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개봉작 중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선정한 여성영화 베스트 7을 발표합니다. 여성감독이 만든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 프로그래머, 사무국의 투표로 총 7편이 선정되었습니다. 영화 이미지와 풍경에 대한 여성주의적 사유부터 자전적인 경험이 투사된 성장 서사, 청년 세대의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 여성의 주거와 취미에 대한 철학적 판타지, 여성의 몸의 역사와 정치적 주장 그리고 진보 정치와 지식인에 대한 성찰까지 다양한 형식과 이야기들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여성의 감각, 경험, 사유에 말을 건네는 이야기는 더 많이 만들어지고, 더 많이 보이고,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2018년에 이어 2019년에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여성영화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선정된 영화들을 소개합니다.
임순례 <리틀 포레스트>
지난 2월 말 개봉해 관객 150만 명을 동원한 화제작. 잘 알려진 대로, 일본 만화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인기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제보자>(2014) 등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오랫동안 한국 대표 여성 감독으로 꼽혀 온 그가, 요즘 한국영화에서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 20대 여성의 색다른 ‘시골살이’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지형도를 선보인 작품으로 주목할 만하다. 대학 진학 후 서울에서 지내던 혜원은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지자 무작정 고향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비어있던 집에 불을 땐 뒤, 혜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배춧국을 끓이는 것이었다. 서울이나 고향이나 하루에도 몇 번씩 배가 고파지는 건 마찬가지지만, 이곳에서 혜원은 사계절의 순리를 따라 먹을 것을 정성껏 심고 기르고 수확하고 다듬고 요리해 먹기로 한다. 토마토가 붉게 익고, 벼가 고개를 숙이기까지 땀을 흘리고 그만한 세월을 기다려야만 맛볼 수 있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오색찬란함. 그곳에서 예정에 없는 1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혜원은 바쁘게 살던 서울에서는 잊고 지냈던 건강한 노동의 기쁨과 마음의 여유를 만끽한다. 혜원의 별미 요리가 시작될 때마다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건 물론이고, 더 빨리 달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바쁜 현대인들에게 ‘잠시 쉬어가도 좋다’는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는 작품이다. [장성란]
아녜스 바르다 & JR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노안으로 세상이 희미하게 보이는 아녜스 바르다 감독은 늘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사진작가 JR에게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나이 든 거장 여성 영화감독과 젊은 사진작가는 작은 트럭을 한 대 구입해서 프랑스 시골을 다니면서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 주로 얼굴 사진을 찍어준다. 얼굴 사진은 포토 프린팅을 거쳐 그 얼굴의 주인공이 살고 있는 마을 곳곳에 확대 전시된다. 사람들은 커다란 얼굴 사진을 보고 전시된 그 장소를 새롭고 낯설게 보게 되고 사진의 주인공 또한 삶보다 더 큰 예술을 마주할 때의 감동으로 스스로를 바라본다.
프랑스 누벨바그 세대의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는 점점 더 보이지 않는 자신의 눈처럼 흐릿해져 가는 기억을 잡고 싶다. 사진은 지나쳐 가는 순간을 멈춰 간직하는 데에 최고의 예술이며 사람의 얼굴은 만남의 순간에 가장 강하게 남는 최고의 인상이다. 그래서 클로즈업 사진은 수많은 마주침을 소중하게 담은 선물이 된다. 바르다와 JR은 시골의 버려진 탄광촌 마을, 농부의 집, 트럭으로 배달하는 우체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부두와 공장, 해변의 벙커 등을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찍는다.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잊혀져 간 사람들과 그들의 공간은 사진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얼굴을 갖게 되고 비로소 실존이 된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이미지를 사랑했던 영화광이 만든 영화이자 영화만큼이나 삶을 사랑했던 거장의 ‘삶에 대한 찬가’이다. 영화에서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고다르에게 눈-영화-이미지-얼굴(삶) 혹은 삶과 영화의 관계는 단절과 반목의 관계였다면 바르다에게 그것은 서로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생기를 불어넣는 우정의 관계 아니었을까. [김선아]
전고운 <소공녀>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모금, 사랑하는 남자친구만 있으면 바랄 것이 없는 3년 차 프로 가사도우미 ‘미소’는 곤경에 처한다. 일당은 그대로인데 위스키와 담뱃값, 월세까지 오른 것이다.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한 미소는 일단 집을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대학 시절 함께 어울리던 밴드 멤버들의 집을 전전하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젊은 세대의 삶을 경유하게 된다. 영화는 초연해 보이는 미소가 자칫 허공에 붕 뜬 캐릭터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각자의 욕망으로 저마다의 삶은 녹록하지 않다. 인물들은 더러 자신과 삶의 방식이 다른 미소를 하찮게 여기거나 세상의 틀을 거부한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한편으로는 신비하게 느끼거나 부러워하기도 한다. 이 기만적이고 양가적인 감정 앞에서 공감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누군가를 함부로 연민하지도 않고 가르치려 들지도 않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지할 뿐이다. 미소는 가난하지만 자신의 이름처럼 영화 속 누구보다도 인정 넘치며 여유 있다. 세상에 지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의젓하게 지켜 나간다. ‘어디서 살아야 할까’로 출발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로 이어지는 이야기. 자긍심에 대한 동시대적 질문을 던지는 호기롭고도 독특한 데뷔작이다. [김현민]
김보람 <피의 연대기>
여성의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피를 흘린다. 오랜 세월 이 피 흘림은 비밀과 신비, 열성과 부정의 상징이 되어 왔다. 그러나 무엇이든 흡수력이 있는 물질로 피를 처리해 오던 피 흘림의 과정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새롭게 변화했다. 미국의 공영방송 NPR은 2015년을 ‘생리의 해’로 규정했고 ‘자유롭게 피 흘리기’의 바람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수많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새로운 생리를 위한’ 생리용품을 내놓고 있다. 생리용품을 리뷰하는 유튜브 스타의 방문자가 100만을 넘어서고, 정치인들이 피에 관해 말하기 시작한다. 인터넷으로 정보의 벽은 허물어지고, 새로운 정보를 교환하기 시작한 여성들은 ‘어떻게 피 흘릴지’ 자신만의 방식을 선택한다.
