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피플]

집행위원장의 눈 :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열기까지, 사람 하나하나의 소중함


Herstory에 연재될 글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2008년 10주년을 맞아 제작했던 기념 백서 <<여성, 영화 그리고 축제!>>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기념 백서 <<여성, 영화 그리고 축제!>>는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_보다 _ Records>에서는 1회부터 10회까지 개/폐막식을 비롯한 국제포럼 등의 행사와 상영작들이 총 망라되어 있으며 <_말하다 _쓰다>는 여성영화제의 10년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있습니다. <_Perspectives _Herstory>는 <_말하다 _쓰다>의  영문버전입니다. 
Herstory는 여성영화제의 역사를 기록한
<_말하다_쓰다>에 있는 글을 지속적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1회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진행된 개막식. 배우 방은진, 여성학자 오숙희 씨가 사회를 봤다

1983년 초, 독일 유학 시절이었다. 나는 장학재단의 소개로 보쿰대학의 한 사회학 교수를 만나러 갔다.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싶었고, 예술이 사회변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논문 주제로 ‘연극과 축제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쓰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당치 않다는 듯 슬픈 표정을 지으며 “연극이나 축제가 사회변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사람들을 위로는 할 수 있겠죠. 축제는 오히려 기존 사회체제를 유지시키는 기능을 하죠. 그건 사실 브레히트도 하지 못했던 일이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왜 나에게 그렇게 말했을까? 크게 좌절을 경험하였을까? 내가 너무 거창한 혁명을 꿈꾼다고 생각했을까? 어쨌든 그는 연극과 축제의 기능에 대한 매우 비관적이고도 소극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때는 어떤 구체적 사례를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증명하는 일이 매우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올해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10회를 맞았다. 우리가 그 동안 여성영화제를 통해서 성취한 것은 무엇일까? 지난 10여 년간은 ‘여성영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여성적 시선’이 무엇인지, 여성 주체적 문화가 무엇인지를 체득하게 되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여성이 아니라 여성의 시선과 욕망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매개로 스크린 안과 밖에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말하고, 소통하면서 여성들의 문화를 가시화시켰고, 여성들의 문화공동체를 형성해왔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다양한 국가, 다양한 인종, 다양한 처지의 여성들의 삶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넓어졌고 깊어졌으며 함께 성숙해왔다.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이 나라 안에서든 밖에서든 여성들 간의 우정을 쌓는 법을 배웠고 연대하는 법도 배웠다.
누가 친구인지 알게 되었고, 그것은 점차 관념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되어갔다. 영화제는 이해와 소통, 만남과 우정, 성찰과 각성의 장이었다. 즐거운 페미니즘, 흥겨운 축제가 나부끼는 공간이었다. 그야말로 나의 내부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났고 우리가 함께 변화하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부드러운 혁명의 장이며 사회 변화를 유발하는 장이었다. 엄청난 변화가 진행된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은 적지만 여럿이 모이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1997년 4월,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시작되었다. 1992년 여성문화예술기획(이하, 여문)이 만들어진 5년 후의 일이었다. 여문은 여성의 시각으로 여러 장르의 문화예술을 연구, 기획, 제작하고자 만든 단체였는데, 여성적 관점에서 여행을 다니며 우리 문화를 재해석하며 단합을 다지는 여성문화예술 기행, 여성문화예술 세미나, 심포지엄, 워크숍, 예술치료프로그램, 콘서트, 여성미술제, 그 밖에도 여성단체나 시민단체의 행사를 연출, 기획하는 등 다양한 일을 하였다. 그 중 여문에서 가장 대중적이고도 규모가 큰 사업은 연극이었다. 1992년 늦은 가을, 여문이 처음 시작한 연극 <자기만의 방>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한국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맞게 각색한 것으로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뜨거운 논쟁과 대단한 관객의 반응으로 8개월간 연극은 매일 매진이 되다시피 했다. 당시 연극계에서는 “대학로에 무서운 여자들이 나타나서 대학로의 돈을 다 긁어간다, 돈 방석에 앚았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1993년 공지영의 소설을 각색한 두번째 연극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역시 좋은 반응이었다. 1994년 세번째 작품은 미국 작가 바바라 워커의 소설을 각색한 <아마조네스의 꿈> 이었다. 급진적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결혼, 성, 사랑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과거 모계사회에서 미래사회에 불시착한 여성의 눈으로 가부장적 현대사회를 뒤집어보기를 시도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당시 연극공연 중에서는 평균 이상이었지만 연극 평론가들의 호평에 반해 관객의 반응은 앞 작품들만 못했다.

