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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식데일리

[INTERVIEW] 당당하고 과감해졌다! 프로그래머 권은선, 배주연, 권은혜

"당당하고 과감해졌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권은선, 배주연, 권은혜

 

배주연, 권은선, 권은혜 프로그래머(왼쪽부터) ⓒ조아현

 

영화제는 프로그램으로 말한다. 어떤 영화를 어떻게 관객과 연결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은 영화제의 가치와 방향을 결정하는 척도가 된다. 올해 제21회를 맞이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은 “20+1, 벽을 깨는 얼굴들”이다. 지난 20년 동안 축적한 성과를 기억하며,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새롭게 마주하겠다는 뜻이다. 총 31개국에서 출품된 119편의 영화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얼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스크린에서 싸우고 사랑하고 탐구한다. 국가와 시대를 아우르며 선명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금세 곁을 떠나기도 한다. 영화제는 그 모든 얼굴을 한자리에 모아 ‘벽을 깨는 얼굴들’이라고 호명한다. 진지한 낭만과 용감한 불손이 섞인 축제를 앞두고 권은선 수석프로그래머, 배주연 프로그래머, 권은혜 프로그래머와 만났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제가 걸어온 발자취뿐만 아니라, 여성영화의 역사 또한 되짚어보고자 한다.

 

 

올해 영화제를 준비하며 여러모로 부담과 어려움을 느꼈으리라 짐작한다. 프로그래머로서 영화제를 앞둔 소회를 듣고 싶다.

배주연_ 프로그래머와 집행위원을 거쳐 작년부터 다시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힘들기는 했지만 새로운 분들과 결합하면서 열심히 준비하자는 마음을 다졌다. 지금 당장은 올해 영화제를 잘 치르는 것이 목표이고, 영화제가 끝나봐야 소회라는 것도 생길 듯하다. 어느 때보다 페미니즘 이슈가 활발하게 토론되는 시기 아닌가. 다양한 쟁점과 욕구를 어떻게 프로그램에 반영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준비했다.

 

권은혜_ 올해 프로그램팀에 합류하면서 바쁘게 지내는 중이다. 초반에는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업무에 적응하고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정신없었다. 정말 많은 영화를 최대한 열심히 보면서 준비했기에, 프로그래머로서 올해 프로그램에 자부심을 느낀다. 무사히 영화제가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권은선_ 제1회 영화제 당시 운 좋게 프로그래머를 맡았다. 수석 프로그래머와 집행위원을 거쳐서 올해 다시 프로그래머로 복귀했다. 힘든 시기를 통과했는데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남다르긴 하더라. 올해 21회 영화제를 20+1로 표기한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 또한 그 안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았다고 생각한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느낌에서 초심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되짚어보면 제1회 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마쳤던 날의 감동이 여전히 내 안에 소중하게 남아 있다. 영화가 끝나자 동숭아트센터에서 여성 관객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무리 지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는데, 그 연기가 뭉게구름 수준이었다. (웃음) 살면서 한 번도 못 본 광경이었다. 이게 가능하구나, 이렇게 많은 여자가 모여서 영화를 보고 이야기 나누는 영화제를 만들 수 있구나, 하면서 감탄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1996년 최초 개최되었고 이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열렸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 중 하나로서, 그동안 여성영화가 쌓아온 성과와 의미를 마주하려고 한다. 여성영상집단 ‘바리터’의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상영, 아녜스 바르다와 바바라 해머의 추모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많이 찾아와주시면 좋겠다.

 

