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치 못한 세상에서 스크린을 환히 비출 수 있도록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스탭들이 영화제의 청사진을 그려나가기 시작하는 1월입니다. 지난 11월,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새 프로그래머를 맞이하였습니다. 영화제 준비로 바쁜 와중이라지만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지나간 것이 서운하여 새 프로그래머님께 관객분들께 드릴 인사말과 함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의 각오말씀을 부탁드렸습니다. 불씨를 키워 스크린을 빛나게 만드는 요정 할머니가 되고 싶으시다는 이안 프로그래머님의 말씀, 기억해두셨겠지요? 관객분들이 5월 느지막히 시작할 제1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더욱 부푼 마음으로 기다려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인사가 예사롭지 않은 시절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아끼고, 지키고, 키워 오신 분들에게 첫인사 드리는 마음이 새삼스럽습니다. 학생도, 학습지 교사도, 청소부 아주머니도, 의사도, 환자도, 대형 마트 계산대에 선 노동자도, 평생 씨 뿌리고 밭 매던 밀양 할머니도, 하다못해 길고양이까지도 안녕하지 않은 세상에서 영화판만 고단하다고 유난 떨 일은 아니겠지요.
팍팍하고 험한 영화판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여기가 내 개똥밭이려니 하며 지내왔습니다. 제작현장에서 영수증 맞추느라 머리 싸매기도 했고, 영화와 대중 사이에 다리를 놓는 글쟁이 노릇도 했고, 배운 영화 공부 젊은 친구들과 나누러 강단에 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찬바람 불기 시작하던 어름, 손 내밀며 이름 불러주는 자리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였고 그 손 냉큼 잡았습니다.
여러분이 덥혀 놓으신 자리에서 뒹굴거리며 불이나 쬐고 몸이나 녹이라고 찾으신 게 아니라 그 불 꺼뜨리지 말고 계속 활활 지펴내러 땀 좀 흘려보라고 부르신 줄 압니다. 굳은 몸 충분히 녹이고 꼼지락거리며 몸 푼 다음 움직일 여유 없이 바깥 추운 시절인 것도 압니다. 이 어둡고 서늘한 세상에서 지금까지 힘 되고, 밥 되고, 꿈 되는 영화를 스크린에 비춰온 그 불씨가 참 무겁고도 뜨겁습니다.
사진: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 풍경
지금까지 이 든든한 축제를 찾아와 힘도 얻고, 밥도 먹고, 꿈도 꾸던 행복한 관객이었습니다. 처음 찾았던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전장의 총성이 멎은 다음부터 생존과 자존을 걸고 삶 자체가 전쟁이 된 <미망인>을 만났고, 그 끝나지 않은 전쟁을 아이 둘러 업고 치러낸 박남옥 감독을 알았습니다. 후끈했습니다. 그 열기가 열다섯 해를 지나도록 새록새록 뜨거워지고, 최초니 두 번째니 헤아리는 게 무상할 만큼 세계 곳곳의 수많은 여성 감독, 영화인, 작품들을 이 축제를 통해 만나왔습니다. 이제 그 만남을 위해 자리 펴는데 굼뜬 손 보태게 되니 정말 벅찹니다.
사진: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 개막작 <미망인> 스틸
귀한 불씨 살리려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재투성이로 험하게 구르기도 하겠지만, 영화제에서 작품들 환하게 스크린에 비추며 여성 영화인들 모두가 주인공으로 빛나도록 불씨 살리는 요정 할머니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흐뭇할까요? 그날까지 여러분 모두 안녕들하시기를, 우리 함께 안녕할 수 있는 세상을 이루기를, 영화가 그 세상을 비춰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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