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아름답기에 더욱 처절했던 연기자, 조미령

아름답기에 더욱 처절했던 연기자, 조미령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9탄 조미령 

 

 

한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조미령은 체구가 작은 편이어서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과의 키 밸런스가 맞지 않아 카메라맨들이 고심했다. <춘향전>에서는 이도령의 이민, 향단의 노경희가 장신이기도 했지만 촬영을 맡은 유장산은 작은 상자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 위에 여배우를 서게 해서 키를 보충했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 그 영화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개봉되어 상처 입은 우리들 가슴을 어루만져주고 여기 한국 영화가 있다고 소리쳤다. 을지로 국도극장은 관객으로 넘쳤고 은행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입장권을 판 현금을 가마니에 담아 가던 시절, 조미령을 따를 여배우는 아무도 없었다. 

 

  얼굴 예쁘고 연기력이 뛰어난 여배우의 남편은 명프로듀서 이철혁. 그들 사이에 아들, 딸이 있어 가정적으로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조미령의 운명도 곤두박질칠 때가 왔다. 남편이 죽고 출연이 뜸해져 생활고가 닥쳤다. 그래서 업소에서 만난 하와이 출신 초이씨를 따라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을 떠났다. 그때 일이 너무 급히 진척되어 살고 있던 상도동 집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되는데, 그 사나이가 후에 큰 정치가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조미령  ©한국영상자료원

 

 

  1982년 나는 하와이영화제에 갔다가 조미령을 찾아 그곳 대원사로 간 일이 있다. 독실한 신도가 된 그녀는 여러 가지 일을 맡고 있었다. 영화를 더 하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애매한 표정을 했다.

 

  내가 조미령을 만난 것은 1956년 <배뱅이굿> 조감독 때였다. 입이 예쁘고 눈에 우수가 잠긴 여배우라고 생각했다. 몇 년 후 1961년 내 작품 <일편단심>에서 조미령을 캐스팅했다. 상대역 신영균은 신인 시절이었고 이예춘이 공연을 했다. 이 영화에는 남녀 주인공의 어린 시절이 나온다. 우리집 둘째 아들이 신영균을 닮았다고 뽑혔는데 제작자의 딸은 조미령을 닮지도 않았지만 밀어붙였다. 두 아이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복건을 쓰고 어른들 틈에 끼었다. 눈부신 조명이 스튜디오를 대낮같이 밝히고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 아이는 겁에 질려 주위를 돌아보다 최남현이 쓴 검은 뿔갓을 보고 ‘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더니 옷을 벗어 팽개쳤다. 난감한 순간이었다. 배우가 촬영을 거부하다니! 아무리 달래도 말을 듣지 않았다. 난감한 시간이 흐르는데, “얘, 너 한번 해볼래?”하고 조미령이 구경꾼 중에서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다. 그 아이가 주섬주섬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태연히 앉았다. 그 아이는 동생 촬영을 보러 온, 지금은 성형외과 의사가 된 우리 집 큰아들이었다.

 

  1964년 명동에 하나밖에 없던 패션양복점 주인 이종벽은 동양영화사를 만들고 임희재 각본 <니가 잘나 일색이냐>로 문을 열게 됐다. 내가 메가폰을 잡았는데 본처 황정순, 첩 조미령 그리고 뻔뻔스러운 남편 역에 김승호를 골랐다. 그런데 김승호가 제의를 했다. 여자들 역할을 바꾸면 더 재미있을 거라고. 그간 창밖의 여자를 단골로 해온 조미령이 우둔한 첩 황정순을 두들겨 패는 장면을 상상하며 그의 말대로 배역을 바꾸었다. 촬영에 들어갔다. 미모로 보면 본처 조미령이 단연 아름다운데, 영감은 늘 첩에게 ‘얼굴이 잘나 일색이냐 마음이 착해야 일색이지’라고 위로한다. 어느 날 본처는 황정순네 집을 습격한다. 세간살이를 박살내고 첩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조미령은 아름답기 때문에 더 처절하게 보였다.

 

  1963년에 찍은 <굴비>에서는 굴비 한 마리를 먹었다고 얼마나 시아버지를 다그쳤는지 김승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미인이 연기를 잘하면 더욱 인상이 깊어진다. 아들 딸들은 잘 성장했는지 이제 하와이는 서울처럼 좋아졌는지, 조미령은 늘 궁금한 존재다.

    

   

글: 김수용 감독

 

조미령 1929년 경상남도 출생. 8살 때 <임자없는 자식들>이란 연극에 아역배우로 처음 무대에 섰고, 1939년 '청춘좌'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연기를 시작. 영화에는 19살 때 이규환 감독의 <갈매기>(1948)로 입문. 광복을 전후해 갈채를 받던 김신재에 이어 명실공히 한국의 최고 인기 배우로 위치. 이후 영화 180여 편에 출연.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