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크리틱]

시간의 물질: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

샹탈 아커만 Chantal Akerman (1950-2015)

샹탈 아커만이 지난 달, 10월 5일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늘 도전적이고 독창적이며 예기치 못한 풍경을 선사 했던 그녀의 작품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자신들의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비록 아커만은 자신에게 붙여진 모든 명명과 범주화를 거부했지만, 그녀는 씨네페미니스트들에게 (형식과 주제적 측면 모두에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감독 중 하나였으며, 솔직하고 대담한 레즈비언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고, 이민자와 디아스포라 그리고 국경의 이미지에 고집스럽게 천착한 소수 영화를 창조한 작가였고, 노동의 행위와 제스처의 치밀한 연구자였으며, 무성영화 배우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과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에 통달한 배우이자 구조주의 영화의 대가였다. 그녀에 대한 이와 같은 이름 붙이기는 한 참 더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단 하나의 수사로 규정되기 힘든 감독이었다. 그만큼 아커만은 사회가 정해놓은 한계선을 끝까지 밀어붙여 혁신적인 세계를 창조한 작가였다.

아커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리얼 타임에 관심이 없다. 지속의 시간을 조작한 극적 시간이나 관습적인 영화 시간에도 관심이 없다. 나는 ‘나의 시간’에 관심이 있다…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자신만의 시간 속에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지 않다. 사실 영화를 볼 땐 감독의 시간에 지배 당한다. 그러나 시간은 모든 이들에게 다르다. 나의 5분은 당신의 5분과 같지 않다 … ‘영화를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라고 말하는 건 내게 칭찬이 아니다. 내 영화에서 당신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신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시간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내 영화를 보며 관객들이 저항감을 느끼는 이유다. 내가 다른 누군가의 삶에서 두 시간을 앗아갔기 때문에.”

그녀는 이제 영원히 그녀 자신만의 시간으로 떠나가버렸다.

그녀의 삶과 작품과 시간을 기리며, 영화학자 이본느 마굴리스의 아름답고 예리한 <잔느 딜망> 논평을 싣는다. 

Chantal Akerman from Fandor Keyframe on Vimeo

시간의 물질: <잔느 딜망, 코메르스가 23번지 브뤼셀 1080>

이본느 마굴리스


<잔느 딜망>은 정지와 구속, 시간과 가정의 불안을 연구한 샹탈 아커만의 놀라운 걸작이다. 이 영화는 한 인물의 매일 반복되는 가사일을 정제된 롱 테이크로 연이어 담아내며 관객들이 영화의 물질성, 즉 문자 그대로의 지속(duration)을 즉각적으로 경험하게 하고 이 여성이 하는 일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관객들은 3시간 21분 동안 잔느가 요리하고, 목욕하고, 아들과 저녁을 먹고, 식료품을 사러가고, 잃어버린 단추를 찾아다니는 것을 본다. 각 몸짓과 사운드가 우리의 마음 속에 각인되고 익숙한 리듬과 예측되는 행동이 평정 상태를 형성하게 되면, 우리는 점차 잔느의 질서를 향한 욕망에 공모하게 된다. 잔느의 예측가능한 일정과 아커만의 미니멀리즘적인 정확성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잔느가 오후에 매춘을 하고 있다는 암시를 흘려보내거나 그런 기미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신호들은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흐릿하게 자리 잡아 점점 불편하게 만든다. <잔느 딜망>은 역설적이게도 절대적으로 드라마가 필요한 때에 드라마틱하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급진적 실험을 한다.

아커만이 겨우 25살이었던 1975년에 만든 이 영화는 네오리얼리즘이 표방하던 “사회적 관심”에 보다 더 집중한다. 한 여성의 일상을 리얼 타임(real-time)의 형식 속에서 사무적으로 표현한 것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사람의 삶을 90분 간 보여주는 영화를 내세웠던 네오리얼리스트”의 소극적 태도를 모방한 것처럼 보인다. 전후 영화와 비디오 아트에서의 평범한 부엌 장면(<움베르토 D>,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 <부엌의 기호학>)은 새롭게 정치화된 에너지로서 내포적 리얼리즘의 기호가 되었다. “이미지 사이의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는, 관습적 재현을 부정한 아커만의 이런 장면들은 강한 페미니스트 억양 속에 네오리얼리즘적 충동을 부여한다. 그러나 <잔느 딜망>은 단순히 전통적인 영화를 교정하는 것을 넘어서 구조적 경제의 가르침을 준다. 영화는 일상에서 해야하는 일들은 충분히 시각화해 보여주는 반면, 선정적인 잔느의 매춘 장면은 잘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조합으로 인해 저녁 요리 시간은 더 오랜 지속 시간을 갖게 된다.

