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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2015 IWFFIS 상영작 미리보기] 김동명 감독 <거짓말>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매년 동시대 가장 중요한 여성감독들의 영화를 만나볼 수 있는 ‘뉴 커런츠’ 섹션을 비롯해서 여성주의의 쟁점을 다룬 ‘쟁점’ 섹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섹션들을 통해 약 100편 이상의 영화들을 선보이고 있다. 2015년 영화제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프로그래밍을 진행하고 있는 지금, "2015 IWFFIS 상영작 미리보기" 코너를 통해 다가올 영화제에서 만나볼 수 있는 영화들을 선별하여 미리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관객들에게 영화제 가이드 맵의 역할을 하게 함과 동시에 여성영화 비평의 관점에서 좀더 깊숙히 영화를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그 첫 순서로 소개할 영화는 김동명 감독의 <거짓말>이다.





'부정적인/의' 여성성과 <거짓말> 






       

  

영화 <거짓말>은 많은 맥락과 참조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다의적인 영화이며, 여성주의 영화비평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논쟁적이고, 동시대 여성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다. 아주 긴 글을 기꺼이 쓰고 싶게 만들 만큼 자극과 영감의 원천이 되는 영화지만, 이 코너에서는 <거짓말>(김동명, 2014)이 여성영화비평에 야기한 새로운 도발과 논쟁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나마 간략하게 이 영화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날 많은 여성감독들이 드잡이하고 있는 괴물은 ‘여성성’이라는 괴물이다. 카트린 브레이야 감독의 <어뷰스 오브 위크니스>(Abuse of Weakness)에서 멜라니 롤랑 감독의 <브리드>(Breathe)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여성 감독들은 여성의 부정적이며 혐오스러운 면면을 드러내어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용기있게 감행한 바 있다. <어뷰스 오브 위크니스>는 여성의 몸에 대한 뒤틀린 권리를, <브리드>는 여성에 대한 끌림(affection)이 가진 잔인한 이면을 보여주면서 여성의 부정적인 심리와 관계를 정면 돌파한다.




2014년 대만여성영화제의 한 섹션 주제는 앤 크벳코비치(Ann Cvetkovich)의 영화 제목을 차용한 ‘더러운 감정의 알파벳 The Alphabet of Feeling Bad’이었다. <거짓말>은 이러한 동시대 여성영화의 괴물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주제적 탐구를 지리적 차이를 넘어 '지금 여기'에서 시도한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이고 더 저항적으로 말이다. 여기에서 '더 저항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여타의 여성영화와는 달리, 여성 공동체와 여성의 물질적 기반 자체에 대한 여성의 ‘허위의식’과 ‘부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영화의 좌표를 탈심리학적 방향에 놓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아영(김꽃비)을 단순히 내재적으로 병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치부하기에 영화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아영이 하는 거짓말은 대부분 사회가 요구하는 물질적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 즉 대타자의 욕망을 알고, 그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아영은 집과 자동차 등 상품에서부터 남편의 직업과 친인척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대타자의 욕망을 현실화하려 한다. 사회가 ‘여성’에게 규정하고 배치한 그 자리를 욕망하는 것이다. <거짓말>은 간단하게 말해 여성의 ‘허위의식’은 사회의 규율 권력으로서의 여성성을 여성이 반성적 과정 없이 받아들일 때 생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서스펜스는 아영의 ‘허위의식’과 사회의 ‘여성성’ 간의 긴장에서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거짓말>을 여성의 병적 거짓말, 흔히 말하는 허언증 여환자의 이야기를 다룬 ‘별종 장르 weirdo genre’ 나 ‘심리 드라마’ 장르로 놓는 건 영화의 해석을 도리어 억압하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 공동체 또한 <거짓말>에서 중요한 비판의 장소가 된다. <거짓말>은 사실 피부과 병원의 환자, 의사, 간호조무사 등의 등장인물의 직업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 집단이 주된 배경이 되는 영화이다. 영화의 흥미로운 한 부분은 피부과 간호조무사들의 모임과 그 자리에서 나누는 그녀들의 대화다. 이들의 대화는 주로 남자, 외모, 손님 흉보기 등인데 이들이 아영을 의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감춰져 있다는 점이 영화의 흥미를 더한다. 이들이 중학교 선생님 애인을 두었다는 아영의 말을 믿지 않는 건 바로 그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낮은 계급으로서의 자기 비하, 직업에 대한 텅 빈 소명감, 내재되어 있던 여성에 대한 질투와 서로에 대한 경멸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여성영화의 맥락에서 다루고 있는 ‘여성’은 피해자라는 이름 아래에 감춰진 송곳니를 드러내어 서로를 상처내고 상처받는 존재들이다. 피가 난무한 피해자의 세계에 혐오, 경멸, 자기 비하, 질투, 경쟁심이 파도를 이루며, 권리의 남용은 넘쳐난다. 여성감독들은 지금 여성을 내세워 ‘내 안의 괴물성’과 씨름하고 있다. 




