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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청초했던 여대생 무드는 간 데 없네, 엄앵란

청초했던 여대생 무드는 간 데 없네, 엄앵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0탄 엄앵란 

 

 

한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지난주 엄앵란을 영상자료원에서 만났다. 그곳에서 신상옥 감독 8주기 행사가 있었는데, 80여 명의 사람들 중에 여배우는 한 사람뿐이었다.  글쎄, 나를 영화인 취급을 하지 않아요. 부산영화제에서는 핸드 프린팅도 빼놨어요.” 수십 년 만에 만난 첫인사였다. 부산 광복동 거리에 영화인들의 손도장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누락했다는 말이다. “방송인으로 아는 모양이지하고 새삼스럽게 여배우를 쳐다보았다. 연분홍 윗도리에 곱게 화장한 얼굴이 분명 엄앵란이었지만 아무리 보아도 스크린을 누비던 청춘 스타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구름은 흘러도>(1959)의 엄앵란 ©한국영상자료원. 조희문 기증

 

엄앵란의 본명은 엄인기. 그녀가 여고 시절에 내 영화에 출연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60년 전 일이다. 군영화 <윤중사의 수기>에 어머니 노재신과 함께 나왔는데 갓 피어난 코스모스 꽃처럼 청초했었다. <단종애사>에서 앵란이란 예명으로 데뷔한 그녀를 소위 청춘 영화의 주인공으로 맞이한 것은 그 후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1960년 신필름에서 제작한 <돌아온 사나이>는 앵란이 처음 나의 극영화에 출연한 작품인데, 그때 신성일은 아직 배우가 아니고 신필름에서 기거하는 배우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시나리오를 구해다가 대사를 암송하고 오토바이 운전 등 엄앵란 대역을 눈물겹게 준비하고 있었다. 제작자 신상옥은 무명인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남양일을 캐스팅했다. 신성일이 배우가 되어 엄앵란과 콤비로 팔리기 시작한 63, 나는 <청춘교실>을 만들었는데 그때 촬영이 몹시 즐거웠다. 배우라는 개념 없이 한 그룹의 대학생들과 일상생활을 하듯 자유분방하게 드라마를 펼쳐나갔는데, 남미리, 손미희자 등이 공연했다. 사람들은 청춘 영화가 등장했다고 떠들기 시작했고 스크린엔 젊은 배우들이 등장하고 극장에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 후 나는 주로 두 사람 영화를 즐겁게 만들었는데, 엄앵란은 늘 예의 바르고 영리한 아가씨였다. 65 <적자인생>을 촬영할 때 그들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워커힐 식장에는 수천 명이 아우성을 쳤다. 나는 신랑의 도움으로 비상구를 통해 들어간 기억이 난다. 물론 신랑 신부는 신혼여행도 취소하고 다음 날부터 촬영장에 끌려나갔다. <적자인생>은 개봉 일이 다가와 명동성당 앞에서 마무리 촬영을 서둘렀는데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쏟아지는 겨울비 속에서 부둥켜 안는 두 사람은 시나리오의 대사가 아닌 다른 말들로 다투다가 드디어 여배우가 울면서 뛰어나갔다. 스태프는 영문도 모르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는데 그날 밤 배우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결혼한 후의 신부의 수입을 놓고 양가에서 대립했었다는 뒷소문을 들었을 따름이다. 엄앵란의 청춘 영화와 김지미의 멜로 드라마는 그때의 한국영화의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여배우의 연령에 구애를 받지 않는 김지미는 더욱 번성해 갔지만 청초한 엄앵란 무드의 영화는 점점 시들어갔고 다음 세대의 남정임·문희·윤정희를 찾게 되었다.

 

 

 

한때 엄앵란 집에서는 나를 친정어머니라고 부른 일이 있었다. 밤낮으로 촬영장에서 사는 딸이 불안해 따뜻하게 돌봐주는 사람이 필요했었다. 나는 어느 정도 그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했으며 신성일까지 나를 그렇게 불렀다. , 그러나 세월의 화살이 그렇게 빠른 줄을 누가 알았을까! 그 검고 반들거리던 아름다운 머리가 지금 쑥대머리처럼 엉클어진 신성일과 엄앵란의 가정을 많은 사람이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엄앵란을 믿는다. 그녀의 아름답고 깊은 심덕은 한때 우리 영화의 여주인공답게 슬기롭고 현명하게 모든 것을 잘 처리해 나갈 것을.

    

   

글: 김수용 감독


엄앵란 1936년 서울 출생. 숙명여대 가정과 졸업. 대중음악가인 엄재근과 배우 노재신 사이에서 태어난 엄앵란은 학사 여배우 1호로서도 화제가 되었고, 지적이고 청초한 이미지의 여대생 역할을 단골로 했다. 70년대 초반까지 160여 편의 영화에 출연.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