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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피터 팬』과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네버랜드는 누구에게 유토피아인가?


[동화 다시 읽기] 『피터 팬』과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 네버랜드는 누구에게 유토피아인가?

(* 스포일러 있습니다)


최근 <레드 라이딩 후드>(캐서린 하드윅, 2011), <스노우 화이트 앤 헌츠맨>(루퍼트 샌더스, 2012), <백설 공주>(타셈 싱, 2012), <겨울왕국>(크리스 벅, 제니퍼 리, 2013), <말레피센트>(로버트 스트롬버그, 2014) 같은 동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영화들은 대부분 남자의 구원을 기다리는 수동적 여성 주인공을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당찬 여성으로 변모시키거나, 악녀로 묘사되었던 캐릭터의 이면을 들여다보거나, 혹은 적대적인 관계로 묘사되었던 여-여 관계를 재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모두 현대 여성관객에 맞춘, 어느 정도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다분히 캐릭터의 반전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전체적인 세계관이나 구조는 잘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뿌리 깊게 박힌 동화의 이데올로기는 한 인물의 변화로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동화 다시 읽기]에서는 동화의 전체적인 구조와 무의식을 들여다봄으로써 오래된 이야기들의 페미니스트적 재활용을 가늠해본다. 우리의 이야기 창고에는 아직도 새로운 쓰임새를 기다리는 무수한 동화들이 쌓여있으니 말이다.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J.A. 바요나, 2007)은 현실과 환상, 역사와 허구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아이들의 동화적 세계가 얼마나 음침하고 어두컴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던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제작한 영화다. 이 영화 역시 델 토로 감독의 전작들처럼 상당히 어두운 동화적 상상력에 기반해 있다.

사실 델 토로 감독이 억지로 동화를 어둡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미 동화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매우 어두운 현실과 차가운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아름답고 예쁜 세상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기억되는 안데르센 동화도 다시 읽어보면 늘 현실의 냉정함을 일깨우는 결말로 마무리되며, 유럽의 오래된 동화들은 아이들, 특히 소녀들에게 세상의 위험과 폭력을 경고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잔인하고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예를 들어 『성냥팔이 소녀』나 『인어 공주』의 결론을 생각해보자. 성냥팔이 소녀는 차가운 거리에서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죽어가고, 왕자는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인어 공주를 가차없이 버린다. 인어 공주조차도 왕자를 찾아간 본래 목적은 사랑이 아니라 영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라푼젤』, 『헨젤과 그레텔』, 『빨간 두건』 같은 동화들은 은유적이고 직접적인 절도, 강간, 살해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이렇게 볼 때 본래 동화는 어른들이 꽁꽁 숨겨놓은 현실의 구조를 아이들의 부조리하고 잔인한 상상력 속에서 기이하게 드러내는 장르라 할 수 있다.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이 참조한 소설 『나사의 회전』과 『피터 팬』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의 공포는 아이들만의 음침하고 공평치 않은 세계 속에서 발견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세르지오 산체스는 시나리오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과 제임스 베리의 『피터 팬』에 기반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유령들린 집과 신뢰하기 힘든 화자라는 『나사의 회전』의 설정은 이미 <디 아워스>, <장화, 홍련> 등의 공포 영화에서 여러 번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익숙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공포의 핵심은 유령 이야기인 『나사의 회전』보다는 꿈동산 같은 네버랜드를 배경으로 한 『피터 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퍼나지>에도 네버랜드와 같은 아이들만의 세계가 존재한다. 다만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 그 곳에서 아이들은 자라지 않는다. 아이들은 죽음의 순간에 멈춰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아이들은 잔인하기도 하다. 이곳의 아이들은 모두 같은 고아원 출신으로 자신들을 돌봐주던 어른에 의해 집단살해를 당한 억울한 희생자이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생전에 얼굴이 기형이어서 두건을 쓰고 다니던 한 아이를 왕따시켜 죽게 만들었던 가해자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어린 아이 특유의 무한한 이기심과 원한을 무기로 죽음의 공간에서 자신들을 돌봐줄 엄마, 웬디를 기다린다. 부모가 찾지 않아 버려진 고아들만 있는 네버랜드처럼 <오퍼나지>도 부모가 없는 고아원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고아원에서 죽어간 아이들은 <오퍼나지>의 주인공 로라(벨렌 루에다)가 입양한 에이즈 환자 시몬을 자신들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시몬은 죽은 아이들과 같은 고아원 출신인 로라를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가 된다. 로라는 어린 시절 고아원에 있을 때도 자신 또래의 아이들을 돌볼 정도로 누군가를 돌보는 것에 익숙하다. 로라는 친구들과 달리 고아원에서 집단독살사건 직전에 입양되는 바람에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난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언젠가 자신이 자란 고아원으로 돌아와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로라는 자신들과 똑같이 죽길 바라는 친구들 때문에 살아있는 아이들이 아닌 죽어간 아이들을 돌볼 처지에 처하고 만다. 그녀는 엄마가 되어 자신의 친구였던 아이들을 돌보게 된다.

