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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SIWFF]

일과 삶, 재미가 있는 공간_F포라 세토모임 후기

                                                               (사진 : <길 위의 미술관> 작가 제미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살기를 누구나 원한다.
그 둘이 일치하면 정말 행복한 사람이리라. 살다 보면 한 가지 일을 오래 사랑하기도 어렵지만, 새로운 일을 덥석 시작하기도 막상 쉽지 않다. 게다가 그 일로 먹고살기란 또 얼마나 힘든가? F포라 11월 세토 모임, [일과 삶, 재미가 있는 공간: 광화문과 부암동의 여성문화예술인 탐방]은 이렇게 희귀한 여자들을 만나 서로 기를 주고받는 자리였다.

11시 통의동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에서 커피 한 잔, 12시 한식집 고래(古來)에서 점심, 1시 제미란의 스튜디오 meilan에서 담소하는 일정으로 짜였다. 회원과 동네 지인들 합쳐서 열 분이 함께 했다.
 

 

아직은 서로 낯선 일행끼리 인사를 나누며 류가헌(사진) 앞에 당도하니 산에서 막 내려온 듯 보이는 남자가 열심히 골목을 쓸고 있었다. 박미경 관장의 남편이자 사진작가 이한구다. 류가헌은 사진과 연관된 일을 하는 몇 사람이 함께 꾸려가는 공간이다. 평소 개방하지 않는 안채까지 두루 구경했다. 한옥을 두 채 개조해서 한 쪽은 전시장, 다른 한쪽은 작은 카페와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카페는 사진하는 이들에게 사랑방 구실도 한다. 필자는 다큐멘타리 사진작가 한금선을 여기서 소개받아 강연을 기획한 적이 있다. 박미경 관장이 글을 쓰고 아트디렉터 아네스 박이 편집해서 무크지와 책을 내기도 한다. 박미경 관장은 대표 노릇뿐만 아니라 전화 받기에서 차 만들기까지 하는 멀티 플레이어란다. 지리산에서 왔다는 꽃차 향내가 어찌나 좋은지 다들 카페 언저리를 떠나지 못했다. 이갑철의 <가을에> 전시에는 시골운동회 사진이 걸려있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서명선 회원은 떠나기를 무척 아쉬워했다. 

통의동 우체국 뒤편 고래에 도착해서 뜨뜻한 방바닥을 차지하고 앉았다. 화초를 예쁘게 가꾼 마당 한쪽에서 가마솥이 설설 끓고 있었다. 수육과 탕을 주문했지만 나물과 김치, 전이 푸짐하게 딸려 나와서 채식을 즐겨 하는 변재란 회원도 먹을 게 있었다. 푸근한 마음으로 내주는 음식을 먹으면 속이 따뜻해진다. 20여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며 한결같은 음식을 내서 손님과 식구들을 배부르게 먹인 여사장님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듣고 싶었지만, 토요일 오후라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마지막 방문지는 제미란의 스튜디오 meilan.(사진 우) 재주 많은 여자 제미란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마지막 편집자이자 아트 디렉터였다. 여러 해전 ‘주부도 안식년이 필요하다’는 선언을 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작년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미술가 14인 평전 [나는 치명적이다](아트북스, 2010)(사진 좌)을 펴냈다. 옛 하림각 옆 효자바둑 2층에 자리 잡은 meilan은 제미란의 작업실이자 강의실, 사랑방이다. 예약을 하면 와인 바로도 변했다. 마치 밥상도 되었다가 책상도 되는 둥근 소반처럼... 최근 집중하는 작업은 도자기와 옷 만들기로 보였다. 어느 날 잠이 쏟아져서 한 없이 자다가 일어나면 먹고 또 자는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몸무게가 놀랄 만큼 불어나 몸에 맞는 옷이 하나도 없어졌다. 옷을 새로 사려다가 그냥 자신이 직접 만들기로 했단다. 우리는 그런 용감한 생각도 할 수 있구나 감탄하다가 호주에서 전시회하려고 만들어 놓았다는 옷을 돌아가며 입어보았다. 제미란표 옷은 재질이며 디자인이 예사롭지 않다. 사진 찍는 손청이 마음에 드는 코트를 찾았다. 다른 사람에게 어색한 옷이 누구에게는 저렇게 잘 어울릴까? 옷을 잘 입으려면 입는 사람이 옷의 기운에 눌리지 않고 버텨줘야 가능하다고 제미란은 조언했다. 제미란은 참여연대에서 [스타일링 워크숍 : 시장에서 파티까지, 내가 주인이 되는 옷] 강좌도 진행하고 있다.

F포라의 세토모임은 매월 세 번째 토요일에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진행하는 모임이다. 세상에는 숨어있는 고수들이 정말 많다. 그분들과 만나 얘기를 듣다보면 내 문제가 더 명료하게 보이기도 하고, 혹은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열심히 활약하는 F포라 회원들의 풍요로운 자산을 엮어주는 세토모임이 지속되길 기대해본다.

- 글 : 이남희 (F포라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