‘바리터, 30년 이후’라는 이름으로, 바리터 창립 작품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를 상영하고 스페셜 토크를 준비한다.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창작집단임에도 그간 작품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권은선_ 바리터는 국내 최초로 여성영화창작을 표방하며 탄생한 그룹이다. 작품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활동하는 여성영화인 인력을 배출해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30년 전이니 정말 옛날이야기 같은데, 나 또한 바리터 회원이었다. (웃음) 앞서 말한 개인적 소회와 연결하면, 바리터 활동 역시 첫 상영을 마쳤던 순간의 기억이 생생하다. 장비를 챙겨서 철수한 다음, 사무실로 가서 다 같이 껴안고 울었거든. 당시 독립영화 집단은 굉장히 정치화된 시기였고, 그 가운데 바리터를 두고 빈정거리는 시선도 많았다. “바리터냐, 빨래터냐?”라면서 여성집단의 존재를 폄하하기도 했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 바리터가 갖는 중요성을 조명하고, 여성영화사를 새롭게 쓰는 과정으로서 확장해 나가고자 한다.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는 한국여성민우회와 바리터가 공동기획하고 제작한 16mm 영화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 영화 자체는 무척 거칠고 오래된 영화라 화질도 좋지 않다. 소스도 많이 사라졌고 제대로 복원될 기회가 없었기에 거의 우리가 발굴하는 수준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바리터 초기 멤버인 변영주 감독, 김소영 감독 등 여러 명을 초청했는데, 다들 약간씩 창피해한다. (웃음) 그럼에도 올해 영화제에서 놓칠 수 없는 이벤트가 되리라 예상한다. 당시 바리터는 영화 제작, 사운드 작업, 배급 및 상영 등 전 과정을 여성이 소화했고, 끊임없이 여성공동체적 창작활동에 관해 고민했다. 현시점에서 참여자들과 과거 경험을 나누며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스페셜 토크를 말 그대로 ‘스페셜’하게 진행할 예정이다. (웃음)

 

바리터를 통해 여성영화사를 되짚는 동시에,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는 특별전도 마련한다. 과거 제작된 영화 안에서 여성주의적 가치를 지닌 상영작을 찾아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기준과 주제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나.

 

배주연_ 실제 100년이라는 한국영화사에서 여성 감독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는 오래 되지 않았다. 남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 중에는 분명히 여성혐오적인 영화도 있기에 프로그래머로서 어려운 지점에 맞닥뜨리게 되더라. 결국 우리가 주목한 것은 가부장제라는 시스템에서 전형적으로 소비되기를 거부하며, 어떻게든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성의 얼굴이었다. 말하자면 그 시절의 ‘센 언니’이기도 한데, 그만큼 이야기할 여지가 많은 여성 캐릭터를 모아내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 여성주의 담론을 만들고 재해석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상영과 더불어 국제학술회의를 마련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다시 쓰는 영화사’라는 주제로 국내외 영화학자, 비평가, 활동가가 모여 각자 경험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자리이다. 비평이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남성중심주의를 부추겨왔는지, 여성 관객은 어떤 경로로 영화를 소비해왔는지 이야기하는 자리가 될 것 같다.

 

권은선_ 덧붙여 재작년에 작고하신 박남옥 감독님의 <미망인>(1955)을 언급하고 싶다. <미망인>은 한국 최초 여성 감독인 박남옥의 데뷔작이며, 제1회 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했다. 한 살배기 딸을 등에 업고 촬영현장에서 찍은 사진이 유명하지 않나. 바로 그 사진 속 따님인 이경주 선생님과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박남옥 감독님이 자서전을 집필할 당시, 직접 자료를 정리하신 분이기도 해서 누구보다 여성 영화인으로서 살아온 어머니의 삶을 풍성하게 회고해주실 것이다. 바리터와 박남옥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했는데, 올해 영화제에는 이처럼 섹션마다 ‘선구자’가 골고루 포진되어 있다. 새로운 물결에서 소개하는 <자연스럽게: 알리스 기-블라쉐의 전해지지 않은 이야기>(파멜라 B. 그린, 2018)은 영화의 시작으로 일컫는 뤼미에르 형제와 동시대에 활동한 여성 감독 알리스 기-블라쉐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기-블라쉐는 최초의 여성 감독일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극영화를 연출한 감독이기도 한데, 영화사에서 주요하게 다루지 않은 존재이다. 그 밖에도 <델핀과 캐롤>(칼리스토 맥널티, 2019), <마지막 무대>(반다 야쿠보프스카, 1948),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변영주, 1995) 등 여성 영화인으로서 길을 개척해온 전 세계의 선구자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미망인>
<마지막 무대>

선구적 위치를 이야기할 때, 아녜스 바르다와 바바라 해머도 빼놓을 수 없다. 두 거장의 추모전 ‘바르다 by 해머’를 선보인다. 작년 개막작으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아녜스 바르다·JR, 2018)을 상영했는데, 1년이 지난 후 회고전을 열게 된 셈이다.

