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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13회(2011) 영화제

여성영화의 확장과 다양화를 꿈꾸다

                                             제1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NAWFF상을 받은 <여행자> 스틸 컷

울국제여성영화제와 대만여성영화제(Women Make Waves Film Festival)는 오랫동안 매년 서로의 영화제에 관계자들을 초청해 오고 있습니다. 지난 10월에도 어김없이 대만여성영화제의 초청을 받아 타이페이에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두 영화제는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알아오면서, 서로를 발전시키는 동력을 만들어 왔습니다. 대만여성영화제는 프로그램 구성이나 전반적인 관점 등에 있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어떤 다른 영화제보다 친근감이 많이 느껴지는 영화제입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제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일하기 전에 배급했던 작품들(<오버 더 레즈보우>, <3xFTM>)이 대만여성영화제에 초청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만여성영화제 출장이 더더욱 반가웠습니다. 사실 이번 출장은 어떤 다른 해보다 의미있는 출장이기도 했습니다. 올 4월 1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그동안의 우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타이페이, 서울, 동경, 첸나이의 여성영화제가 아시아 여성영화제 네트워크(NAWFF, 이하 NAWFF)를 발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17회 대만여성영화제에서 NAWFF 발족의 의의와 활동을 대만여성관객들과 영화관계자들에게 소개하고 NAWFF 상의 첫 수상작인 우니 르콩트 감독의 <여행자>를 상영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상영은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아시아 여성영화가 많은 아시아 지역에 소개될 수 있는 공식적 통로를 발전시키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멘광장에 위치한 레드 하우스(오른쪽 위)
대만여성영화제 상영관(왼쪽 위)
대만여성영화제 트레일러 (좌)

이번 대만여성영화제는 10월 8일~17일 타이페이 시멘딩 지역에 있는 극장
한개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시멘 지역은 서울의 종로와 유사한 특성을 가진 지역으로 일본점령 시기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과 고층빌딩들이 혼재되어있으며 젊은 층의 유동인구가 많은 매력적인 곳이었습니다. 또한 멀티플렉스 극장을 비롯해 아트하우스, 시네마테크 등의 영화시설이 몰려있고, 주말에는 시멘 광장의 레드 하우스(1945년 이후 비밀스럽고도 공공연하게 게이 영화를 상영했던 극장이었으나, 현재는 정부가 시민문화시설로 리모델링 중입니다. 이 주변의 몇몇 골목에는 많은 게이바들이 있습니다) 주변으로 홍대 거리와 유사한 젊은 예술가들의 벼룩시장이 서기도 합니다.


2010년 대만여성영화제는 “신나게 몸을 흔들어라(Rock Your Body)”라는 캐치프레이즈 하에 “뉴커런츠”, “나의 몸, 나의 힘”, “해피 퀴어 투게더”, “사랑하는 엄마에 대한 달콤쌉싸름한 기억”, “청춘의 연대기”, “대만 베스트” 등 6개 섹션으로 나누어 약 60여 편의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역시 모성과 청년세대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올해 대만여성영화제의 주제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모성과 청년세대 문제가 단순히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혹은 전지구적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제의 공유는 필연적으로 연대를 요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올해 대만여성영화제 방문에서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대만여성영화제 관객 및 감독과의 공식적 만남이었습니다. 외람되게도 제가 이번에 상영되는 거의 모든 한국영화들의 상영 후에 진행되는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하여 각 영화의 한국적 맥락과 한국관객들의 반응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번 대만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한국영화로는 NAWFF상 수상작인 <여행자>를 비롯해 현재 88만원 세대를 다룬 <개청춘>, 성폭행 생존자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담아낸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 2010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단편경선 우수상 수상작 <바캉스>, '트랜스미디어스케이프' 섹션에서 상영된 애니메이션 <변신이야기 제16권>이 있었습니다.    


