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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여판사> 혹은 다시 쓰는 한국영화사

한국 여성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인 <여판사>(1962년, 홍은원 감독)가 약 55년만에 발굴되었다. <여판사>는 <미망인>(1956년, 박남옥 감독)에 이어 두 번째 한국 여성감독의 영화이며, 그 존재 자체로 하나의 ‘역사’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여판사>의 감독인 홍은원은 이후 <홀어머니>와 <오해가 남긴 것> 등 두 작품을 더 감독했으며, <오해가 남긴 것>이 개봉되기 몇 달 전에 세 번째 여성감독인 최은희 감독의 <민며느리>(1965년)가 등장했다. 세 명의 여성감독만이 한국영화의 황금기라고 흔히 부르는 1950~60년대에 활약하고 있었다. 70년대는 <첫경험>과 <관계>의 감독인 황혜미가 있었고, 80년대는 이미례, 90년대는 임순례 등 10년에 한 번꼴로 한국 여성 영화사는 더디게 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여판사>의 이번 발굴은 한국 영화사를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아 마땅하다. <여판사>는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 쓰는 한국영화사를 시도할 수 있는 중요한 영화이며, 그것이 여성에 의한 영화이며, 여성(관객)을 위한 영화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번 발굴본은 영화의 초반부와 몇 장면들이 소실되어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시나리오와 당시 관련 기사와 자료 등은 남아 있는 상태이다. 55년이 지나 <여판사> 발굴본을 본다는 것은 영화, 시나리오, 기사, 감독의 글 등 온갖 질료들의 퍼즐을 연결하는 상호 텍스트성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판사가 될 때까지 전 여자가 아니예요!’

‘직업여성부부의 이상심리’, ‘한국의 제 2호인 여감독 홍은원 연출!’ 등은 <여판사>가 개봉될 당시 포스터의 광고 문구들이다. ‘여성영화’라는 표현도 있고, 홍은원 감독 자체도 <여판사>는 ‘여자를 그린 영화’라고 인터뷰를 한 바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여판사>는 여타 다른 당대 한국영화와는 차별화된 강조와 반복이 두드러진다. 여성이 여성 자신을 여성으로 정의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여성 등장인물은 ‘여자는…’, ‘여자가…’ 등을 계속 반복발화한다. 이는 일종의 징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반복을 통해 영화 텍스트에서 강조점을 발생시키는 순간 그 강조점들이 곧 인물을 둘러싼 현실에서의 (해결되지 않는) 갈등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질러 말하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지점은 여성 (등장인물)이 가부장 가족과 사회라는 현실에서 스스로를 정의하는 데에 곤란함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계속 말한다. 여성의 위치, 자격, 본질에 대해서 말이다. 

특히 여판사인 주인공 허진숙은 ‘여성’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여성 본인의 의지를 표명하는 대사가 대부분이다. ‘판사가 될 때까지 전 여자가 아니예요!’(시나리오상에는 없고 영화에만 나오는 허진숙의 대사), ‘여성이 직업을 가졌다구 해서 가정파괴의 위험성이 백퍼센트 부수된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오랜 세월을 두고 불행했던 이 나라 여성들의 숙환을 메스로 수술하는 의사 못지 않게 다루고 싶었어요’, ‘여성으로서 사회활동을 할 경우 잘못하며 소홀하기 쉬운 가정생활 문제 같은 것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여성들은 지위향상을 위한 자체적인 노력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등등. 이만큼 여성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자리에 대한 대사가 많은 영화도 드물 것이다. 이런 대사들은 발화자에게 일종의 수행성을 요구하는 데, 즉 현상을 진술하는 진술문과 발화자의 의지가 담긴 수행문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여판사인 진숙 만큼 여성의 사회적 자리와 역할에 대해 말하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다른 인물들은 일종의 가부장 가족의 구성원의 위치에서 발화한다. 이들은 시어머니이자 후처로, 부잣집 막내 딸로, 시중드는 식모로, 치매에 걸린 노인(할머니)으로 가부장제가 정해놓은 여성의 역할에 고정되어 있고, 그 자리에서 발화한다. 아내, 며느리, 시누이이자 동시에 판사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 진숙과는 다르다. 진숙은 이들과는 달리 전통적인 가족 내 (여) 성역할과 사회에서의 젠더 정체성 사이에서  더 나아가 여성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녀의 갈등이 바로 끊임없이 반복 수행되는 그녀의 발화문(대사)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해결하고 싶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여성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갈등 말이다. 진숙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여성의) 갈등이 바로 <여판사>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서사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반복 발화를 통한 전통적 여성성과 젠더 정체성,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간의 이런 갈등을 드러내다가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극적 기점을 마련하려 시도한다.  타협안은 바로 장르의 외삽(extrapolation), 즉 삼대에 걸친 가족 멜로 드라마 장르로 영화가 진행되다가 살인 사건 발생과 해결이라는 스릴러 장르의 외삽을 통해 이전의 멜로 드라마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다. 