권은선_ 두 감독 모두 생전에 영화제를 방문했던 분들이다. 사실 그간 작고한 감독의 기획전을 열 때는 ‘페미니스트 클래식’이나 ‘회고전’이라고 표기해왔다. 아녜스 바르다와 바바라 해머는 관객뿐만 아니라 영화제를 준비하는 주최 측에서도 깊이 응원하고 사랑한 감독들이다. 팬으로서 두 감독을 기억한다는 마음을 담아 ‘추모전’이라는 표현을 썼다.

 

권은혜_ 장·단편 구분 없이 아카이빙된 영화부터 국내 미발표작까지 두루 찾아보았다. 아녜스 바르다는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소개될 기회가 많았지만, 바바라 해머의 경우 1970년대 이전 작품들은 거의 상영된 적이 없다. 초기 단편인 <클린즈드Ⅱ>(1969)부터 유작이 된 <증거하는 몸>(2018)까지 폭넓게 관람할 수 있다. 역시나 관객 반응도 뜨거워서 현재 온라인 예매는 매진된 상태이다.

 

개막작인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 2018) 또한 낯선 작품이다. 미테브스카 감독은 일찍이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연출력을 인정받았으나 국내에서는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작품 또한 한국 프리미어로 상영되는데, 관객에게 미리 감독과 작품에 관해 소개해준다면.

권은선_ ‘벽을 깨는 얼굴들’이라는 영화제 슬로건에 가장 적합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여성주의에서 지적하는 핵심적인 틀을 건드리는 동시에, 주인공인 페트루냐라는 여성이 발산하는 힘이 대단한 작품이다. 영화에서 표현하는 ‘벽’은 국가, 종교, 남성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시스템이다. 페트루냐는 이 벽을 깨고, 끝까지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인물이다. 마케도니아의 작은 마을 슈티프가 배경인데, 지역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살아가는 30대 여성을 중심에 놓음으로써,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 등 다양한 이야기가 맞물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 진지한 가운데 유머를 잃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관객을 몰입시킨다. 만듦새 측면에서도 중견 감독이 제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작품이기에 올해 개막작으로 손색없다고 생각한다.

 

여성영화제가 선택한 ‘좋은 영화’는 작품성과 여성주의적 의의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갖는다. 각계에서 촉발된 미투 운동부터 페미니즘 백래쉬까지, 여성 인권과 젠더 이슈가 어느 때보다 주요한 쟁점으로 떠오른 시기이다. 국내 다수 영화제도 창작자와 관객의 요구에 응답하며 여성서사에 주목하는 별도 섹션을 마련하는가 하면, 심사위원과 감독의 성별 균형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동시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만의 고유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배주연_ 우선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여성을 조명하는 행사가 많아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영화제 홀로 이야기할 때 조금 외로운 부분이 있었다면, 최근에는 높은 관심을 동력으로 성평등 정책을 구체화하는 노력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여성주의를 가장 강력하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은 여성영화제라고 생각한다. ‘쟁점들: ‘룸’의 성정치’ 섹션을 포함해서 올해 영화제에는 특히 여성 임파워링을 말하는 작품들이 많다. 'Charter 5050×2020'이 보여주듯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이슈에 관한 공감과 지지가 확산되면서, 문제의식을 느낀 영화인 스스로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남성중심적 시각으로 재편된 기존 영화사에서 여성예술인을 발굴하는 과정이고, 그 흐름이 여성영화제 프로그램에도 자연스럽게 반영된다.

 

권은혜_ ‘한국장편경쟁’에 오늘 7편의 영화 중 <우리는 매일매일>(강유가람, 2019)과 <해일 앞에서>(전성연, 2019) 두 작품이 월드 프리미어로 소개된다. 두 편 모두 현재 한국에서 살아가는 페미니스트를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해일 앞에서>는 2016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젊은 페미니스트 단체 ‘페미당당’을 기록하고, <우리는 매일매일>은 40대가 된 ‘그때 그 페미니스트’를 찾아가 안부를 묻는다. 두 영화를 여성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소개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쁘고 반갑다.