어찌되었든 연극 공연으로 인해 우리는 경제적으로 적자가 나게 되었다. 처음으로 큰 고비를 맞게 된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관객의 반응도 다른 연극에 비해 떨어진 것도 아닌데……’ 당시 연극계는 스태프에게 월급을 주지 않고 있었지만, 여문은 모든 스태프에게 월급을 주고 있었다. 스태프들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는 일, 그것은 여문이 출발한 기본적인 이유였다. 여문을 만들기 전, 나는 여성단체 문화기획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 한 후배가 봉천동에서 충정로까지 차비가 없어서 여러 번 걸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돈과 물질이 넘쳐나는 시대에 나와 함께 여성문화운동을 하는 후배는 차비조차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운동방식이 비현실적이라 생각했고 독자적인 여성문화예술 운동단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계유지를 위한 ‘자기만의 돈’을 벌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그제야 하게 되었다. 어쨌든 연극 <아마조네스의 꿈>은 재정적으로 큰 위기를 불러왔다. 무언가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여성문화예술 운동을 위해 이 시대 가장 대중적이고도 보편적인 매체는 무엇일까? 궁리하다가 결국 떠올린 것은 영화제였다.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는 이미 1993년 변재란  부집행위원장(현재 공동집행위원장)을 중심으로 ‘여성의 눈으로 본 세계영화사’라는 강좌를 진행한 바 있었고, 그 과정에서 김소영 현 집행위원, 동국대학교 영화학과의 유지나 교수도 회원이 되었다. 그러면서 1994년부터는 유지나 교수를 중심으로 ‘여성의 눈으로 본 올 해 최고, 최악의 영화 10편’을 연말결산행사로 진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1993년 김영 PD 등을 중심으로 열렸던 ‘페미니즘 영화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서 마를린 호리스의 <침묵에 대한 의문>을 보고 그 강력한 힘에 압도당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당시는 지구화와 급변하는 지식과 정보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시작되는 상화이었고, 나는 무언가 새로운 문화지형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영화계의 중요한 논객이자 여성문화예술기획의 회원이었던 변재란, 김소영, 유지나 씨에게 여성영화제를 하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김소영 교수의 적극적 참여로 영화제의 기획이 가능했다. 김소영 교수는 영화제 프로그램의 틀을 잡고, 프로그래밍을 위해 사람들을 조직했다. ‘새로운 물결’의 프로그래머로는 당시 상업영화 쪽에서 일했던 문혜주 씨와 갓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이수연(여성정책연구원 연구원 재직) 씨가 맡았고, ‘아시아 태평양’ 부문은 변재란 교수와 현재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정수완 교수가 맡았다. 그리고 김소영 교수와 그의 제자 최미애 씨가 ‘한국영화’ 부문을 맡았고, ‘쟁점들_여성들 사이의 관계’는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교수인 김은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과정 중이었던 김현숙 씨가 프로그래머로 참여했다. ‘딥 포커스’ 부문은 1회부터 지금까지 프로그래머(현 수석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는 권은선 씨가 맡았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1회부터 인연이 된 사람들이 많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만난 이들, 주위에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열심히들 권유했고, 또 열심히들 참여했다. 그들 모두 젊은 날의 열정을 다했다. 조윤주, 김재의, 한승회, 박현미, 윤용순, 김수진, 한데레사, 이순진, 송지호 등 이루 다 이름을 열거할 수가 없다. 부대행사인 ‘여성영화인의 밤’은 상업영화 쪽의 전은영, 최수영이 자발적으로 나섰고, 10회 기념 <텐 텐>의 총괄 피디를 맡은 현경림과 지금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프로그래머 정우정 씨도 출판을 오랫동안 맡아주었다. 1회 포럼 코디네이터로, 경호원처럼 검정 수트를 입고 이곳저곳 출몰하던 김선아 씨는 지금의 수석 프로그래머로 활약하고 있다. 역시 당시에 번역을 맡았던 김영덕 씨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영화계에서 맹활약 중이고, 역시 번역을 맡았던 남인영 씨는 이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집행위원을 겸한 핵심 멤버로 활약 중이다.


영화제 로고도 한 두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박혜준, 반쪽이 최정현, 전혜정, 금동일 씨가 함께했다. 한강의 흐르는 형상을 담은 ‘W', '여성 Woman'의 이니셜 'W' 이자 여성의 가슴과 필름을 형상화 한 영화제 로고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미국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온 임성민 씨도
사무국장으로 뛰어들었고 영화감독의 꿈을 접으면서 여성영화제 사무국장으로, 프로그래머로, 집행위원으로 지금가지 일하고 있다.
10회야 비로소 <텐 텐>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으니, 그녀로서는 참 많이 돌아온 셈일 게다. 다른 장르의 여성문화예술기획 회원들도 열심히 참여했다. 연극연출가 문성희 씨는 개/폐막식을 연출했고, 박영숙 씨가 소개한 윤동경 씨도 개막식 퍼포먼스 연출에 힘을 썼으며 어려운 경제형편에도 꿋꿋이 버텨준 정승연 씨가 회계 살림을 맡아 애썼다. 무엇보다 싫다는 추진위원장을 억지로 맡아주신 윤석남 선생님은 영화제 종자돈 마련을 위해 아끼시던 그림 20점을 내놓으시기도 하였다. 1996년 12월 그렇게 해서 여성문화예술기획은
영화제 종자돈 1,500만 원을 마련했고, 1997년 1월 회사로 독립해 나간 페미니스트 저널 'IF‘ 의 출발에 그 이름을 선물함과 동시에 500만 원도 보탤 수 있었다.

