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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마른 몸매에 눈빛이 형형한 배우, 금보라

마른 몸매에 눈빛이 형형한 배우, 금보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8탄 금보라

 

 

한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19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충무로는 그 빛을 잃고 영화사들은 변두리로 흩어져 사무실 임대료까지 절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산에 자리잡은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는 위풍당당한 건물에 수십 명의 직원을 두고 쓰러져가는 한국영화의 재건에 고심하게 된다. 그들은 흥행부진의 첫째 이유를 스타 부재라고 봤다. 트로이카 남정임/문희/윤정희가 떠나간 후 정윤희, 유지인 등이 등장했지만 큰 성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의 쇠퇴는 그 원인이 여러 가지다. 우선 관객들이 향유하는 레저산업이 갑자기 확대되고 있는데 반해 한국영화는 늘 그 나물에 그 밥이고 TV의 보급이 예상 외로 빨랐다.



하여튼 영진공이 신인배우를 공모하게 되었을 때 우리 현장에서 일하던 감독들은 심사위원으로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12명을 선발했는데 출연할 구체적인 작품이나 교육시킬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당선자들은 몇 년이 넘도록 썩고 있었다. 나는 그들 중에 상위권으로 뽑힌 강만홍과 손미자를 눈여겨 봐두었다. 동국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사내아이와 고교 3학년인 여학생이 그들이다.

  

78년 파리 유학중인 윤정희를 불러 한말숙 원작 <여수>를 만들 때 상대역 젊은 대학생으로 강만홍을 세웠다. 물론 이름을 강석우라고 바꾸고 데뷔작을 찍었는데 그 성적이 나쁘지 않은 것은 머리에 흰 서리가 섞인 지금까지도 그는 방송 등에서 열심히 일한다. 다음은 손미자 차례인데,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80년 나는 국립극장에서 오태석의 연극 <물보라>를 보고 감동했고, 그것을 영화로 만들 계획을 하던 중 손미자 생각을 하게 된다. 절해의 고도에서 섬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어린 여자를 동첩으로 둔 최남현, 여자의 남편은 머리가 모자라는 머슴 하용수. 이해관계에 얽힌 섬사람들은 서로 물고 뜯으며 일상을 살아가지만 이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 함구한다. 동첩이란 노쇠한 늙은 몸이 회춘하기 위해 젊은 여자를 품고 자는 것인데 여기에 성관계는 없다. 


△ 배우 금보라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조희문 기증



결론적으로 이 작품의 에필로그는 몰락한 권력자의 목을 밧줄로 묶어 끌고 가는 머슴의 모습이 최남현의 말로를 암시하지만, 대통령의 암살 직후라 검열은 그것을 깨끗이 가위질했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손미자는 윤정희의 본명과 같지만 여배우의 이름으로 뛰어나지도 않아 내가 금보라라고 예명을 지었다. 


금보라는 충남 당진 출생이지만 사투리를 쓰지 않아 대사 처리는 무난했지만 체중이 너무 가벼워 바닷바람에 늘 휘청거렸다. 더욱이 물속에서 촬영할 때 중심을 못 잡고 떠올라 큰 돌멩이를 밑에 매달았다. 그러니까 50여 명이 촬영하던 욕지도의 한달 동안 스태프들은 그녀를 여자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단역배우로 처음 출연한 최형인은 후에 한양대 교수가 되지만 그때는 유학에서 돌아온 철부지였고 여관방 공동생활에서 늘 말썽꾸러기였다. 여배우들은 떼지어 그녀의 추방을 외쳤지만 감독이 그것을 말렸다. 이상한 것은 촬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어느 날 최형인 집에서 가든파티가 있었는데, 여배우들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참석한 일이다. 하여튼 금보라는 회초리 같이 마른 몸매에 눈빛만 형형했는데, 드디어 데뷔작 <물보라>를 무사히 끝냈다. 


△ 영화 <도시로 간 처녀>의 배우 금보라(왼쪽)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금호동에 살던 금보라의 아버지가 전화를 했다. “난 목수라 영화 일은 숙맥인데 감독님 수고가 많으셨어유.” 

“딸이 여배우가 됐다는 것은 아버지가 바빠진다는 것인데 잘못하면 사위가 많아질지도 몰라요” 라고 내가 충고했다. 그렇게 착한 아이가 엊그제 TV에서 50대 중년이 되어 유학 가는 딸을 공항에서 폭력에 가깝도록 구타하고 있었다.



글: 김수용 감독


 

배우 금보라 1962년 충남 당진 출생. 안양예술고등학교 졸업. 80년에 데뷔한 작품 <물보라>에 이어 <도시로 간 처녀>(81년, 김수용 감독),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81년, 이원세 감독)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82년부터 KBS 탤런트로 방송연기도 병행하다가 89년 결혼 이후 한동안 활동을 중단, 90년대 중반부터 다시 활동을 재개.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 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