 

배주연_ 과거부터 최신 흐름까지 국내 여성운동의 역사를 직간접적으로 조망하는 경험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외에도 출품작 중에 비슷한 욕구를 품은 영화들이 꽤 있었다. 스스로 페미니즘 운동이 거쳐 온 시간을 정리하며, 일종의 계보를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엿보였다.

 

올해 공모를 통해 접수한 한국영화의 경향을 좀 더 듣고 싶다. 하나로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주제나 방식에서 눈에 들어오는 면이 있을 것 같다. 물리적인 여건상 장편과 단편이 다루는 이슈에 차이가 있으리라 예상해보기도 한다.

배주연_ 전체적으로 훨씬 당당하고 과감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서사적으로 여성주의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는 동시에, 발화의 수위나 표현 방식에서도 자기검열을 극복한 작품이 많았다. ‘아시아단편경쟁’ 상영작에서도 그러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영화에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과거에는 2-30대 여성에 집중되었다면, 최근에는 아동부터 노인까지 거의 전 세대 여성이 중심인물로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다. 또한 말씀하신 것처럼 단편은 장편보다 빠르게 움직여서 완성될 수 있기 때문에, 최신 이슈와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기도 하다. ‘쟁점들: ‘룸’의 성정치’에서도 단편 세 작품을 묶어서 상영하는데, 디지털 성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 안에서 피해자를 보여주는 방식은 기존 문법과 분명히 차별된다. 이를테면 가해자를 처벌하는 방식이 현실에서는 법이라는 테두리와 한계로 이야기된다면, 올해 상영작은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쟁점들’은 매년 주목해야 할 여성주의 현안을 제시하는 섹션이다. 방금 소개한 디지털성폭력을 다룬 극영화부터 일본 미투운동을 대표하는 시오리 이토의 출연작까지 눈여겨볼 작품이 많다. ‘룸’의 성정치 라는 제목이 흥미롭다.

배주연_ 올해의 쟁점이라고 할 때, 버닝썬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장학썬’(장자연-김학의-버닝썬)은 2019년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에게 엄청난 충격과 절망을 떠안겼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남성 유흥문화의 폭력성과 폐쇄성을 목격했고,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쟁점화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결국 밀실이라는 공간에 집중하게 되더라. ‘룸’살롱과 단톡‘방’ 등을 사적 영역이 아닌 남성 권력이 공고화된 공간으로서 바라보고자 한다. 관련해서 단편이 디지털 성범죄와 같은 최근 이슈에 주목한다면, 장편은 미투 운동을 기록하며 남성이 권력을 쌓아 올리는 방식과 폭력을 묵인하는 구조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 많다.

<피의 연대기>
<차이나타운>

 

대표적인 제작지원 프로그램 ‘피치&캐치’가 10주년을 맞이하여 특별전을 연다. 그간의 빛나는 성과를 자랑하는 자리이자,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궁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겠다.

권은선_ ‘피치&캐치’는 영화제가 영화산업과 연계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여성영화와 여성영화인을 배출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벌새>(김보라, 2019), <피의 연대기>(김보람, 2018), <차이나타운>(한준희, 2015) 등 지속적인 성과를 내왔기에 나름 자부하는 측면이 있다. (웃음) 영화제 첫 회부터 한국영화 시스템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왔다. 여전히 그 문제에 주안점을 두고 행사를 준비한다. 이번 특별전은 자축과 중간점검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아 마련했다. 작년 20주년 기념전을 통해 다큐멘터리가 소개된 바 있기에, 올해는 극영화에 집중하여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지원을 통해 실제 영화로 제작되고 개봉까지 거친 작품 중 다시 살펴볼 작품을 모았다. 상영과 더불어 라운드 테이블도 마련한다. ‘피치&캐치’에 참여한 창작자뿐만 아니라, 타 영화제 관계자도 함께 초청하여 여성영화 지원 현장의 사례를 나눌 계획이다.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인터뷰 마무리하며 추천작을 묻고 싶다. 이미 여러 작품을 소개했고 프로그래머 입장에서는 모든 영화가 소중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발견이라고 꼽는 작품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권은선_ 너무 내 취향인데 괜찮으려나. (웃음) ‘새로운 물결’에서 상영하는 <내 발 아래>(마리 크로이처, 2019)를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여성 이슈를 다루는 깊이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화적 체험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네필의 욕망을 채우는 것 또한 영화제의 중요한 기능 아닌가. <내 발 아래>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매혹적인 작품이다.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분투하는 여성을 중심으로, 그를 압박하는 환경과 강박증 등의 정신적 문제를 미묘하고 섬세하게 다룬다. 많은 분이 기대해주시면 좋겠다.