외삽법의 상상력, 여성영화

외삽이란 조건이나 맥락을 벗어난 어떤 것을 그 조건이나 맥락에 삽입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말한다. 연결되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을 바깥에서 끌고 들어오는 외삽법은 <여판사>의 초중반부의 멜로 드라마, 즉 여성의 공적/사적 영역의 갈등을 스릴러 장르 즉 살인 사건의 해결로 대체- 해결을 하는 데에 적용된다. 판사/변호사이자 아내/며느리인 진숙의 공적/사적 정체성의 갈등은 결국 시어머니의 누명을 벗기는 변호사 진숙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스릴러 장르로의 전환은 영화의 연대기적 시간을 추리의 시간으로, 여성복에서 변호사복으로 갈아입은 진숙을, 가족 내 구성원이 아닌 법정의 증인 등 영화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영화는 여성의 욕망과 금지의 법 간의 갈등 혹은 여성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갈등(멜로 드라마적 갈등)을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의 살인 사건을 변호사라는 공적 정체성으로 여성이 해결하는 식으로 해피 엔딩을 맺는다. 

진숙은 삼대에 걸친 모든 가족 구성원이 개입되어 있는 살인 사건을 ‘법’으로 ‘스스로’ 해결하면서 ‘여성’의 자리를 재영역화하는 것이다. <여판사>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바로 이 부분, 즉 홍은원 감독의 이 외삽의 상상력이 아닐까. 물론 진숙은 가정과 사회 생활 양 쪽을 다 잘해내고 싶은 슈퍼 우먼의 욕망을 가졌다. 이런 여성 개인의 욕망은 결국 가부장제 사회에서 현실화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진숙은 법을 끌고 와서 가부장적 관습에 길들여져 있는 가족들간의 관계와 이로 인한 오해를 해결한다. 그러면 질문해 보자. 왜 <여판사>에서는 이러한 단절되고 급작스러운 상상력이 보이는가. 여성에게 있어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매끈하게 봉합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외삽없이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이 여성 문제, 즉 아내, 며느리, 시누이 등으로 종속된 일종의 집으로서의 여성은 판사, 변호사 등 직업을 지닌 사회적 장에서의 여성과 결코 화해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지나친 선의감 

<여판사>가 개봉되었을 당시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판사>를 평가했다. 

노망한 할머니, 며느리만을 사랑하는 시아버지, 전부의 자식을 숨기고 있는 계모인 시어머니와 그의 딸 시누이, 자격지심이 강한 남편, 남편을 따르는 순진한 처녀 등이 주인공인 며느리 여판사의 주변인물들이다. 어떤 모델을 두고 그린 이야기같지만 보고 있노라면 선입감과 달리 반전되는 이야기에 호감이 간다. 법정장면 등 고증을 잘했고 문정숙, 유계선이 호연. 하이클라스의 홈드라마인데 지나친 선의감 때문에 극적 대단원이 약해진 느낌이 없지 않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지나친 선의감” 이다. 판사에서 변호사로 전향한 진숙은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누명을 쓴 시어머니를 위해 법정에서 ‘모성애’에 호소한다. 선의감은 진숙의 이러한 다른 여성에 대한 선한 의지를 말한다. 당대 신문에서는 진숙의 시어머니를 향한 선한 감정 때문에 오히려 영화의 극적 대단원이 약화되었다고 평가한다. 홍은원 감독은 후반부 스릴러 장르에서 즉 진숙이 판사에서 변호사로 전환하는 지점부터 (여성 문제는 여성이 해결할 수 있다는) 당사자주의 입장을 취한다. 변호사 며느리가 살인 피고인인 시어머니의 누명을 벗겨 주는 결말이 취한 당사자주의는 양가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여판사>는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의 죄를 벗겨준다는 주체적 입장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다른 여성에 대한 ‘선의감’을 발휘하는 그야말로 여성주의 영화라 할 수 있다(여성에 대한 여성의 선의감이 극적 효과를 반감시킨다는 논의는 다른 데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여판사>가 취한 이러한 당사자 주의는 가족으로, 사적 영역으로, 집으로서의 여성만을 여성이 가장 잘 알고 있고, 그로 인해 또 다시 여성은 가정과 같은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문제만을 해결할 수 있다는 한계를 내재한 선택이 된다. 그렇기에 객관적이며 공정한 법의 이름을 행하는 판사는 여성인 진숙에게 맞지 않고, 그녀의 변호사로의 전업은 당연한 귀결이 되는 것이다.   

<여판사>가 재현한 주인공 진숙을 둘러싼 이러한 양가적 입장은 55년이 흐른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영화는 생생한 현재성을 얻는다. <여판사>의 정확한 제목은 어쩌면 <여/판사>일지도 모른다. <여/판사>에서의 빗장이 곧 주인공인 진숙이 겪고 있는 여성과 가부장제 사회간의 갈등을 말하니까 말이다. 연극적인 집안 공간이나 필름 카메라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배치로 인해 자칫 단순해 지기 쉬운 영화 공간에 홍은원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 출신 답게 생생하고 현실감있는 대사를 넣어 공간을 풍부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겠다. <여판사>는 장르적, 역사적, 사회적, 비교영화적 접근 등 다양한 통로로 다가갈 수 있는 미덕을 지닌 영화라는 점에서 이후에도 계속 논의하고 거듭 써야 할 영화일 것이다.  



김선아 (집행위원장/ 수석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