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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13회(2011) 영화제

마스터급 여성감독의 신작이 돋보인 토론토국제영화제


                                            'Eessential Cinema' 부문의 작품이 전시되는 벨 라이트 빌딩 전시관



 

을이 제 색깔을 찾아가는 이맘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도 슬슬 바빠지기 시작한다. 일년 내내 굵직굵직한 영화관련 이벤트들이 이어지지만, 가을 시즌에는 캐나다와 부산에서 대형 국제영화제가 열린다. 올해도 역시 이 두 곳을 찾았다. 북미 최대 규모의 영화제로 자리잡은 토론토 국제영화제(이하 TIFF)는 올해로 35회를 맞이했다. 이번 해에는 영화제 중심장소를 옮겨서 진행되었는데, 메인 스폰서인 벨 Bell이 지은 벨 라이트 Bell Light 빌딩이 새로이 영화제 공간으로 할애되었다. 500석 규모의 최신식 대형극장 3개관과 소극장들, 그리고 전시 공간을 가진 복합상영관이다. 영화제 기간 동안 전시관에서는  ‘Essential Cinema' 부문의 작품들, 아톰 에고이얀 등 유명감독들과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아트웍이 전시되었다. 영화제의 장르 경계 허물기 작업을 지속가능케 하는 영화제의 인프라도 그렇고, 그 극장의 음향이나 디지털 영사 구현은 그야말로 최고수준이어서 살짝 부러운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벨 라이트 빌딩 앞에서 콘서트를 구경하는 사람들                                                          벨 라이트 빌딩 외관

암튼 본론으로 들어가자. 올해 역시 많은 여성감독들의 작품들이 TIFF에 나왔다. 300편 이상의 영화가 마켓에 소개되다 보니 제한된
시간 동안 그 영화들을 쫓아다니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2010년은 ‘여성영화계’가 조금은 숨고르기에 들어간
해가 아닐까 싶다. 최근 몇 년간 눈부신 성장를 보여주었던 신인여성감독들의 작품 수가 상대적으로 줄었고, 다루는 주제나 사유의 방식, 혹은 정서적 톤의 측면에서 어떤 특정한 경향성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준 것은 그간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굳건하게 여성영화의 맥을 이어왔던 마스터급 감독들의 신작이다.
그중 몇몇 작품을 간략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아마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가장 많은 영화가 상영된 감독이며,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저개발국 여성들의 활기찬 투쟁과 연대를 기록해왔던 다큐멘터리스트 킴 론지노토는 올해 카스트 제도와 가부장제의 이중억압으로 고통 받는 인도 여성들의 삶을 담은 <핑크 사리>를 선보였다. 특히 집나온 여성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그들을 돌보며 사회와의 투쟁을 매개하는 소유욕 강한 ‘어머니 인물’이 상당히 흥미롭게 펼쳐진다.
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웬디 앤 루시>를 만들었던 켈리 레이차트의 신작은 의외로 서부극이었다. <미크의 컷오프>(Meek's Cutoff)라는 영화인데 웬디 역을 맡았던 미셸 윌리암스가 이번 작품에서도 주인공이다. <미크의 컷오프>는 완전히 새로운
서부극이다. 잔인한 인디언, 멋진 싱글 남성영웅, 유혹적인 선술집 아낙의 스테레오 타입이나 멋진 장신구 같은 도상들 따위는 이 영화의 디제시스 안에 들어설 틈이 없다. 장대한 서부개척의 역사 대신 방향을 상실하고 표류하는 잘못된 리더십이, 인디언족의 미개함을 압도하는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담은 스펙터클 대신 인디언족의 미신성의 구멍에 의존하는 서구인의 모습을 담은 건조한 스펙터클이 들어선다. 이 영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보다 더 전복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남성영웅의 서부개척 신화를 그 근간부터 흔들어 놓는 여성 인물들의 존재 때문이기도 하다. <웬디 앤 루시>에 이어 <미크의 컷오프>로써, 켈리 레이차트는 철저하게 미국이라는 지정학과 미국 영화사라는 문맥 하에 작업하면서 가장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작품들을 생산하는 감독으로 자림 매김하고 있는 듯 보였다.















                          <미크의 컷오프> 스틸 컷                                                                   <잠자는 미녀>의 스틸 컷


하지만 무엇보다 토론토에서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카트린느 브레야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녀야말로 지금까지 활동하는
가장 강력한 페미니스트 필름메이커라고 생각하고 있다. 작년 베를린 영화제에 <푸른 수염>을 내놓았던 그녀가 올 해 <잠자는 미녀>를
들고 토론토를 찾았다. 요컨대 여성주의 시점으로 써내려간 동시대의 ‘디지털 동화’ 연작인 것이다. 제목은 <잠자는 미녀>이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잠자는 미녀>의 서사를 골간으로 해서 <눈의 여왕>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다른 동화들의 모티브들을 광범위하고
대담하게 참조하고 섞어놓았다. 공간과 시간의 이동 또한 제한 없이 자유롭다. 그런데 영화의 자유분방함과는 대조적으로 극장 안으로
들어선 그녀의 몸은 그렇지 않았다. 뇌졸중 병력의 후유증이 많이 악화돼 보였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지팡이와 진행자의 부축에 의지해
겨우 단상에 올랐다. 어눌하게 느껴지는 말투, 세월의 흔적을 서둘러 새겨 놓은 얼굴은 보는 나를  애잔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회에 대한 참여의식이나 분노의 첨예함은 그대로였다. 예컨대 관객과의 대화중 그녀는 영화에 등장하는 산적소녀(<눈의 여왕>에서
따온)를 짚시로 설정했다면서 최근 프랑스의 짚시 추방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웠던 것은 몸의 부자유함과 사유의 자유분방한 첨예함 간의 간극이 그녀의 새로운 영화에 징후적으로 드러나
보인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녀들에게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동화들을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여
전복적으로 다시 쓰는 그녀의 ‘디지털 여성주의 동화’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많이 여윈듯 보이는 그녀에게 내년 서울국제
여성영화제에서 보자고 이야기를 건넸다. 몇 해 전 크레테이유 여성영화제에서 남인영 집행위원과 만났던 일을 기억하던 그녀는
영화제가 언제냐고 묻고는 “4월에는 신작을 찍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쪼록 그녀의 이 작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서둘러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 권은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