에 큰 배낭이 나오지 않나. 실제로 꽃비 배우가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메고 온 가방인데, 그 모습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웃음) 정하담 배우의 스타일링에는 이솜 배우의 도움이 컸다. 급한 마음에 연락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주문을 했다. “세련되고 공격적이면서, 힙하고 지적인 동시에 유머러스한 옷”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그런 옷 있으면 나도 입고 싶다”더라. (웃음) 그래도 대충 원하는 이미지를 설명하자 바로 이해하면서 사진 여러 장을 보내주었다. 그 중에서 헤어스타일을 찾았다. 당시 이솜 배우가 드라마 촬영으로 굉장히 바쁠 때였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힙한’ 의상을 모아서 큰 박스를 보냈다. 옷뿐만 아니라 신발부터 액세서리까지 꼼꼼히 챙겨줬다. 표현을 못 하는 성격이라 별 말 없이 넘겼는데, 실은 엄청 감동 받았다.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싶다.
<커피와 담배>(짐 자무쉬, 2003)의 오마주인데, 감독 특유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배우들의 춤과 리드미컬한 음악도 잘 어우러진다.
전고운_ 영화과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한다는 짐 자무쉬 오마주 아닌가. (웃음) 춤은 기본적으로 내가 여러 동작을 생각해서 가긴 했지만, 현장에서 배우들이 직접 춰보며 완성했다. 아무리 단순한 동작이라고 해도, 편하지 않으면 몸에 안 붙는다. 실제 현장에서도 음악을 들으며 진행했다. <커피와 담배>에 에스프레소와 연초가 등장한다면, 트레일러에는 위스키를 넣은 에스프레소와 전자담배가 등장한다. 비흡연자는 눈치채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하담 배우는 ‘담배 닦는 춤’을 추고 있는 거다. (웃음) 혹자는 “<소공녀>에서도 그렇게 위스키와 담배 타령하더니, 이제는 하다 하다 담배로 춤을 추는구나”라면서 웃더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여성이 가장 자유롭게 영화를 만날 수 있는 공간 중 하나이다. 그동안 쌓아온 인연만큼 이번 작업이 남다른 의미로 남으리라 생각한다. 트레일러로 올해 가장 많은 관객과 만날 예정인데 소감은 어떤가.
김꽃비_ 제주에서 올라온 김에 최대한 여러 작품을 관람할 계획이다. 여성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이 정말 많지 않나. 영화제 기간 동안 매일 세 편씩 보려고 마음먹었다. 근데 트레일러에 출연한 입장에서 약간 민망하기도 하다. 관객들이 “김꽃비 또 왔어, 오늘 세 번이나 봤어.” 이런 반응일까 봐. (웃음)
전고운_ 스크린에서 본 배우가 객석에 앉아 있다니, 진정한 4D 관람 아닌가. (웃음)
김꽃비_ 살짝 창피하긴 하지만, 그래도 많이 보고 싶다. 기대하는 작품 중 하나는 <박강아름 결혼하다>(연출 박강아름, 2019)라는 다큐멘터리다. 작년에 피치 앤 캐치 행사를 보러 갔다가 알게 된 작품이다. 감독이 결혼한 후에 남편과 함께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는데, 관계 안에서 가부장제의 젠더 반전이 일어난다.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학교에 다니는 감독은 끊임없이 바깥에서 할 일이 있고, 결국 남편이 육아와 가사노동을 전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울증을 겪는 남편이 가출하는 등 여러 갈등이 생긴다. 어떻게 완성되었을지 궁금하다.
정하담_ 트레일러가 공개되고 나서 친구들에게 연락을 많이 받았다. 색다른 모습이어선지 다들 좋아해 주더라. 개인적으로 이번 작업이 무척 만족스럽다. 여성영화제 트레일러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도 기뻤고, 전고운 감독님과 김꽃비 배우님과 함께 작업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트레일러 잘 봤다고 연락해온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같이 영화제 가자”라고 이야기했다. 집도 근처여서 부담 없이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마우스피스>(패트리샤 로제마, 2018)라는 작품이 기대된다. 어떤 영화인지 아는 바는 없지만, 프로그램 북을 살펴보면서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전고운_ 좋아하는 배우들과 함께 작업했고, 내 기준에서 두 배우의 얼굴이 예쁘게 나왔다. 영화제에서 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이 기쁘다. 트레일러의 편하고 유머러스한 느낌이 관객에게 전달되면 좋겠고, 그런 느낌으로 영화제를 즐겨 주시길 바란다. 기대작을 한 편 말하기보다는 일단 아무거나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거의 모든 영화제에서 자막가로 일한 경험이 있다. 그때 영화를 고르지 않고 무분별하게 보는 경험이 되게 중요하단 걸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영화가 왜 좋은지 알아가며 취향이 만들어진다. ‘닥치는 대로’ 영화제를 경험하시면 좋겠다. 아, 그리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자막가로 일하면서 느꼈는데,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재미가 없어도 재밌더라. (웃음)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많이 된다. 부산국제영화제처럼 개봉작이 많지도 않아서, 인상적으로 본 작품을 다시 찾아보기도 힘들다. 정말 귀한 축제다.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리버스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데일리는 영화전문웹진 리버스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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