아커만은 각본 작업을 어느 정도 마친 밤에 불현듯 “최종” 형식을 갖춘 영화 전체를 말 그대로 “보았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후 그녀는 서브 플롯과 부차적인 인물들을 없애고 아파트에 있는 잔느에게 완전히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잔느의 자매인 페르낭 이모만이 편지 형식으로 드러난다. 잔느는 기도문을 읽는 듯한 단조로운 톤으로 아들에게 편지를 읽어준다. (아커만이 연기한) 이웃은 문 가에 서서 자신의 남편의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가게에 갔는데 어떤 요리를 할지 결정하지 못해서 정육점에서 자신 앞에 줄 서 있던 사람이 주문했던 것과 같은 고기 부위를 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코 대충 넘어가는 일 없이 이상할 정도로 자세하고 장황하게 늘어 놓는 영화의 독특한 독백들은 젠더화된 억압의 형식을 표현한다. 잔느의 결혼, 아들의 오이디푸스적 생각, 성적 불안을 내뱉는 말들, 그리고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한 “다른 장면”, 즉 생략된 오후의 밀회를 경감시키는, 늘어진 장황한 시도들이 그에 해당한다.

<내 마을을 날려버려>(1968)

이렇게 젊은 감독이 이토록 성숙한 주제와 스타일적인 전략을 시도했다는 것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더군다나 이런 시도가 아커만의 작업에서 처음도 아니었다. 가정생활과 비극, 질서와 무질서의 예측불허의 혼합은 첫 영화인 <내 마을을 날려버려>(1968)부터 아커만의 핵심적인 발상 중 하나였다. <내 마을을 날려버려>는 무표정을 한 18세의 아커만이 직접 좁은 부엌에서 청소하고, 부엌을 지저분하게 어지럽히고, 요리하고 창문과 문을 봉하는 연기를 한다. 이 영화는 <잔느 딜망>의 혼란스럽고 압축적인 버전이며, 성숙하고 폭발적인 데뷔작이다. 1950년 벨기에 태생인 아커만은 나치를 피해 폴란드를 떠난 유태인 부모를 두었다. 아커만은 영화학교에 입학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고 독학을 했다. 그녀는 <내 마을을 날려버려>의 제작비를 모으기 위해 안트워프 교환소에서 다이아몬드를 거래하는 일을 했다. 1971년부터 1972년까지 살았던 뉴욕에서의 경험은 그녀가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녀는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에 자주 드나 들며 미니멀리스트 댄스와 앤디 워홀의 긴 지속 영화들, 조나스 메카스의 다이어리 필름, 그리고 다른 구조주의 영화감독들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특히 무인 풍경에서 무작위로 움직이는 카메라를 통해 “영화와 몸의 관계, 즉 영화 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 시간에 [내] 마음을 열게 해주었던” 마이클 스노우의 <중앙지역>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1972년 뉴욕에 있는 동안 아커만은 뛰어난 촬영감독 바베트 만골트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방>(1972), <호텔 몬트레이>(1972), <행잉 아웃 용커스>(1973), <집에서 온 소식>(1977)까지 아커만은 만골트와 오랫동안 협업을 이어나갔다. 이 영화들에서 아커만의 고정된 카메라는 예기치 않은 퍼포먼스를 유발했다. <방>에서 카메라는 작은 방을 360도 패닝으로 돌면서 동일한 관심으로 의자, 침대, 사과를 먹고 있는 샹탈, 이불 아래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카메라의 긴 응시 하에서는, 심지어 <호텔 몬트레이>의 빈 복도도 “연기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깊은 심도에서는 복도로 보이지만, 전경화될 때는 선과 덩어리의 표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방의 문이 약간 열려 있어 관객들은 임신한 여자가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장면은 이야기의 정보를 넌지시 흘린다. 아커만은 <호텔 몬트레이>에서 쇼트의 지속시간이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드라마와 묘사된 디테일 사이의 등식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배웠다.