 

배주연_ 한 작품만 말하기 정말 어렵다. 세 편은 추천해야 할 것 같다. (웃음) ‘쟁점들’에서 장편과 단편 하나씩 소개하고 싶다. <와인스타인>(우르슬라 맥팔레인, 2019)은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 된 영화계 거물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공과 몰락을 추적하는 작품이다. 처음 봤을 때는 다소 평이하게 받아들였다가, 다시 보면서 무척 놀랐다. 기존 언론 등 주류 매체에서는 와인스타인이 저지른 일을 개인의 일탈처럼 보도하지 않았나. 영화는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던 배경과 그에 방조했던 세력을 들여다보며, 영화산업이라는 구조 안에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찌르개>(임소라, 2019)는 앞서 말한 영화적 실험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단순히 영화의 소재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극 중 피해자가 가해에 맞서는 방식에서 파워풀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권은혜_ ‘폴란드 여성영화의 힘’에서 <마지막 무대>와 <파푸샤>(요안나 코스-크라우제, 코쉬슈토프 크라우제, 2013)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흔히 폴란드 영화라고 하면 어렵고 우울하다는 편견을 갖지 않나. 물론 아주 통쾌한 재미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웃음), 실제로 영화를 감상했을 때 좋은 자극을 받았다. 역사적 측면에서 폴란드와 한국은 유사한 지점을 공유하기에, 정서적으로도 풍부하게 와 닿는 영화가 많다. <마지막 무대>는 반다 야쿠보프스카 감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나와서 만든 작품이다. 여성 수용소를 배경으로 인종, 출신, 계급이 전부 다른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서사 자체도 흥미롭고 사료적 가치도 높기에, 영화에 관심을 둔 관객뿐만 아니라 연구자에게도 유의미한 관람이 되리라 생각한다. <파푸샤>는 집시이자 시인인 실존 인물 파푸샤의 일대기를 통해, 1차 세계대전부터 1980년대 공산 폴란드까지 긴 역사를 관통한다. 흑백 영화인데 이미지 자체가 정말 아름답다. 비교적 최근에 한국에 소개된 바 있지만, 훌륭한 작품이라 상영을 결정하게 되었다.

 

배주연_ 폴란드 역시 정치 및 역사적으로 변곡점이 많은 국가이다. 1990년대에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면서 폴란드 디아스포라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그동안 남성 언어를 통해 커다란 정치사로만 접근했다면, 올해 영화제에서는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여성의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권은혜_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퀴어 레인보우’의 <빌리와 엠마>(사만다 리, 2018)를 빼놓을 수 없다. 하이틴 로맨스다운 경쾌함과 풋풋함을 지닌 동시에, 필리핀 영화의 특색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존 퀴어 로맨스라고 하면 <가장 따뜻한 색, 블루>(압델라티프 케시시, 2014)나 <캐롤>(토드 헤인즈, 2015) 등 이른바 청소년관람불가 작품이 많지 않았나. 이 영화는 스킨십 최고 수위가 ‘뽀뽀’인데도 너무 설렌다. 어느 순간 “꺅” 하면서 보게 된다. (웃음) 개인적으로 애정을 갖는 작품이다.

 

 

글 차한비(리버스)  사진 조아현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데일리는 영화전문웹진 리버스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