<변신이야기 제16권>(좌)와 <개청춘>(우)의 스틸 컷

영화관 밖에 마련되어 있는 공간에서 거의 약 1시간 가까이 대화가 이어질 정도로 관객들은 진지하고 열정적이었습니다. 특히 대만 극장에서도 이미 개봉된 <여행자>에 대한 반응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주인공 김새론을 비롯한 아역들의 연기가 너무 사실적이라며 혹시 진짜 고아인지를 묻는 관객들도 있었습니다. :-) 해외 입양의 역사적 맥락, 한국의 가족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궁금해 했습니다. 대만 관객들과의 대화가 신나고 재미있었던 것은 일본점령시기, 냉전, 분열된 민족경험 등 두 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사실 때문에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 더 구체적인 대화들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청춘>과의 대화에선 대만 역시 경제성장을 이룬 현 40대와 젊은 세대가 어느 정도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젊은 세대들의 모습에 깊이 공감하며 이런 영화를 만들어서 감사하다는 평가들도 있었고요. 한편 실험적인 애니메이션 <변신이야기 제16권>은 영화감독들과 영화관계자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에 놀라움과 감탄을 쏟아냈습니다. 또 대만의 젊은 영화감독들은 영화제가 비디오 아트나 설치 작품을 받아들임으로써 여성영화를 확장하고 다양화하는 것에 적극적인 동의를 표했습니다. 


<이제 그는 여자다>(좌)와 대만애니메이션 <Flower Fish>(우) 스틸 컷
 
한동안 침체되어있던 대만영화산업은 몇몇 자국 영화들이 흥행을 하면서 르네상스의 신호탄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성감독의 영화는 많은 부분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 대만여성영화제에서도 눈에 띄었던 작품들은 대부분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였습니다. 그 중 <이제 그는 여자다 Now He Is She>는 테크닉은 조금 서툴렀지만 감정적 울림이 있는 단편 다큐였습니다. 결혼한 후에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을 깨닫고 여자로 성전환한 남편과 사는 부인의 이야기였는데,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지만 예전과 같은 관계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그녀가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외로움에 눈물을 흘리던 장면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한편 대만 여성감독들의 애니메이션은 동양적인 화려한 패턴을 활용해 이성간의 섹스, 임신, 성기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작품들이 많아 흥미로웠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때로는 너무 상징성이 두드러지고 과시적이어서 아시아 여성의 성을 지나치게 이미지로서만 소비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대만여성영화제에 참가한 여성영화제 관계자 기념 사진(좌)    
                                                                
이번 대만여성영화제에는 벨기에 브뤼셀여성영화제, 일본 오사카여성영화제의 프로그래머들도 참석해 매일 아침을 함께 먹으면서 여성과 영화계의 현안과 현황, 더 크게는 여성영화제의 존재의의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서구든 아시아든 전 세계의 보수화와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 페미니즘에 대한 역풍이 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성영화제가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에 대해 다들 깊은 고민들이 있는 듯 했습니다. 불안정적 재정이나 조직운영에 대한 갈등과 고민도 매우 컸고요. 여러 상황 때문에 올해 영화제를 열지 못한 오사카 여성영화제의 미키 소코 씨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다른 아시아여성영화제의 희망이자 롤모델이라며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더 잘 되어야만 한다는 말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이제 2회를 맞은 브뤼셀여성영화제는 자국 내 이민공동체 내의 여성문제에 큰 고민을 갖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이민공동체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이민공동체 내의 여성들에 대한 가부장적 태도에 어떻게 개입을 하느냐라는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과 이야기하면서 아직도 여성영화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더욱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여성문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여성영화감독의 비율이 현저히 낮은 점들, 영화계 자본의 여성배제 등등 여성영화제가 필요한 일들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상대적으로 문제가 적을 것 같은 벨기에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소통하고 해결해야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국의 성평등 지수는 2010년 전 세계적으로 104위에 그치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의 '의사결정부문'은 오히려 후퇴하고 있고요. 이것은 아마도 한국영화계에 여성감독들의 비율이 낮은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독은 현장의 최종의사결정자이니까요. 이와 같은 아주 단순한 사실만 보아도 여성영화제의 존재의의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폐막식이 있던 오전 아쉽게 폐막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이번 출장은 한국영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대만관객들, 그리고 다른 여성영화제의 프로그래머들과의 만남을 통해 네트워크와 연대의 힘, 여성영화제의 존재의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뜻 깊은 여행이었습니다.


p.s.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아이틴즈상을 수상했던 <쇼핑몰의 소녀들>의 카시아 로수아니에츠 감독이 대만여성영화제에도 참석했는데요, 현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제작으로 차기작 준비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무척이나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
 

-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