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크리틱]

여성 섹슈얼리티와 로맨스에 대한 탐구_토론토국제영화제의 여성감독들


절기는 가을을 맞이했지만 아직 채 여름의 기운이 가시기 전인 9월 초 토론토국제영화제(이하 토론토영화제)(2011.9.8-18)에 다녀왔다. 북미 최대의 영화제로 올해 36회째를 맞이하는 토론토영화제에서는 총 65개 국가의 336개 작품이 소개되었다. 거장들의 작품이 다수 포진되었던 올해 토론토영화제에서는 샹탈 아커만 Chantal Akerman, 허안화 Ann Hui, 아그네츠카 홀란드 Agnieszka Holland, 레아 풀 Lea Pool 등 유명 여성감독들의 영화와 함께 사라 폴리 Sarah Polly, 마돈나 Madonna와 같은 세계적인 여배우들이 감독한 작품들 또한 상영되면서 큰 관심을 모았다. 여성감독들의 장편 영화만 계산했을 때 50편정도 상영되었는데, 전체 300편 이상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여성감독의 작품수가 여전히 미미한 편이지만 두 명의 프로그래머가 그 영화들을 모두 소화하기 위해서는 영화제 기간 내내 분주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시계 방향으로) 벨 라이트 극장 영화를 보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벨 라이트 극장 외부, 토론토영화제 메인거리 풍경,
스코티아 뱅크 극장 내부


 

거장 여성감독들의 작품과 대형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여성감독의 영화들이 다양하게 포진된 가운데 여성 섹슈얼리티와 이성애 로맨스의 불/가능성을 탐색한 작품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여성 섹슈얼리티와 이성애 로맨스를 탐구한 작품들은 대체로 서구 여성감독들의 작품이었는데, <엘르 Elles>(사진)(마우코시카 슈모프스카 Malgoska Szumowska)에서는 줄리엣 비노쉬 Juliette Binoche가 대학생 성매매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성매매 여성들과 만나는 잡지사 기자 앤 Anne을 연기했다. 앤은 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매매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 존재하는 중산계급의 현실을 대면하게 된다. 자유로운 성적실험과 욕망추구에 대한 담론이 후퇴한 가운데, 일부일처제 구도 속에서 중산계급 여성들은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발화할 수 없는 탈성애화된 존재가 되어가고, 가난한, 이주해온 젊은 여성들은 비대해진 성산업 구조 속에서 성적으로 착취당하며 과잉성애화된다. 줄리아 리 Julia Leigh 감독의 <슬리핑 뷰티 Sleeping Beauty>는 동화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성애화된 버전으로 전형적인 이성애 로맨스 판타지를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현실에 대한 잔혹 동화로 옮겨왔다.

사라 폴리의 <테이크 디스 왈츠 Take This Waltz>(사진), 마돈나의 <W.E.W.E.>, 안느 퐁텐 Anne Fontaine의 <마이 워스트 나이트메어 My Worst Nightmare> 등은 이성애적 일대일 관계 속에서 로맨스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이 작품들은 외견상으로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규범적 일대일 관계 속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권태감과 소통 불가능성에 집중함으로써, 이성애 로맨스의 불가능성을 외면화 한다. 그러나 극중 여성인물들이 다른 남성을 욕망하는 것으로 깨어진 로맨스 판타지를 다른 로맨스로 대체하려 하는 것처럼, 이 작품의 여성감독들은 영화 속에서 이성애 로맨스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면서도 여전히 그 로맨스의 가능성을 붙잡고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외에도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고자 하는 이성애 커플의 실험, 준비되지 않은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여성의 심리 변화 등 모성을 둘러싼 이슈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 가속화되는 전지구화 속에서 인종적, 계급적 갈등을 그리고 있는 극영화, 패션업계 속 여성의 삶, 유방암이라는 여성 질병과 이를 둘러싼 캠페인을 다룬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경향의 작품들이 상영되었다. 이 가운데 몇몇 작품을 간략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캐나다가 배출한 세계적 여성감독인 레아 풀 Lea Pool이 처음으로 선보인 장편 다큐멘터리 작품 <핑크 리본 주식회사 Pink Ribbons, Inc.>(사진)는 유방암 캠페인을 둘러싼 논쟁적인 이슈를 제기한다. 유방암 캠페인은 여성질병으로서 유방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유방암을 앓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위한 커뮤니티 운동으로 출발했지만, 거대 상업자본이 결합되면서 이 캠페인은 점차 상업적 홍보의 각축장이 되었다. 캠페인의 초점 또한 ‘유방암을 어떻게 예방하고 치유할 것인가’가 아닌 ‘얼마나 많은 기금을 모았는가’에 맞춰지면서 여성 질병에 대한 원인 규명과 치료 및 여성들에 대한 지원이라는 취지와는 멀어져버렸다. 레아 풀의 이 다큐멘터리는 오늘날 북미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유방암 캠페인의 친자본화 경향과 미디어 재현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여성질병을 둘러싼 담론의 방향성을 재조정할 것을 요구한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스펙트럼 부문에서 <수취인불명 Address Unknown>(2006)을 통해 소개된 궈 샤오루 Xiaolu Guo 감독은 신작 <그녀가 본 유에프오 UFO in her Eyes>(사진)로 토론토를 찾았다. 세계화 속 중국의 현재를 독특한 시선으로 포착해온 궈 샤오루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세계화와 개발의 열풍이 불어 닥친 중국 변방 지역의 현실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이 작품에서 아이러니하게 묘사된 지역 현실은 우스꽝스러운 우화이자, 씁쓸한 시대에 대한 조롱이며, 세계화의 광풍 속에서 농촌과 노동 계급, 여성이 착취되는 방식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보여준다.

  

(좌) 각 영화제 리플렛이 보이는 홍보부스. 아시아 단편경선 리플렛도 보인다
(우) 토론토영화제 영화 광고판


영화관계자들을 위한 전용상영인 인더스트리얼 스크리닝이 열리는 벨 라이트 Bell Light 극장과 스코티아 뱅크 극장 Scotia Bank Theater을 바쁘게 오가다보니 10일간의 출장기간이 훌쩍 지나갔다. 영화제 기간 동안 토론토에서 만난 현지의 영화학자 한 분이 토론토영화제가 점점 더 대작 중심의 프로그래밍과 유명 연예인을 모셔와 전시하는 이벤트에 몰두하면서 프로그래밍의 참신함과 전문성이 떨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던 기억이 난다. 토론토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가운데 대작 중심의 대중적인 작품들이 많았다는 측면에서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모든 대작들을 한 영화제에서 모아 볼 수 있다는 점이 또한 토론토영화제의 매력이라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아울러 실험영화를 소개하는 섹션을 지속적으로 마련해온 노력이나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갤러리나 외부로 오픈된 공간에서 미디어아트, 설치 미술 등을 영화제와 접목하여 상영 및 전시함으로써 영화라는 경계를 확장하고 해체해가는 시도들은 눈여겨볼만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며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 글에 소개한 영화들이 1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관객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 홍소인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