그녀는 내러티브 영화에서도 이 구조주의적 교훈을 적용한다. 연속된 리얼 타임의 사용과 극적이지 않은 쇼트들에서 기대감을 조성한다. 아커만은 베르송의 납작하고 생기 없는 모델[역주-베르송은 배우에게 표정과 심리적 깊이의 표현을 지울 것을 요구했으며 이들을 모델이라고 불렀다]과 드레이어의 심리적이지 않은 엄격함에 빚을 지고 있다. 그녀의 인물들은 긴 침묵 사이에 등장하는 낭독하는 듯한 독백으로 말한다. 아커만은 자신의 모더니즘 예술에 유대교 회당에서 흘러나오던 반복되는 성가의 기억을 연결 시키면서, “나는 대화에서 리듬을 포착하는 것, 즉 이치에 잘 맞지 않는 문장들로 이뤄진 찬송가 영창같은 것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아커만은 대사에 그녀가 좋아하는 제의적인 것들-가정의 일, 유대적인 것-의 숨결을 불어 넣으면서도 대사가 의미를 축적할 수 있게 했다.

아커만은 <잔느 딜망>의 배우 델핀 세리그(<지난 해 마리앵바드에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인디아 송>의 스타)를 1974년에 낭시 연극제에서 만났다. 그곳은 <호텔 몬트레이>의 배경이 된 곳이었다. 같은 해 그녀는 즉자적인 기록(literal)과 연기된 장면 사이의 경계선을 도발적으로 가로지르는 <잔느 딜망>의 면모를 앞서 보여주었던 <나, 너, 그, 그녀>를 만들었다. 아커만은 대담하게 이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로 결심한다. 아커만은 과도하게 엄격한 형식 속에서 그녀 자신이 느끼는 것에 어긋나게 편집을 하며 자신의 불만족을 표현했다. 영화보다는 퍼포먼스 아트에 더 가까운 그녀의 강박적인 몸짓은 연기와 삶 그리고 창작 사이의 경계선을 부식시킨다. 영화는 노골적이지만 스타일화된 두 여성 간의 섹스씬으로 끝이 난다. 순전히 표현적인 미장센이라 할 수 있는 증폭된 사운드와 고화질 이미지는 아커만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아커만은 파스빈더 및 오시마 같은 동료들과 더불어 가장 전면적이고 깊이 있는 접근으로 몸을 영화화한 70년대 감독 가운데 하나였다).

<잔느 딜망>의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낮다(아커만의 작은 키에 맞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프레임 구도는 각도 없이 정면을 향해 있으며 대칭적이다. 아커만은 클로즈 업, 역 쇼트, 시점 쇼트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여자들을 조각조각 나눠” 편집하는 것을 피하고 자신의 프로젝트에 좀 더 페미니스트적인 관점을 불어넣기 위해 “결코 관음증적이지 않게” 편집하려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늘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그리고 하루 동안 아파트를 가로지르는 빛을 정확히 재창조한 만골트의 촬영과 억제된 방식으로 인물을 그려낸 세리그의 연기가 감독의 형식적 선명성을 보충한다.

구성의 측면에서 보면 <잔느 딜망>은 거의 고전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시한 폭탄처럼 작동한다. 실내의 플랑드르식 색상,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날이 자막으로 들어가면서 구조화되는 이야기의 선형성 등 이 모든 작업은 그녀가 유럽 예술 영화와 조금 괴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만들어낸 이미지의 예리함과 매우 자세한 구체성은 가시적인 불안정성을 만들어낸다. 쇼트가 진행되면서 관객들은 그/녀의 몸, 즉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시 이해관계에 놓이게 되는 몸을 인식하게 된다. 설거지를 하는 한 여성의 이미지를 “읽은” 후에 사람들의 관심은 자막, 색상, 행주로 여기저기 방황하게 된다.