이 영화가 동화 『피터 팬』과 닮아 있는 부분은 단순히 네버랜드와 고아원 사이의 친밀성에만 있지는 않다. 더 중요한 친밀성은 <오퍼나지>의 로라와 『피터 팬』의 웬디 사이의 연관성, 그리고 여성에게 부과된 '돌봄'이라는 젠더 역할이다. 공포는 이 주제에서 발생한다.



『피터 팬』은 아이들의 유토피아, 부모의 잔소리와 어른이 되면 겪어야 할 팍팍한 사회현실을 피해 영원히 아이로 남아 살 수 있는 곳, 네버랜드를 무대로 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과연 '네버랜드'는 '누구'에게 유토피아인가? 네버랜드에서 (물론 후크 선장만 방해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사회의 모든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 마음껏 뛰어놀 수 있지만, 그 공간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것은 남자 아이들뿐이다. 여자아이인 웬디는 오히려 네버랜드에서 유일한 어른 노릇을 한다. 네버랜드에서 웬디의 역할은 다른 남자아이들을 돌보는 엄마이다. 다른 남자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웬디는 그들을 돌본다. 그들이 다 놀고 돌아온 다음에 먹이고, 입히고, 씻긴다. 심지어 후크 선장과 해적들마저 웬디를 자신들을 돌봐줄 '엄마'로 모셔가려 한다. 흥미롭게도 웬디가 네버랜드에서 유일하게 엄마가 아닌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는 (팜프 파탈 역을 하고 있는) 팅커벨의 질투를 받을 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험담의 주인공인 웬디는 다른 여성의 질투를 받는 성적 관계나 피터팬의 구원을 기다리는 ‘곤경에 처한 처녀’의 역할을 제외하고는 엄마의 역할에 한정된다.



남자아이들은 어른으로 진입하기 전 어떤 규제도 없는 네버랜드에서 그들이 하고 싶은 온갖 것들을 한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그러한 유토피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또 다시 여성(엄마)이라는 희생자, 돌보는 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아이들에게는 어디서도 가부장제와 사회가 규정한 젠더 역할을 박차고 나갈 여지란 없는 것일까? 사회제도 밖의 상상적 공간에서 오히려 웬디는 사회가 규정한 젠더 역할을 수행하며 사회가 인정할 만한 여자 어른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끔찍함은 바로 에필로그에 있다. 네버랜드를 떠난 남자아이들이 보통의 어른이 되어가자, 피터 팬은 실망하고 네버랜드로 돌아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된다. 그리고 몇 년 후 웬디를 데리러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웬디는 이미 늙어버려 피터 팬을 따라갈 수 없다(아니 웬디는 더 이상은 피터 팬을 돌봐줄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 그 때 음흉하고 간사한 피터 팬은 웬디의 손녀를 본다. 그리고 웬디의 손녀를 데리고 네버랜드로 떠나간다. 단지 날고 싶어 했을 뿐이었던 소녀를 또 다시 엄마로 길들이고 자신들을 돌봐 줄 누군가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피터 팬의 '엄마로 길들이기'는 대대로 이어진다. 피터 팬은 거침없이 세상 밖을 경험하고 모험을 원했던 소녀들을 꾀어내어 엄마로 길들여 사회로 내보낸다.

