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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연극배우에서 45년간의 은막의 주연까지, 문정숙

연극배우에서 45년간의 은막의 주연까지, 문정숙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7탄 문정숙 

 

한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 김수용 감독 <피해자>에서의 배우 문정숙(오른쪽). ©한국영상자료원   

▲ 영화 <선과 악>에 출연중인 배우 문정숙(왼쪽). ©한국영상자료원(조희문기증) 

 

 

 

 

    장민기는 문정숙의 외아들이다. 지금 60세쯤 되었을까? 기록영화를 만들며 강원도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 집 장남과 장충초등학교 6학년 같은 반이었다. 그때 문정숙은 우리 동네에서 아들과 둘이 살고 있었는데 퍽 힘들 때였다. 남편과 별거하고 새 남자와 사귀며 영화 일에 쫓기고 있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문정숙을 조금만 더 자세히 바라보자. 언니 문정복은 유명한 연극배우였고 형부 양모씨는 각본가이며 연출가였다. 그들은 북으로 갔기 때문에 나는 만나본 일도, 연극을 본 일도 없다. 다만 그들의 아들 양택조(영화배우)를 젊어서부터 알고 있었다. 문정숙은 조카를 안타까워했지만 그때 별 직업이 없었다. 시동생으로 장일호 감독이 있다.

 

  배우 문정숙. ©한국영상자료원(조희문 기증)

 

 

    사람들이 여배우 문정숙을 좋아하는 것은 그 이름이 정숙하다는 뜻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 문정숙을 본 것은 이만희 감독의 <만추>에서다. 젊은 떠돌이 신성일과 여죄수 문정숙의 만남은 짧고 허무해서 탄식이 나왔고 뜨거운 정사에 관객들은 아연했다. 그러나 나는 여배우보다 감독에 더 끌렸고, 그 후 이 감독의 주연배우는 문정숙이 되고 말았다.

  

    1968년 내 영화 <피해자>에는 문정숙과 김진규가 출연했다. 지금도 종교와 연계된 작품은 힘이 들지만 이창동의 <밀양>만큼만 묵과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본다. 전도연은 설교를 듣던 청중에게 ‘거짓말이야’란 노래를 확성기로 틀어준다. 청중보다 더 놀란 건 관객이었다. 삭발하고 <비구> 촬영을 준비한 김지미가 반대 세력에 굴복하던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나는 그때 설교하는 입을 클로즈업으로 표현하고 신도들을 깨알만큼 작고 무력하게 찍었다. 어떻게든 위선을 고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는 종교를 비판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때 원작자 이범선은 문정숙을 좋아했다. 그래서 가끔 촬영장에 나와 물끄러미 여배우를 바라만 보고 돌아가곤 했다. 나는 우이동 촬영 때 문정숙을 설득해 두 사람의 데이트를 주선했다. 30분만 차 마시고 돌아오라 했는데 3시간이 넘도록 솔밭과 누각을 거닐어 촬영에 지장을 줬던 생각이 난다.

 

    문정숙은 얼굴보다도 머리에 더 신경을 쓰는 여배우였다. 검고 긴 머리에 반한 감독은 <검은 머리>란 영화에서 얼굴 반을 긴 머리로 가리고 나오게 했다.

 

    나는 아직까지 남에게 욕을 먹은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러나 세상에 정숙하기로 으뜸가는 여배우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욕지거리를 전화로 들었다. 새벽 3시 잠결에 들은 수화기에서 쏟아지는 문정숙의 욕설. 그녀는 많이 취해 있었다. 옆에서 만류하는 사내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때 <만추>의 제작자 호현찬은 이만희 감독을 베트남에 보내 <얼룩무늬 사나이>를 찍었는데, 문정숙이 굳이 따라가겠다고 해서 함께 보냈다. 돌아와서 필름을 검토해 보니 여배우는 단 세 컷, 그것도 하늘을 배경으로 찍혀 있었다. 나에게 불만을 털어놓는 제작자에게 “글쎄, 서울 하늘이나 베트남 하늘이나 별로 다를 데가 없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남이야 전쟁을 하든 영화를 찍든, 허니문처럼 보내며 축하했어야 하는 것을 미처 몰랐던 그때가 송구스럽다.

 

    문정숙은 노래도 잘하지만 그림도 좋아했다. 박근자(유현목 감독 부인) 전시회에서 ‘꿈꾸는 바이올렛’을 사다가 방에 걸었는데 벽면이 좁아 어울리지 않던 생각이 난다. 나 개인의 생각은 신상옥·최은희 콤비 못지않은 문정숙·이만희였지만 그때의 시류는 그들을 차갑게 봤다. 장민기가 모든 시름을 훌훌 털어버리고 어머니의 기록영화를 유감없이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글: 김수용 감독

 

 

문정숙 1929-2000년, 평안북도 선천 출생. 보성여학교 졸업 후 극단 아랑에 입단. 예술극회와 신협을 거치며 일급 연극배우로 명성을 얻음. 1952년 영화 '악야'(신상옥 감독)로 데뷔. 1996년 '학생부군신위'(박철수 감독)까지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