이런 지각적 동요는 영화 전반에 만연하는 불안을 가중시킨다. 통제하고자 하는 잔느의 욕구는 그녀의 딱 맞춰진 일정과 메뉴에 의해 증폭되며, 낮게 깔려 있는 분명한 성적 함의로 자율성에 대한 걱정스러운 두려움을 덮어 버린다. 여성의 것으로 규정된 두 가지 역할-가사 일과 성적인 것, 즉 어머니와 창녀- 사이의 연결을 구조적으로 설계하며, 이 영화는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 폭넓게 참여한다. 영화는 여성의 소외, 여성의 노동, 그리고 휴면 중인 여성의 폭력을 고민한다. 예를 들면, 그녀의 고객말고는 유일한 집안 “남자”인 잔느의 아들은 봉사받기를 기대하고 그의 엄마를 통제하려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단추를 잃어버렸네요.” 그러나 이 행동에 대한 아커만의 정확한 감수성은 영화가 논문스러운 주장을 넘어설 수 있도록 밀어붙인다. 잔느가 그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될 지 몰라 겨자색 안락 의자에 앉을 때, 이 불안은 손에 잡힐 것만 같다. 그녀는 잠깐 자신의 가슴, 심장 부분을 만진다. 그녀는 알뜰하게 방을 나가기 전 강박적으로 불을 끄고 나간다. 이런 단순한 몸짓으로 그녀는 하나의 가정 공간에서 다른 공간을, 즉 침실에서 부엌을 분리한다. 아커만은 이런 디테일에 대한 세심한 관심을 가지면서 제한된 공간인 한 여성의 영역(영화 제목에 언급된 주소)에서 추방된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영화는 친숙한 가정의 일을 낯선 것으로 드러낸다. 공개 인터뷰에서, 아커만은 잔느의 일상의 허드렛일과 “가부장제 하에서의 여성 억압”을 바로 등가로 놓는 것에 반대한 바 있다. 그녀는 잔느의 집안일이 아커만 자신의 엄마와 이모가 침대를 정리해주고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을 골똘히 관찰했을 때 목격했던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몸짓이라고 설명한다. 그녀 자신의 친숙한 기억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러한 진술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아커만은 외설적 장면에 의해 다른 장면이 끈질기게 오염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두번째 날이 끝나가는 영화 중반쯤에 관객들은 잔느의 (그리고 아커만의) 반복된 일상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이때 무언가가 일어난다. 아마도 잔느가 남자가 준 돈을 큰 사발에 넣어둘 때 뚜껑을 닫는 것을 잊은 때일 것이다. 어찌 됐든 몇몇 관객은 잔느의 흐트러진 머리를 눈치챌 것이고, 다른 이들은 감자가 탔을 때 뭔가 그녀의 행동이 정돈되지 않았다고 느낄 것이다. 카메라는 부엌 문 가에 있는 잔느를 잡는다. 카메라가 처음으로 습관적으로 반복되던 위치를 바꾸면서 인물의 흐트러진 상황을 알린다. 이렇게 가정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들 중에 가장 우스꽝스러운 몸짓은 잔느가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이 증거[감자를 태운 냄비]를 들고 어떻게 할지 몰라 냄비를 들고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행동일 것이다. 질서의 허약함을 노출시키는 기호로서 포크를 떨어트리고, 설거지는 안 되어 있고, 신발솔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아커만의 프레임은 동일하게 유지된다.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다는 기운을 고조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아커만은 어떤 컷어웨이나 음악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움직이는” 사물의 침입은 잔느가 강박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억눌러 놓았던 반갑지 않은 생각들이 귀환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범인은 분명 시간이다. 잔느의 커피가 맛이 이상해지는 놀라운 장면을 보자. 그녀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취해 커피맛을 고치려 든다. 우유를 바꿔보고, 심지어 의식을 치르듯이 커피 타는 과정을 전부 다시 해보기도 하고, 각설탕 두개를 넣어보기도 한다. 그녀는 커피를 멜리타 필터에 붓고 기다린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모래 시계처럼 생긴 필터는 잘못된 것을 고쳐주지 않을 것이다.

<잔느 딜망>의 이중적 결말은 오염과 잉여, 성적 억압과 폭력 사이의 연결을 재현한다. 흠잡을 데 없는 내러티브 논리와 함께 우리는 먼저 계속해서 스크린 바깥에 남겨져 있던 장면을 보게 된다. 고객과의 섹스에서 오르가즘을 느낀 후에 잔느는 옷을 걸쳐 입고 윗옷을 치마 속에 집어 넣은 다음 가위를 들어 남자를 찌른다. 고조된 감정 없이 절제된 연기로 수행된 이 “클라이맥스”에서 아커만은 일상적인 것과 드라마틱한 것, 즉자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옷입기와 죽이기-을 등치시킨다. “그녀가 테이블에 있는 유리를 칠 때 그리고 당신이 우유가 쏟아질 것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살인 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고 아커만은 말한 적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7분에서 잔느는 식탁에 앉아 있다. 깜박이는 네온 조명때문에 그녀의 얼굴에 줄이 간다. 이 인물/배우가 숨쉬고 단순히 존재하는 잊을 수 없는 이미지는 영화감독이 정지(stasis)를 향한 인물의 욕망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 <잔느 딜망>은 유럽 여성운동의 흐름과 딱 맞아 떨어졌었다. 시몬느 드 보봐르가 편집한 <근대 Les Temps Modernes>에는 “감자껍질 벗기기”라는 글이 실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성매매 여성들의 노동권은 당시 벨기에에서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제 중 하나였다. 이 영화가 보여준 형식적 경제-요리하는 것은 보여주고 성행위는 숨기는 것-를 통한 성적/젠더 정치학에 대한 지지는, 의도는 좋지만 관습적이었던 정치적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들의 인상 깊은 대안으로서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아방가르드 영화에 몸 담고 있던 이들은 주제적으로 여성 문제를 표명하는 이 내러티브가 지속과 연속으로 이루어진 순수 실험영화에 크게 빚 지고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확신했다. 아커만의 구체적이고 낯설게 만든 일상의 재현은 정교한 위업이었다.