자금 마련을 위해 무턱대고 찾아가 손을 내민 경우도 무수히 많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최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 송태호님의 도움을 잊을 수 없다. 김지영내과의 김지영 원장, 이화여자대학교 최고 경영자 과정의 박양덕님, 당시 현대의 노정익 전무 등은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할 만큼 크게 도움을 주신 분들이다. 그리고 작은 정성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뛰어 다녔던가? 관심조차 없었던 여고동창회까지 찾아가 도움을 받은 최해경 선배와 박정희 선배의 도움도 잊을 수 없다. 재정 마련을 위해 나는 연말파티를 비롯해 크고 작은 모임을 동분서주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떻게든 치러내야 했기에 한 일이었지만 그 후에도 작은 정성의 후원 회원을 모으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들이는 정성과 시간에 비해 모이는 후원회원과 그 액수가 너무 적은 게 아니냐고 경제적 효율성을 염려하는 분들도 있지만, 관객의 폭을 다양화하고 영화제를 지켜보는 감시자이자 격려자로서 울타리를 든든히 한다는 점에서 후원회원과 그들의 정성은 매우 소중하다.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안팎에서 함께 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자기 일처럼 뛰어준 이현승 감독, CJ의 후원을 주선하려 애쓴 박철수 감독 그리고 중앙대학교 영화학과의 주진숙 교수, 동국대학교 영화학과의 정재형 교수, 김경욱 평론가, 박종원 감독, 임순례 감독은 기꺼이 1회 단편영화 및 비디오 경선 심사위원을 맡아 주었다.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부터 지금까지 뒤에서
애써준 박미해, 박영숙, 홍성혜, 김경희, 안혜경, 박혜숙, 안미라, 서소은희 등과 여성문화예술기획 식구들 그리고 늘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나의 남편 양길승. 모두 감사한다.




10주년 기념제작프로젝트 옴니버스 영화 <텐텐> (개막작)

서울 여성 행복 리케 오팅거
허즈 앳 래스트 헬렌 리
20세기를 기억하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방법 변영주
래빗 이수연
데이트 장희선
드라이빙 미스 김옥분 임성민



어디 제1회 여성영화제를 열기까지만 함께 했던 사람들뿐이랴! 시작과 더불어서 1회와 2회를 이끌어준 사무국장 임성민이 있었고, 1회와 2회에는 쿠션을 들고 다니며 열혈 관객으로 참여했던 김혜승, 그녀의 능력과 사람됨에 반한 나는 갑자기 커져버린 제3회 때는 사무국장을 맡겨 버렸다. 그 후 그녀는 집행위원으로 활약하다가 남들이 말하는 다 늦은 나이 50이 되어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뉴욕 영화아카데미에서 수학 중이다. 어린 딸을 두고 사무국 꾸리기에 바뻤던 4회 김소연 사무국장, 연극학을 공부하고 독일에서 막 돌아왔던 이병희는 5회 사무국장을 거뜬히 치러내고 6회를 준비하다 그만 병이 나 버렸다. 현재 10회 사무국장인 김태선은 1회부터 꾸준히 일했던 토박이로 6회,7회,8회의 사무국을 맡아 운영했다. 그녀 때문에 너무너무 든든하다. 그리고 9회 사무국장 임우정은 지금도 영화화진흥위원회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어디 사무국장들뿐이랴! 2회부터 일했던 소리없이 차분하게 그러나 늘 웃으며 뒷바라지를 하는 도은정 씨는 그 어떤 일에도 자신의 능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그래머 임성민, 권은선, 남인영, 주유신, 김선아, 최선희, 손희정 그리고 객원 프로그래머 사이토 아야코의 얼굴도 다시 떠오른다. 김소영, 변재란, 김은실 교수는 영화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프로그래머의 역할을 일찍이 접고, 2회부터는 책임감과 함께
무거운 논의를 도맡아 할 수 밖에 없는 집행위원을 맡아 고생들을 많이 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영화제가 이렇게 중심을 잘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8회부터는 여성영화인모임의 대표 채윤희 씨도 합류했고(실제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여성영화인과의 연대를 위해 이는 매우 뜻깊은 일이다), 임순례 감독도 항상 유연하고 성실하게 중심을 잘 잡아주며 힘을 실어 주었다. 10회 때 합류한 김영 PD, 변영주 감독은 언제나
어려운 순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함께 해주어 모두들 너무 고맙다.


이렇게 함께 해왔던 많은 이름들을 열거한 것은 무엇보다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다 말하지 못한 수많은 스텝들, 자원활동가들, 후원회원들, 후원해 준 기업,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그 과정에서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 오늘의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우리 모두의 협력의 결과이며 작품이다.
종종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 회의, 프로그램 회의 등은 매우 ‘까칠’할 때가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은 학교 일, 영화 일 등으로 바쁜데 게다가 영화제 일까지…… 그래서 늘 회의는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한 논쟁과 긴장의 시간들이 된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함께 한 모든 이들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힘이고, 또한 나를 버티게 해준 힘이다.

-  이혜경,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