  사실 여성주의 영화비평의 역사 혹은 여성주의에서 '부정적인/부정의' 여성성은 참 낯선 말이다. ‘여성’을 괴물로 만든 건 여성의 바깥, 즉 자유주의건 자본주의건 가부장제건 그 모든 것을 합친 최종 보스로서의 세계가 여성을 피해자로 만들었다는 것이 기존의 여성주의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자리에 있지만 동시에 여성이기 때문에 찬양받고 보호받는다. 여성을 놓는 이러한 바깥 세계의 이중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프레임 전쟁에서 총대를 맨 여성들이 바로 위에 등장한 여성감독들이리라. 그것이 오늘날 여성영화비평 나아가 여성주의의 화두 중 하나가 아닐까. 여성은 순수하고, 가부장제가 만든 세계는 오염되었다는 나이브한 이분법 그 자체가 거짓말인 것이다. 여성 스스로 여성을 비하하고 경시하며 혐오하고, 사회의 선한 가치는 이미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가면의 정체성'을 내재하고, 상대를 속이는 감정에 익숙해진다.    







  한편 <거짓말>을 여성 캐릭터의 맥락에 놓고 보면, 김꽃비가 연기하는 아영은 오정희의 소설 완구점 여인과 은희경의 새의 선물』에 나왔던 10대 소녀들의 20대 버전이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이 소녀들은 모두 장금이처럼 ‘홍시를 홍시라고 말할 수 있는’ 독립심, 대범함, 당돌함을 지녔다(완구점 여인에서 새의 선물로의 이행을 점점 더 소프트하고 별반 반감을 일으키지 않는, 그래서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대상으로 여성을 포섭하는 한국 소설의 한 국면으로 읽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완구점 여인은 훨씬 더 어둡고 일탈적이며, 소녀가 만든 외부의 세계가 더 공고하다는 점에서 <거짓말>의 여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더 직접적으로 환기시킨다. 돌파구 없는 외부 현실을 허구의 자기 세계로 구축한다는 점에서 <거짓말>은 현실의 억압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곳에 세 가지 ‘부정’이 있다. 첫째는 긍정의 반대로서의 부정이다. 둘째는 ‘어떤 판단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 밑바닥에서 “이것은 내가 억압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정적 판단은 억압의 지적 대체물이다.’라고 했던 프로이트식 억압에 대한 부정이 있다. 셋째는 그야말로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의 원한을 비롯한 부정적 감정을 말한다. <거짓말>은 이 세 가지 부정의 혼합물이며 사회와 여성의 매개로서의 부정성에 관심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비교해 보면 어떻게 부정성이 ‘성’과 매개가 되는지 그 성차가 적나라하게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은 현재 극장 개봉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거짓말>처럼 중간 규모의, 집합되지 않은 다양성 영화들은 생태계와 개체를 더 강하게 만드는 돌연변이들이다. 새로움은 그 돌연변이들에서 나온다. <거짓말>을 제1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 영화제에서만이 아니라, 극장에서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김선아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