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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선천적인 감수성의 지적인 여배우, 윤정희

선천적인 감수성의 지적인 여배우, 윤정희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6탄 윤정희

 

 

한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윤정희의 본명은 손미자. “누가 지은 예명인가요?” 1967년 여름나는 지프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안개>를 촬영하러 가는 길에 물었다그녀는 읽던 책에서 눈을 떼며, “제가 지었는데요조용히 살고 싶어요.” 책에는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조용히 산다는 것과 여배우의 길은 어쩌면 다른 것 인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윤정희는 <청춘극장>(강대진 감독>에서 데뷔를 했지만 두 번째 작품이라 아직 신인배우의 연기력밖에 없어 <안개>의 세련된 현대여성을 힘들게 소화했다그러나 지적이며 포토제닉한 얼굴과 선천적인 감수성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한국 현대영화의 효시처럼 <안개>를 말하게 된다그래서 제14회 아세아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며 동경 사람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윤정희와 감독은 그 후도 같은 계열의 <야행>, <화려한 외출>을 만들었고, 후자는 77년 칸 영화제에 출품된다. 그러나 필름 수송이 늦어 영화제가 끝난 다음 날 현지에 도착해 우리들 마음을 상하게 했다. 그때 파리에 유학 중이던 윤정희는 한국대사관 강당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 영화의 시사를 함으로써 직성을 풀었다. 

  영화 <순애보>(1968)의 여배우 윤정희 ©한국영상자료원


아름다운 여배우일수록 스캔들의 공세가 심하다. 윤정희도 예외가 아니어서 동생이냐 딸이냐를 놓고 어떤 신문사 기자와 오랫동안 싸우다가 결국 기자가 실형을 받고 끝장을 봤는데, 한때 요상한 소문이 떠돈 일도 있다. 높은 사람과 관계를 맺어 그 부인이 분노한 끝에 프랑스로 다음 날 추방했다는 루머는 터무니가 없다. 윤정희는 유학 비자를 받기 위해 일년을 기다린 사람이다.


78년 나는 차범석 희곡 <화조>를 찍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여류화가 나혜석 스토리인데, 상대역 최린에 신영균이 출연한다. 그때는 백건우와 결혼하고 한껏 행복한 신부 윤정희, 그 어머니도 일행에 끼었다. 우리는 봉고차에 짐을 싣고 스위스, 이태리를 찾아 다니며 즐거운 촬영을 했다. 마지막으로 루브르 미술관을 갔을 때 난관에 부딪친다. 관내의 촬영이 불가하다고 여기저기 써 붙였고 감시원이 많았다. 우리는 촬영기를 분해해서 코트 속에 감추고 입장, 화장실에서 조립했다. 그리고 요령껏 도둑촬영을 감행한다. 그런데 모나리자 앞에서 여감시원이 카메라를 막았다. 윤정희가 나섰다. 두 사람의 불어는 불꽃이 튀었다. 끝내는 감시원이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는다. 우리는 그 사이에 촬영을 끝냈다.


지금은 주거 환경이 향상되었다고 하는데, 그 무렵의 윤정희네 파리 집은 소박했다.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을 5층쯤 올라가면 방 2개짜리 아파트가 있는데 하나는 딸 진이가 아기 침대에 누워있고 다른 하나에는 백건우의 피아노가 모셔져 있었다. 세월이 흘러 30대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어 활동하고 있는 딸은 아빠 얼굴과 붕어빵이다.


70년대 말 트로이카는 무너졌다. 문희와 남정임이 신랑을 찾아 영화계를 떠난 후 윤정희는 같이 싸울 상대가 없어지고 작품은 세 사람 분이 밀려왔지만 의욕은 떨어졌다. 유학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작은 꿈이 꽃 필 때>를 남해의 연대도에서 촬영했는데, 비자를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밤마다 밤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윤정희가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백건우이다. 지금은 세계 각국으로 연주여행에 분주한 남편의 매니저로 동분서주하지만 가끔은 서울 연주도 있어 만나게 된다. 무대 위에서 건반을 두드리던 백건우의 그 큰 손. 그 신의 손과 악수하며 우리는 한국음식점에서 술도 마신다. 윤정희는 말한다. “글쎄, 백선생의 희망이 영화감독이었어요. 내가 음악 쪽으로 유도한 겁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백건우의 영화 이야기는 끝이 없다.

  

   

글: 김수용 감독



 

윤정희 1944년 광주 출생. 중앙대 영화전공 석사, 파리 3대학 영화 전공 학사, 석사. 67년 합동영화사의 신인모집에 당선되어 <청춘극장>으로 데뷔, 이후 7년 동안 약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 청룡상, 대종상 등에서 여우주연상만 29번이나 수상. 73년 프랑스 유학, 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해 화제를 모음. 이후에도 2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점차 잊혀지다가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시>에 주연으로 출연, 칸 영화제에 초대되어 10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