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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집행위원의 눈 4 : 그래, 다시 시작이다!

Herstory에 연재될 글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2008년 10주년을 맞아 제작했던 기념 백서 <<여성, 영화 그리고 축제!>>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기념 백서 <<여성, 영화 그리고 축제!>>는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_보다 _ Records>에서는 1회부터 10회까지 개/폐막식을 비롯한 국제포럼 등의 행사와 상영작들이 총 망라되어 있으며 <_말하다 _쓰다>는 여성영화제의 10년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있습니다. <_Perspectives _Herstory>는 <_말하다 _쓰다>의  영문버전입니다. 
Herstory는 여성영화제의 역사를 기록한
<_말하다_쓰다>에 있는 글을 지속적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호기심은 생활의 동력이다
1992년 여성문화예술기획(이하 여문)이 사간동 남의 사무실에 얹혀 있으면서 연극 <자기만의 방>을 기획하고 공연하여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었을 때 나는 거기 있었다. 나름대로 자기재능을 단련했지만 꿈을 실현하기엔 수많은 장애물이 버티고 있어 욕구불만에 가득찼던 여성들이 마침내 사고를 친 것이다. 다양한 분야의 여성문화예술인들이 제 분야에 대한 각자의 소속감은 뒤로 하고 여성들이 함께 모여 뭔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가슴 벅차던 시절이었다. 대학 다닐 때 수업 빼먹고 들락거리던 프랑스문화원이 사무실 바로 옆이라는 말을 듣고 ‘사무실에 오고가다 프랑스문화원에 들러 영화를 봐야지’ 하는 기대로 여문 사무실에 자주 들른 게 화근이었다. 프랑스문화원은 한 번도 못가보고 어느 날 나는 사무국장이 되어 있었고, 그 후로도 연극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기획하고서야 영화로 고개를 돌릴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요즘 엄청나게 늘었다는 비정규직과 청년백수의 삶을 교묘하게 줄타기하며 여기저기 불규칙하고 무정형한 영화평론과 영화강의로 마냥 바빴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여문이 야심차게 기획한 ‘여성의 눈으로 본 세계영화사’ 강좌 프로그램도 이런 의욕의 산물이었다.



나는 눈물을 배우지 못했다

1993년 열린 ‘페미니즘영화제’가 한국 여성관객이 책에서만 만나던 페미니즘 영화의 실체와 만난 첫 순간이었다면 1997년 처음 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며 여성들과 다양한 만남을 추구하던 여성문화예술 운동과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 등장한 국제영화제의 흐름이 만난 당시의 문화지형을 보여준다. 언제나 호기심이 생활의 동력인 내가 여성영화제를 핑계 삼아 엄청난 영화들을 본 것도 이 즈음이었다. 1회를 치러 내고 의욕이 더 앞섰던 내가 겁이 덜컥 난 것은 2회였다. 기자회견이 내일인데 IMF와 맞물려 아직 영화제에 필요한 펀드가 다 모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순간이었다. 기자회견 연기, 프로그램의 축소 등의 우여곡절 끝에 열린 2회 영화제 개막식에서 이혜경 위원장의 눈물은 당시 우리 사정을 알려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는 아직 눈물을 배우지 못했지만 그 눈물을 기억한다. 세상에는 열정만으로 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 고통 속에서 발견하게 된 지혜들을 함께 나누 경험만으로도 깨닫는 것들이 있으며 함께 숨 쉴 수가 있는 법이다. 집행위원, 프로그래머, 사무국 스텝, 자원활동가라는 수많은 개성들이 함께 모여 집중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 순간들이 지난 아홉 번의 영화제를 만들었다.

그래, 다시 시작이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욕심을 많이 부렸다. 10회를 맞아 국제 포럼의 규모도 커졌고 1회 이후 여성관객의 입장에서 ‘거슬러 읽기’를 전제한 한국영화회고전이 아닌 ‘오픈 시네마’ 부문에서 처음으로 남성 감독들의 영화도 상영한다. 그런가하면 그간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만들어놓은 여성영화들을 잘 차려놓고 관객을 맞았다면, 이번에는 <텐 텐>이라는 프로젝트로 겁 없이 직접 영화제작도 시도했다. 이는 안전하고 평온한 길만을 찾아가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꿈틀거리고 있는 다양한 쟁점들에 말 걸고 싶은 문제의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국이라는 지역에서 영화산업과 영상문화가 만나는 데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역할은 무엇인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다양한 여성영화들을 상영하면서 관객들과 만남과 동시에 세계 각국의 다양한 여성영화인력과 어떻게 교류하고 연대할 것인가 그리고 다양한 여성문화예술진영과의 만남을 통해서 여성주의 문화와 영화를 어떻게 더 도전적이고 풍부하게 할 것인가 등 우리의 앞으로의 10년도 결코 녹록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10회라는 시간을 통해서 나름 호흡조절에 대해서 배운 만큼 결코 서두르거나 멈추지 않고 우리의 길을 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더 깊어진 눈으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을 만날 것이다. 여전히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함께 한 많은 분들이 고맙다. 그래, 다시 시작이다!

- 변재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현재 공동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