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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프로그래머의 눈 : 이제 겨우 열 살, 우리에겐 더 많은 날이 남아 있다!

Herstory에 연재될 글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2008년 10주년을 맞아 제작했던 기념 백서 <<여성, 영화 그리고 축제!>>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기념 백서 <<여성, 영화 그리고 축제!>>는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_보다 _ Records>에서는 1회부터 10회까지 개/폐막식을 비롯한 국제포럼 등의 행사와 상영작들이 총 망라되어 있으며 <_말하다 _쓰다>는 여성영화제의 10년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있습니다. <_Perspectives _Herstory>는 <_말하다 _쓰다>의  영문버전입니다. 
Herstory는 여성영화제의 역사를 기록한
<_말하다_쓰다>에 있는 글을 지속적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10회 관객이 다시 뽑은 영화 [커튼콜]에 상영된 <이티비티티티 위원회> 스틸컷


서울여성영화제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로 명칭을 바꾸고 조직위원회와 집행위원회가 분리되어 독립적인 영화제의 위상을 갖추기까지 12년이 걸렸다. 1997년에 시작해서 10회를 맞이한 영화제는 그 사이 2만 명의 관객에서 약 3만5천 명 관객을 동원, 약 1만5천 명 이상의 관객이 더 들었으며 영화상영도 38편에서 140편의 영화 상영으로 상영 편수가 3배 이상 증가를 했고 이에 따른 해외 게스트들 또한 4명에서 약 35명으로 약 8배 정도 증가했다. 상영관 또한 2개 관에서 5개 관으로 늘어났다. 수적으로만 봐도 규모와 재정적인면 모두가 관객 수와 상영 편수와 비례해서 많이 커지고 증가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제의 규모가 커지는 데에는 재정적인 면이 물론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영화 상영 편수가 많아야 하는 게 핵심이다.


이러한 영화 상영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건 프로그래머의 몫이다. 프로그래머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여성감독의 영화를 관객보다 먼저 본 후 이를 선정하는 일을 한다. 물론 프로그래머는 특별전이나 회고전 등 영화들을 분류해 주는 아이디어를 먼저 낸 후 그에 맞는 영화를 선정해야 한다. 여성영화제의 경우 프로그래머는 영화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동시대 여성주의 이슈나 흐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어야 한다. 프로그래머들이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부문은 영화 선정의 분명한 이유와 상영작의 여성주의적 의의와 여성주의적인 독해이다. 여성영화제는 독특한 전통을 갖고 있는데 관객들에게 여성영화제라는 장을 통해서 여성주의 의식을 부여하고 영화매체와 극장이 갖고 있는 공적인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 프로그래머가 짧은 카탈로그 원고까지 직접 쓰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작지만 중요한 전통이며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가 왜곡되지 않고 관객들에게 직접 닿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하다. 프로그래머의 역할은 영화제 전체에 스며들어가 있다. 포럼조직, 관객과의 대화, 흐름에 맞는 새로운 부문 신설, 프로그램과 연관된 이벤트나 부대행사 등의 조직과 기획, 프로그램 노트 및 카탈로그 원고작성 등이 그것이다. 프로그래머는 영화를 선정하는 역할 외에도 영화제에서 일하는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나 각 팀의 팀장들과 함께 이러한 일을 추진해서 영화제라는 하나의 커다란 이벤트를 완성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는 주로 영화제 준비 초반에는 집행위원들과 아이디어를 내거나 기획을 함께하고 이 과정에서 확정된 기획을 이후 팀장들이나 코디네이터들과 같은 실무진과 함께 추진해서 비로소 스페셜 이벤트나 포럼 등의 행사로 완성시키는 전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10회 신설된 [오픈 시네마]섹션에 상영된 <천국의 가장자리>(좌)
8회 [아프리카 특별전:나의 아프리카]에 소개된 <카레 카레 즈바코 : 옛날 옛적에>(우)
11회 [천개의 나이듦] 섹션에 상영된 <나는 엄마계의 이단아>(아래) 



