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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젠더화 된 관객과 공공영역의 여성화

젠더화 된 관객과 공공영역의 여성화


 

                                       (사진 : 제1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네 여자의 수다> GV)


역사적이고 젠더적인 관객


90
년대 말 민족-남성의 위기와 재남성화 과정에서 관객은 일시적으로 남성화 되었다. 김소영은 <사라지는 남한 여성들: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무의식적 광학
>[i]에서 IMF 전후 글로벌 금융자본의 유입과 노동시장 유연화에 따른 민족-국가-남성의 공고한 결합이 흔들리며 발생하는 다이내믹들을 기민하게 포착하고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스크린상의 젠더 재현을 추적하였다. 이 때 관객들은 (그 인구학적 성별과 관계없이) 남성화되었다. 스크린과 관객성을 당대의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 동안 무성화된 존재였던한국관객의 역사에 젠더화를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이 글은 한국영화 비평사에 큰 의의를 지닌다. 김소영은 이 글에서 새로 도래한 한국영화 황금기인 90년대의 한국영화남성화를 논의하기에 앞서 그 이전 황금기 60년대 한국영화의 주요 관객들은고무신 부대’, ’손수건 관객이라고 불리 우며 (당대의 한국영화처럼)
폄하 받던 여성들이었음을 지적한다.

당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거대한 성공과 더불어 억압된 것처럼 보이는 여성화된 영화 관람[ii]은 스폰지 하우스로 대표되는 단관 개봉관들의 부상과 함께 귀환한다. 멀티플렉스와 블록버스터, 한국영화 돌풍으로 대표되는 90년대 말 2000년대 초의 상황에서 동숭 아트센터, 코아 아트홀로 대표되는 기존 아트하우스의 몰락은 잠시 예술/인디 영화관의 공동화 현상을 만들어 내지만 곧 스폰지 하우스, 씨네큐브, 상상마당 시네마 그리고 이후 CGV 무비꼴라쥬와 같은 새로운 공간이 부상하고 관객들의 면모도 새로워진다. 그리고 새로운 아트하우스들의 관객들은 종종 ‘2-30대 싱글 여성으로 등치 되어 생각되기 시작한다. 90년대 아트하우스들의 관객들은 특별히 젠더적으로 형상되지는 않았지만 (일반화의 위험을 무릎 쓰고) 그 무성화된 대표 이미지들을 추적해 본다면 영화 감독/평론가 등 예술가 지망생 (남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아트 하우스에는 영화를예술보다는 취향과 취미로 대하는 여성관객들이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녀들은 무성화된 존재로 그저 기특한 예술영화 관객들로 생각되거나 골드미스류의 담론과 더불어 소비의 주체로 찬양되기도 했다. 한편 새로운 아트하우스들의 초기 성공 프로그램들이 소규모 일본영화들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초점을 맞추어 비판적 의미로일류에 대해 경각심을 높이는 일간지 기사나일본 영화를 잘 못 이해하고 있다는 식의 한국 시네필들의 툴툴거림 속에서 관객이 주로여성이라는 것은 동시에 폄하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반갑게도  일본이나인디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한국사회의 표면화된 젠더 갈등 증가와 여성의 문화실천 맥락에서 이 새로운 아트하우스 관객성을 조명한 박미영의 <일본 인디영화 수용을 통해 본 한국 여성관객의 문화 정체성 : ()스폰지이엔티의 팬덤문화를 중심으로>와 같은 논문들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일본 인디 영화들은 아트하우스의 주력 프로그램으로는 시들해졌고 <워낭소리>, <똥파리> 같은 여성관객 현상이라고 보기 힘든 히트인디 영화도 나왔지만 여전히 주류 아트하우스 영화관객은 여성이다.[iii]

 

공공영역의 여성화와 페미니즘 비평

 

극장뿐 아니라 많은 (남성적) 공공영역들이여성화(feminized)’ 되고 있다. 스폰지 영화를 좋아하는 여성들에게 일본영화를 제대로 모른다고 훈계하거나 스타벅스(에 가는 여성)에 대한 혐오감, 촛불집회 때 유모차 부대에 대한 찬양, 인터넷 방송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 연출자 김용민의 나꼼수 여성 팬덤과 관련한 논란
[iv] 은 사실 공공영역들의 여성화와 그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이라는 맥락에서 살펴져야 할 것이다.

