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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나의 데뷔작 <공처가>의 여배우, 백금녀

나의 데뷔작 <공처가>의 여배우, 백금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3탄 백금녀 

 

 

한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백금녀를 여배우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코미디언이라고 아는 이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1958년 나의 데뷔작 <공처가>에서 발탁되어 주연을 했으니 분명히 여배우로 출발했다.


  그 무렵 충무로에는 담배 연기와 사람으로 가득 찬 다방 하나가 있었다. 스타다방, 그곳이 영화인들의 대합실이었다. 나는 거기서 여러 사람을 만나며 배우를 찾고 있었다. 육군대위 계급장을 붙인 현역 장교가 배우를 찾고 있었다는 설명이 약간은 필요할 것 같다


   ▲ <사격장의 아이들>의 백금녀 ©한국영상자료원

 

6.25가 나던 50년 가을 나는 스물 두 살에 징집이 되어 서울에서 남행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그리고 동대신동 어느 국민학교에서 머리를 빡빡 깎고 졸병이 되었다. 전세는 일진일퇴, 나는 통신교육을 받고 어떤 보급부대에 배속되었다. 언덕 위 기지에서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몇 달을 지냈다. 이때 행운의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영어통역장교 모집공고가 나왔고 나는 시험관 미군 장교와 몇 마디 회화를 끝내고 합격 판정을 받았다. 일주일쯤 장교 훈련을 받고 중위 계급장을 달았다. 그리고 앵무새가 그려진 병과 배지도 달았는데 이때부터 나는 영어 때문에 고난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앵무새처럼 말만 충실하게 옮기라는 통역장교지만 외국어는 말하기도 알아듣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작전권을 쥔 미군과 한국군 사이에서 생사를 가늠하는 중대한 통역을 빠르고 정확하게 행사한다는 것은 일선에서 총칼을 쥔 병사들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구 통신부대, 부산 제3부두, 한라산 중계소에서 수치와 굴욕, 그리고 미군들과 절대절명의 3년간을 복무하면서 헬로 오케이를 겨우 마스터했다. 내가 서울로 돌아와 국방부 정훈국에 배속된 것은 전적으로 은사의 배려 때문이었으며 내 소질을 살려 영화과에서 일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때부터 나는 영어를 버리고 영화의 볼모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영화란 반이 창작이고 나머지 반은 기술이다. 촬영, 조명, 현상, 편집, 녹음, 어느 하나 기술과 무관한 것이 없다. 그 테크놀로지를 활용해서 연출이 가능하지만 이때나 저때나 모든 것을 기술자에게 일임하는 무책임한 감독이 많다. 나는 1년 만에 모든 과정을 이수하고 드디어 단편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대한 지 8년 만에 고려영화사 김보철 사장이 시나리오 한 권을 내밀며 감독을 요청했다. 당시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인 선우휘 과장(대령)은 군영화의 발전을 위해 기회를 살리라고 고무했다.


 

그때 백금녀는 한복을 입어서 더 뚱뚱해 보였으며 목소리는 탁하고 말이 어눌했다. 갸우뚱거리는 나에게 제작자는 사뭇 위압적으로 밀어붙였다. 카메라 앞에서의 백금녀는 의외로 감독 말을 잘 이해했고, 운동신경이 빨라 연기도 잘 되었다. 공연한 구봉서, 장소팔, 박응수, 김영미도 거의 신인이었는데 감독은 이들을 데리고 두 달 동안 진땀을 흘렸다. 촬영이 끝나고 소위 쫑파티를 할 때 여배우가 불참해서 집으로 가보니 간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백금녀가 임신한 것을 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니! 그녀는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그 무거운 몸을 바람같이 날리며 액션을 잘하던 여배우의 얼굴이 처참하게 떠올랐다. 래 내가 너의 예명을 지어주마, 부자가 되는 이름이 뭘까? 그녀의 본명은 여배우 이름으로는 가당찮은 김정분. 백금녀(白金女)로 하자, 얼굴이 널리 알려지고 돈 많은 여자가 되어라. 그 후 백금녀는 소원을 풀어 유명해졌고 윤택해졌다. 나는 배우들의 예명을 속속 만들게 되었다. 남정임, 홍세미, 금보라, 강석우 등 30여 명은 내가 지은 이름이며 그들은 모다 이름값은 한 배우들이 되었다.

    

 

 

   

글: 김수용 감독


 

백금녀 1931-1995년 경성여상 졸업 후, 청춘극장, 황금좌 등에서 연기를 하다가 1958년 김수용 감독의 <공처가>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 이후 희극배우 서영춘과 콤비를 이뤄 큰 인기를 얻음. 60년대 중반에는 영화를 비롯한, 수많은 무대, 만담음반 등 활발한 활동과 함께 재일교포들의 위문공연, 순회공연 등을 함. 1964년에는 박노식과 함께 악극재건을 목표로 '11인 백합회'를 결성하기도 함.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