다시 <오퍼나지>로 돌아가 보자. 로라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돌봐야 하는, 혹은 돌볼 누군가를 찾는 '돌봄 강박증'에 시달린다. 어린 시절 로라는 자신도 같은 또래의 고아 아이였으면서 함께 지냈던 친구들을 끝까지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을 한다(<판의 미로>에서도 그랬듯이 델 토로 감독은 여자 아이들에게 성인 여자와 같은 돌봄의 책임을 부여한다). 그리고 현재에는 입양한 아들 시몬을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린다. 로라는 시몬이 에이즈 환자임을 알고도 그를 입양한다.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시몬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시몬이야말로 로라의 돌봄을 절대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퍼나지>는 『피터 팬』과는 조금 다르게 여성 스스로의 '돌봄 강박증'과 아이들의 '엄마로 길들이기'를 동시에 보여준다. 엄마가 없는 아이들은 로라를 영원히 자신들의 엄마로 묶어놓기 위해 그녀를 죽음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이런 류의 서사를 가진 많은 영화들은 로라가 외부세계에 남아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시몬과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애도하는 것으로 결말을 내곤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로라는 오히려 외부세계를 닫아 놓고 스스로 네버랜드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다. 그래서 이 영화는 질식할 것 같은 공포를 전달한다. 죽음의 세계로 넘어가며 그녀는 자신을 엄마의 역할에 옭아매고 현실에서 사라진다. 로라는 영원히 고아원 아이들의 엄마가 된다. 그녀는 한 없이 약한 자들, 버려진 고아원 아이들, 얼굴이 기형인 두건을 쓴 소년, 에이즈에 걸려 버려진 아이, 죽음의 경계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 등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다. 그녀는 절대적으로 약한 자들을 찾아 그들을 돌봄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불안(로라 자신도 버려진 아이로 매우 불안정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다지 전형적이고 안정적인 엄마의 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을 잠재우고 감춘다. 로라는 절대적으로 약한 자를 돌봄으로써 스스로 그들을 돌볼 힘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고 자족감을 느낀다. 때문에 로라의 ‘돌봄 강박증’이 완전히 타자 지향적 태도라고 할 수 없다. 그녀는 돌봄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돌봄 자체를 거의 자신의 정체성으로 갖고 간다. 어느 공간에서도 규범적인 젠더 역할을 벗어날 수 없는 여성은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돌봄의 역할을 내면화한다.  

그러나 로라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실패한다. 자의는 아니지만 고아원 친구들을 버리고, 시몬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그들을 죽게 만든다. 그녀는 자신의 실패에서 죄책감을 느낀다. 로라의 불안함과 죄책감은 이 영화의 긴장을 유지시키는 기본적 정서이다. 이 돌봄의 실패에 대한 죄책감은 여자를 '엄마로 길들이기'의 방책이 된다. 죽은 아이들은 시몬을 통해 로라의 죄책감을 자극하여 로라를 자신들의 엄마로 만든다. 로라는 자신의 실패를 통감하며 기꺼이 시몬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의 영원한 엄마가 되기 위해 죽음의 세계로 넘어간다. 거기서 죄책감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사회는 누군가 돌봐지지 않았을 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여자의 책임으로 돌린다. 사회는 돌봄의 이상한 책임감을 여자들에게 떠안김으로써 그녀들을 엄마로 길들인다.

『피터 팬』에서 웬디는 피터 팬이 손녀를 데리고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순순히 손녀를 넘겨준다. 웬디는 늙을 때까지 ('피터 팬'들을) 돌보는 노동에 시달려왔다. 웬디는 손녀가 그 대를 잇지 않고 고리를 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하늘을 날아보고 싶어 하는' 손녀가 피터 팬의 음흉한 사기에 넘어가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꿈을 이루게 해주는 것, 그것이 웬디가 손녀를 위해 해주어야할 일이다.


글: 조혜영 /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