까페가 여성적 공간이 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고 그래서 종종 밥값만큼 비싼 커피값’, ‘멀쩡한 도서관 놔두고등등의 레토릭과 결합하여 여성혐오를 드러내는데 이용되곤 하지만 사실 커피를 마시는 공간은 오랫동안 남성의 공간이었다. 할 일없이 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글을 쓰거나 오고 가는 사람과 농담을 주고 받는 것은 남성 지식인의 문화였던 것이다. 보통 이러한 여성의 공공영역의 진출은 초기부터 남성들에게 배척 받는 것은 아니다. “여자들도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오고 해서 깨어나라는 것 역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남성들의 혐오적 언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공공영역 진출은 공공영역의 남성화에 기여한다고 평가 될 때, 혹은 남성의 언어로 통제 가능할 때만 인정된다. 촛불집회 여성의 참여는어머니라는 레이블을 붙일 때만 남성 일반에게 이해가 된다. 당시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여성들 중 수 많은 비혼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MB•한나라 정서 진원지 추적하니… ‘30대 여성’” 이라는 주간경향의 분석기사는 기사 중간 언급된 수 많은 비혼 여성들을 무시하고서 혹은 그녀들을 예비 엄마로 규정하고서야 30대 여성들에게 눈에 띄게 나타나는 반정권 정서의 이유를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으로 규정한다. 혹은 소비자역시 여성들이 문화적정치적으로 구별되는 행보를 보일 때 자주 따라 붙는 레이블이다.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특별히 더 소고기 소비자인가와 별 상관없이 소비자가 되었을 때 여성의 욕망은 이해 받을 수 있다. ‘어머니소비자가 아니라면 정치적 욕망을 지닌 여성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이 없다. 새로운 아트하우스의 관객들도 성비로는 여성이 우위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씨네필 문화에서 환영 받는 거장/예술 영화 감독들을 좋아하고 영화를 취미의 대상으로보다는 숭배의 대상으로 봤다면 폄하가 덜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관객의 여성인구수와 상관없이 예술영화의 관객은 여전히 무성화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마치 현재 나꼼수의 팬덤이 기본적으로 남성적 언어의 담론이 리드하는 가운데 굳이 성별화 되지 않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새로운 아트하우스의 관객들은 기존의 아트하우스 관객들이나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에 경외심을 갖지 않았고 독자적인 취향과 관람문화를 고수하자 이 여성들의 영화관람은 문화적으로 진지하게 고려되기 보다 새로운 소비 문화로 이해되었다.

사실 공공영역들의 여성화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여성이 인간임을 주장한 이래로 패턴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은 페미니즘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실, 페미니즘으로 논의하기 어려운 문제는공공영역의 여성화그 자체이다. 아트하우스 관객의 여성화를 페미니즘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이러한 현상에 어떻게 비평적으로 개입할 수 있을까. 아트하우스 관객뿐 아니라 전반적인 문화와 정치실천의 장이 여성화되는 것이 한편의 사실이라면 이러한 상황과 페미니즘은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타니아 모들레스키는 90년대 초 포스트-페미니즘을 비판하며 (공공영역의) ‘여성화페미니즘을 분리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v] 하지만 당시 그녀의 주장에는 당시 서구에서 여성화에 대한 강조가 “‘페미니즘이 충분히 완성되었기 때문에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근거로 쓰였기 때문이라는 맥락이 있었다. 지금의 현상은 조금 더 다른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현재 목격되고 있는 공공영역의 여성화 경향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포섭해서는 안되지만 페미니즘과 분리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현재 나꼼수를 대표하고 있는 남성적인 언어들이 여성 팬덤 안의 욕망들을 역시 대변하고 있는지, 아니면 남성적인 언어와의 불화를 용인, 혹은 예비한 채 그 팬덤 안의 어떤 다른 즐거움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현재 남한 사회에 너무나 강력한 이데올로기 효과인 단 하나의 전선(올해 4월과 12월을 예비하는)을 위한 것인지를 탐구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페미니즘은 직무유기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2000년대 아트하우스라고 하는 공공영역이 여성화되고 있다면 그것을 추동하는 젠더 역동성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 볼 수 있는 페미니즘 영화 비평 역시 요구된다.


- 황미요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주석]

[i]  김소영 편저, <<한국형 블록버스터: 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2001, 현실문화연구) 수록

[ii] TV와 다른 하위문화로 범위를 넓힌다면 다른 관찰들이 발견되겠지만 일단 극장 영화 관람으로 한정한다면

[iii] 최근 아트하우스 관객의 여성화 현상은 굳이 표본조사를 하지 않을 만큼 명백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글을 쓰면서 위 언급된 극장 중 한 곳의 근무자와 인터뷰를 하였다. 남녀 성비는 2:8, 남성들은 혼자 오는 경우가 많지 않은 반면 전체 여성 관객 중 혼자 관람의 비율은 6할 정도라고 한다.

[iv] 인터넷 라디오 방송나는 꼼수다의 연출과 편집자인 김용민씨가 <인물과 사상>의 인터뷰에서나는 꼼수다콘서트 참여자 중 여성이 많은 현상에 대한 다음의 언급이 많은 여성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트위터를 소개 발언을 사과했다. 다음은 나는 꼼수다콘서트 관객에 대한 <인물과 사상>의 질문에 대한 김용민의 답변이다.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팬 사인회 때 보니까 20~30대 여성이 가장 많더군요. 이제 정치에 눈을 뜨기 시작한 거죠. 정치가 남성의 영역이고 또 재미없고 굉장히 복잡할 줄 알았는데 나꼼수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진 겁니다. 정치도 알고 보면 생활의 영역이고 욕망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한마디로 만만해진 거죠. 이 생활의 스트레스가 결국 정치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면서 비로소 행동하게 된 것이죠. 아주 좋은 흐름이라고 봐요. 이 거대한 물결을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인터뷰: 김용민(PD): 청춘, 나꼼수로 정치와 소통하다.’, <인물과 사상> 2011 11월호

[v] Tania Modleski,, "Postmortem on Postmodernism", Feminism Without Women: Culture and Criticism in a Postfeminist Age. New York: Routledge,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