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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갯마을의 여주인공, 배우 고은아

갯마을의 여주인공, 배우 고은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9탄 고은아

 

 

한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나는 20대 장교로서 부산 적기(지명) 미군 보급부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항구도시가 터져라 피난민이 몰려왔지만 가족은 찾을 길이 없고 두 동생은 해군과 공군에 입대하고 있었다. 누군가 살아남으면 가계를 이을 심산으로 삼형제는 육, 해, 공군이 되었다. 군인이라고 고향 생각 안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때 같이 근무하던 미군들도 홈씨크에 걸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G중위는 출산한 아내 걱정이 컸다. 어느 일요일 그와 나는 지프를 몰고 동해안을 달렸다. 바다를 보며 울적한 마음을 달랠 심산이었을 것이다. 기장을 지나 일광에 도착했을 때 넓은 모래밭 끝에 게딱지처럼 어촌이 모여 있었는데 한 아이가 수평선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아빠는 군대 가고 엄마는 집 나가고 할머니와 둘이 산다는 김동경. 10여 년 후 이곳이 ‘갯마을’이란 이름으로 스크린에 소개될 때 그 아이는 커서 내 조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후에 동아일보 희곡 당선이 되었다. ‘갯마을’은 오영수의 단편소설인데 너무 짧아 시나리오 작가 신봉승이 후반 이야기를 꾸몄다. 그 사정을 이야기 하러 정릉 원작자네 집에 갔을 때 바싹 마른 작가는 난초를 매만지고 있었는데, 영화는 감독이 알아서 찍는 거지 소설가가 무슨 간섭을 하겠느냐고 잘라 말했다.


이제 고은아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부산에서 극장을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홍익대학 학생인 그녀는 <난의 비가>란 데뷔작이 이미 있었는데, 얼굴 반을 마스크로 가리고 나와 인상이 뚜렷하지 않았는데 동아일보 기자 출신 호현찬은 영화 제작에 손을 대면서 <갯마을>의 주연으로 고은아를 추천했다. 그리고 그녀의 수영복 차림을 봐야 한다고 중앙청 앞 사무실 옥상으로 신인배우를 끌고 올라갔다. 영화에서 해녀 역을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은아의 상대 역은 신영균으로 정하고 황정순, 이민자, 전계현, 김정옥, 정득순 등 쟁쟁한 여배우 20여 명이 바이플레이어(조연)로 정해졌다. 바다에서 남편을 잃은 젊은 아낙네들은 숙명처럼 홀몸으로 한평생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래도 오매불망 성에서 완전히 해탈할 수가 없어 달 밝은 밤이면 모래밭에 나와 우수를 달랜다. 이때 김소희 명창의 소리가 흐른다. 아마 영화에 창이 소개된 효시일 것이다. 




△ 영화 <월남에서 온 김상사>의 배우 고은아



감독의 고민은 나이 어린 여배우에게 성에 대한 설명을 한다는 것. 나는 부산 출신 나소원 여사를 채용해서 조감독으로 삼고 고은아를 특별 지도하게 만들었다. 같은 방에서 기거하면서 감독의 연출 의도가 적힌 내용을 예습하는 것이다. 그것은 큰 주효가 있어 대낮에 노출이 심한 해녀 차림으로 뜨내기 신영균과 정사를 벌이는데 태연한 연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수십 명씩 구경을 하고 서 있어도 신인배우답지 않게 적극적인 애무를 하던 고은아. 그러나 일상생활의 감정 표현은 익숙하지 않아 시어머니로 분한 황정순의 지도가 많았다. 놈팽이를 따라 안개 낀 갯마을을 떠날 때 여배우는 처음 치마저고리를 입게 되는데, 그 맵시가 상상 외로 아름다웠다. 말이 없고 착한 여성이어서 스태프들이 더 좋아했던 고은아.


작년 여름 기장읍에서 해마다 개최한다는 갯마을 축제에 초대받은 일이 있다. 황정순과 고은아, 나는 단상에 앉아 주최 측에서 시키는 대로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읍장이 무대로 올라와 감독을 껴안는다. 자기가 갯마을에서 전계현의 갓난쟁이로 출연했다는 것이다. 아, 세월의 빠른 흐름이여! 전계현은 바다에서 남편을 잃고 실성해서 바다에 투신하고 늙은 시아버지 노강은 어린 손자를 안고 절규하는 신이 있는데, 그 아이가 이렇게 중년이 되었구나. 공교롭게도 갯마을의 남녀 주인공 신영균과 고은아는 극장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때 주머니 속에 모래알밖에 없던 시절을 잊은 채, 부유로운 여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글: 김수용 감독


 

배우 고은아 1946년 부산 출생. 홍익대 공예과 재학시절 정진우 감독의 조감독에게 발탁되어 65년 <난의 비가>로 데뷔,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에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젊은 과부 역을 연기하면서 배우로 주목 받음. 이후 200여 편의 영화, TV드라마에 출연. 80년부터 15년 동안 CBS 라디오의 프로그램을 진행, 97년부터 서울극장 대표이사로, 현재 사회적 기업 ‘행복한 나눔’ 이사장으로 재직.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 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