이런 명백한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급진적 생략에 의해 인터컷되는 리얼 타임의 덩어리들로 구성된 아커만의 확신에 찬 프레이밍과 내러티브는 쉽게 복제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구스 반 산트, 페드로 코스타, 아피찻퐁 위라세타쿨, 토드 헤인스, 지아 장커, 차이 밍량 같은 다양한 동시대 영화감독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새로운 현상학적 감수성과 관찰을 통한 접근, 그리고 시간의 무게에서 이 영화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잔느 딜망> 이후 아커만은 자신이 이미 통달한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80년대 아커만은 자연스럽게 몸짓과 대화의 리듬으로 관심이 뻗어나가면서 좀 더 생동감있고 속도가 빠른 작품을 만들 구실로 풍자극, 뮤지컬, 코미디의 장르를 취하게 된다. <폭풍의 밤>(1982), <80년대>(1983), <배 고프고 추워>(1984), <윈도우 쇼핑>(1986), <밤과 낮>(1991)이 그런 부류에 해당한다. 분류가 불가능한 내러티브 영화 <집에서 온 소식>과 <미국 이야기: 음식, 가족, 철학>(1988)은 소수 문학의 형식-그녀 엄마의 편지, 이민자의 편지, 유대인 농담-을 재설계된 약속의 땅인 뉴욕 위에 겹쳐 놓는다. 또 다른 영화들은 어떤 것에 고정되거나 속박되는 것에 모호하게 저항하는 인물을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안나와의 랑데뷰>(1978)와 <갇힌 여인>(2000) 같은 영화에서 여성 주인공은 아마추어적인 “음이탈된”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들의 독자성을 표현한다. 엄청나게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가로지르는 아커만의 가장 주목할만한 선물은 그녀의 작업이 보여준 유연하고 변형적인 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연장된 장면은 지루함을 고집스러운 열정으로 바꿔놓는다. 그녀의 다큐멘터리 풍경은 충분히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데자뷰라는 익숙하지만 낯선 감정을 만들어내고, 압축되고 리드미컬한 그녀의 언어는 그 자체로 웃기고 음악적이다. 일상의 몸짓은 기념할 만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강도를 얻으면서 재설정된다.

배우 사미 프레이가 만든 <’잔느 딜망’ 뒷 이야기>를 보면 아커만의 집중력과 인내심을 엿볼 수 있다. 세리그는 그녀가 연기할 인물의 감정에 대해 아커만과 이야기를 나눈다. 아커만은 심리적인 것에 근거한 연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말한다. 머리를 빗어 내리고 미트 로프를 요리하는 행동, 그리고 영화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안은 모두 아커만이 상세하게 써 내려간 각본과 정확한 비전에 들어가 있다. 작고 정확한 움직임은 규범이 된다. 만골트는 프레임 밖의 잔느의 행동-시간을 확인하고 냉장고에 무언가를 두는 행동-이 실제로 일어나기 위해선 카메라가 “빈 장면”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트 로프에 얼마나 많은 계란이 들어갈 지와 같은 실제적인 것들을 찬찬히 그리고 깊게 고민하는 가운데, 아커만의 타이밍의 비밀이 간단한 리허설 순간에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아커만이 손에 든 스크립트를 보면서 잔느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동안 세리그가 부엌 식탁에 옆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다. 세리그는 아커만의 지시를 따른다. “1분 더 기다리세요. 그 다음 일어나서 발코니로 간 후 25초 간 머물러 있으세요. 다시 돌아와서 빗자루를 집어 다시 앉으세요. 이제 저장품들을 훑어보고 앉으세요.” 세리그가 앉는다. 아커만은 세리그를 따라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기다린다. 매우 긴 시간이 흐르고, 감독은 세리그와 잔느의 시간이 그녀들의 몸을 통과해 흐르도록 놔둔다. 그녀는 부드럽지만 확실하게 이 경험이 이어지도록 만든다.

이본느 마굴리스(Ivone Margulies)는 <Nothing Happens: Chantal Akerman’s Hyperrealist Everyday>의 저자이다. 현재 뉴욕대 헌터칼리지 영화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영화학자이자 비평가로 영화에서의 리얼리즘, 퍼포먼스, 연극성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번역: 조혜영)

원문 출처: A Matter of Time: 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 <The Criterion 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