여성이 매달 흘려온 피, 월경은 오랜 세월 과도하게 의미화되어 왔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말이다. 월경은 더럽고 숨겨야 할 ‘오염원’이나 과장된 월경 증후군처럼 감정과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드는 혹은 생식능력을 증명하는 ‘모호하고 신비한 힘’으로 인식되어왔다. <피의 연대기>는 이러한 잘못된 정보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당신이 알고 싶었던 ‘월경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준다. ‘월경 위키피디아’라 할 수 있는 이 다큐멘터리는 역사, 종교, 세대, 지역, 인종, 문화를 가로지르며 월경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인터뷰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공적 영역에서 논의되어야 할 주제인가를 자연스럽게 주장한다, 월경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정보가 부족해지는 순간, 여성들은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그것을 죄스럽거나 공포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얼마나 다양한 생리용품(생리대, 탐폰, 생리컵 등)이 존재하는지, 내 몸은 어떤 것을 편안해 하는지 알아가는 것은 건강권과 내 몸의 긍정에 대한 문제이다. 또한 세계의 절반이 매달 사용하는 월경용품은 소비재가 아니라 복지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밝은 파스텔 색상의 인터뷰 화면, 알록달록한 다양한 생리용품, 개성 있는 애니메이션,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교환하는 전 세계 여성들 모습의 빠르고 정교한 교차편집은 경쾌하고 발랄한 리듬을 만들며, 관객들이 쉽게 피의 토론장에 참여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런 면에서 <피의 연대기>는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월경에 대한 연대기(年代記)인 동시에, 피로 묶인 연대, 즉 ‘피자매’의 연대기(連帶記)이기도 하다. [조혜영]
샐리 포터 <더 파티>
영화는 약 70분 동안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거실 연극에 가깝다. 흑백의 화면은 배우들의 연기력을 두드러지게 해주고 대사에 날카로움을 더한다. 제목인 <더 파티>는 주인공인 자넷(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이 쉐도우 캐비닛에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이자, 의회 정치에서의 정당을 말하는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2015년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총리의 연임이 확정된 영국 총선 시기에 감독인 샐리 포터는 <더 파티>의 시나리오를 썼고, 2016년 브랙시트 선거가 시행될 때는 영화의 촬영 기간 중이었다. <더 파티>는 선거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영국의 진보 좌파 의회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세련되면서도 지적인 블랙 코미디이다.
영화는 플래시 포워드 쇼트에서 시작한다. 자넷은 현관문을 열고 화면 밖을 향해 총을 겨눈다. 화면 밖에 있다고 가정하는 사람은 매리언이지만 동시에 관객이자 대중이며 투표권자일 수 있다. 샐리 포터는 정치인과 지식인 등 사회의 지도층이 망라된 총 8명의 등장인물의 모순, 기만, 비밀을 외부로 폭로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샐리 포터가 밝혔듯이 이는 “뭔가를 감추려고만 하고 헤치고 나갈 용기도 동력도 상실한 좌파 정치인”에 대한 날 선 비판이다. 매리언과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빌과 자넷, 지니와 레즈비언 커플이고 곧 세쌍둥이의 엄마가 될 예정이지만 이기적인 마사, 철딱서니 없는 지니, 명품 양복에 코카인 중독인 속물 톰, 자넷의 절친이자 냉소적인 미국인인 에이프릴과 뉴에이지 운동가인 독일인 고트프리드. 모순적이며 이기적이며 자기 기만이 일상화된 이들 68세대 지식인 집단이 나누는 대화는 오늘날의 진보 정치인 및 지식인들이 곱씹어 볼 만하다. 자넷이 마지막에 내뱉은 ‘배신자’는 자넷을 포함한 그들 자신들이 아닌지 말이다. [김선아]
그레타 거윅 <레이디 버드>
스스로 명명한 이름 ‘레이디 버드’라 불러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잠재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엄마가 불만인 크리스틴. 고등학교 졸업반인 ‘레이디 버드’는 따분한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뉴욕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한다. 단짝 줄리와의 우정과 새로운 사랑 카일과의 연애 모두 순탄하지 않은데 엄마와의 관계까지 점점 더 악화된다. 특별한 존재이고 싶지만 평범한 자신과 현실에 실망한 10대 여성의 경험을 위안의 손길과 함께 유머러스하게 포착한다. 그녀는 자신을 옭매던 평범함-특히, 엄마와 새크라멘토-을 떠나고서야 그곳에 반짝이는 특별함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며 성장한다.
카를라 시몬 <프리다의 그해 여름>
1993년 스페인 카탈루냐를 배경으로 엄마를 에이즈로 잃은 여섯 살 소녀 프리다의 이야기. 프리다는 도시에서 시골로 이주한 외삼촌 부부와 함께 살게 된다. 프리다는 볼 수 없는 엄마를 향한 그리움, 그리고 새 가족이 된 외삼촌과 외숙모, 사촌동생 아나와의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모두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만 같고 그래서 더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영화는 엄마를 잃은 프리다의 혼란스러운 감정과 상처를 마주하고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섬세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또한 프리다의 가족들을 통해 80년대 민주화 이후 당시 스페인의 세대갈등, 에이즈 문제, 정치적 분위기 등을 사실적으로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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