약 12년 동안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이러한 일을 했던 프로그래머들은 현재 집행위원으로 여전히 영화제에 몸을 담고 있거나 영화제의 든든한 후원자나 조력자로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프로그래머의 구성원의 변화를 통해서 시기별로 구분해보면 크게 1990년대 후반을 1기로, 2000년대 초중반을 2기로, 2008년 10회 현재를 3기로 나눠볼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여성영화제가 처음 동숭아트센터에서 시작할 당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김소영 집행위원, 변재란 부집행위원장(현재 공동집행위원장), 그리고 정수완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낯설기만 했던 여성영화라는 단어를 한국에 토착화시키기 위해서 과거 한국영화를 여성주의의 눈으로 다시 읽는 회고전, 호주 여성영화전, 국가별 특별전 등으로 38편의 영화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희귀했던 당시의 척박한 여성문화 속에서 여성영화를 38편이나 한꺼번에 상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고 상영작들에 대한 여성주의적 독해 역시 새롭고 신선한 시도였다. 2000년대 초중반이 되면서 영화제는 보다 안정적인 조직 구성과 보다 확장된 대중성을 얻기 위해서 영화 프로그램 전체를 책임지는 수석 프로그래머 제도를 도입하고 객원 프로그래머나 부문 프로그래머를 두는 협업 방식을 택했다. 2007년 9회 영화제까지 지속되었던 이런 방식은 보다 많은 프로그래머들이 함께 영화제에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되 수석 프로그래머가 전체 프로그램의 균형을 맞추고 조율을 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장점을 갖고 있다. 이 시기 수석 프로그래머로는 임성민 영화감독, 남인영 집행위원이 활약을 한 바 있고 특별전이나 회고전 등 일부 부문을 맡는 프로그래머로 권은선 집행위원(현재 수석 프로그래머), 최선희 영화진흥위원회 넥스트 시네마 네트워크 담당(현재 한국예술가협의회 사무국장), 김선아 수석 프로그래머(현재 집행위원) 등이었다.

이 시기 영화제는 여성주의의 대중성에 방점을 찍어서 규모와 상영작의 확장과 증가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대중영화 안에 여성영화 등을 소개하면서 독립영화와 주류영화, 예술, 실험 영화와 대중영화 등의 이분법에 매몰되지 않고 둘 간의 중첩되고 상호의존적인 자리에 여성영화를 놓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부터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 중 가장 관객 호응도가 높은 영화제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게 된다.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그간 많은 프로그래머들의 이러한 각고의 노력에 힘입어서 역대 가장 큰 규모의 영화제가 되었다. 현재 영화제는 국가에서 요구하는 국제영화제 기준에 맞춰서 프로그래머 상근을 제도화하고 조직위원회가 새롭게 구성되어 보다 탄탄한 규모와 재정 및 조직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영화제는 이제 변하지 않거나 너무 느리게 변화해서 진부하거나 무관심해지기 쉬운 여성을 둘러싼 완고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새롭게 역동적인 여성주의 수사학 및 문화 정치학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이주 여성, 비정규직 여성,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여성주의자 남성 등이 함께 하는 연대의 정치학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역대 프로그래머들이 11년 동안 바래왔던 것은 아마도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여성 내의 차이를 인식하지만 그 차이로 인해 서로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걸로 끝나지 않는, 분리주의에서 분파주의로 끝나지 않고 그 싸움에서 더 큰 연대를 이루는 새로운 여성주의의 장으로 그리고 한 줌에 지나지 않는 여성 감독들의 여성을 위한 영화를 양적으로 팽창시키고 예비 여성 감독이 기댈 수 있는 기회의 장이자 생성의 장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이제 겨우 우리는 열 살이고 우리에겐 더 많은 날이 남아있다.


- 김선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9회, 10회 수석 프로그래머 (현재 집행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