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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10회(2008) 영화제

<4.13> [감독과의 대화] <낮은 목소리2>의 변영주 감독


[감독과의 대화] <낮은 목소리2>의 변영주 감독

영화제가 중반으로 접어들던 13일(일) 오후 2시. 10여 년 전 세상에 나왔던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다시 한 번 관객들을 만났다. 열악한 제작 환경 속에 단 2벌만 만들어졌다는 영어 번역판, 그것도 Beta 본으로 제작된 것이라 화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거칠고 평면적이었기 때문일까. 화면에 두드러진 입자가 그대로 가슴 속에 파고드는 듯 영화의 느낌은 은근하면서도 제대로 강렬했다. 조용한 객석에는 돌아가는 영사기 소리마냥 훌쩍임이 끊이지 않았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3부작(<낮은 목소리>, <낮은 목소리2>, <숨결>)’ 중 두 번째 작품인 <낮은 목소리2>가 상영된 70여분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마련된 관객들과 변영주 감독과의 만남의 자리는 이 영화의 기획단계 에피소드로부터 시작되었는데, 3부작의 하나인 작품의 특성상 3개의 작품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 만남은 스케줄 상 다른 GV 행사보다 조금 길게 할애되었던 시간과 유쾌한 관객들, 그리고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감독의 답변들 덕에 그야말로 말! 말! 말! 말의 향연이었다. 다음은 질의응답 내용을 주제별로 묶어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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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 3부작 혹은 <낮은 목소리2>의 시작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1993년 기획된 <낮은 목소리>의 시작은 우연히 합정동에서 할머니들을 만나면서였다. 3개월 동안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100여개의 방송사를 감당한 적도 있는 할머니들은 내가 그저 영화감독이라는 이유로 영화를 찍으려고 간 것조차 아니었던 나를 내쫓았다. 나는 오기로,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야’하는 심정으로 8개월을 꼬박 그곳으로 출근을 했다. (웃음)

“화투칠 줄 아나?”
그즈음 2편의 주인공 강독경 할머니와 친해지게 되었다. 그녀가 몸이 아파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온천 여행을 가지 못하고 집에 남았던 날,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내게 “화투칠 줄 아느냐”고 말을 걸고 말았다. 아무도 아는 척 하지 않던 내게 말을 걸고 친구들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할머니가 내게 할머니들의 약점을 하나하나 알려주었고, 그렇게 할머니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하느님이 내게 드디어 이런 선물을 주시는구나!”
첫 촬영은 할머니들이 숙소를 옮기던 이삿날 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몰랐다. 할머니들은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이 살 것이라고 하면 세 주기를 꺼려하던 사람들 때문에 그 사실을 숨겨야 했고, 집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구한 집은 도배도 되어 있지 않고 쥐도 나오는 그런 집이었다. 할머니들만 있어 일이 많을 거라 예상하고 이삿짐센터 사람들은 도망을 갔다. 마당에 쌓인 짐 위에 다들 막연히 앉아있는데 눈이 내리더라. 그 때가 4월이었다. 8개월 간 그렇게 홀대를 받고 고생하게 만들더니 ‘아! 하느님이 드디어 이런 멋진 장면을 내게 상으로 주시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찍을 수가 없더라. 그 길로 스태프들과 도배하고 쥐도 잡고 배선공사도 했다. 그 뒤로 할머니들이 밥도 주시고 반겨주셨다. 그렇게 반년이 더 지나고서야 영화를 시작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1편을 찍고 빚이 7천만 원이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했는데 할머니들이 나름대로 기획을 하고 아이디어 있다고 자꾸 우기시면서 제안한 것이 2편이었다. 일본 독립 상영에서 만난 사람들의 도움도 받고 이래저래 시작하게 되었다. 제작은 계속 그곳에 살면서 했는데 필름이 비싸서 자주 찍진 못하고. 살면서 외워지는 것들이 있지 않나? 할머니들의 동선이 예측 가능했고 그래서 거의 예측하면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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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2>를 만들면서 힘들었던 점

“슬프거나 혹은 돈이 없거나”
강독경 할머니와는 서로 사귄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폐암으로 6개월 선고를 받은 그분의 죽음을 다룬다는 것은 그래서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힘든 작업이었다. 지금도 스태프들은 중앙(아산)병원에 안 가는데 안 좋은 기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응급실에 실려 갈 때마다 너무 가슴 아프면서도 한편 이제는 영화가 끝나나 싶기도 했다. 1년 6개월을 사셨는데 제작비가 너무 없어서 나중에는 병원에서 스태프들이 할머니 때문에 가슴 아파서도 울고, 살아나시면 영화를 다시 이어가야 하니까 돈을 구해야 하는데 돈을 못 구해서도 울었다. 서로가 못할 짓 많이 했다.

“이틀에 한 번 아닐까요?”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이틀에 한 번 아닐까요?(웃음) 다른 작품 했을 때도 그랬지만. 이 작품은 할머니가 응급실에 실려 가시고 호흡기 달고 유언처럼 말씀 하셨을 때 특히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살아남은 할머니들 보며 많이 치유 받았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그분들이 씨를 뿌리는 장면이다. 재미있는 건 그분들조차 씨라고 생각하고 뿌렸던 그것이 사실은 비료였다는 거.


<낮은 목소리2> 제목과 내용에 대해

“점쟁이가 무조건 길게 지으라고 했어요.”
<낮은 목소리>는 영어 제목 <The murmuring>으로 먼저 정해진 후 그에 따라 붙여진 이름인데, 개봉 전에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무조건 길게 지으라고 해서 <낮은 목소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2>가 되었다. 2편 제목 역시 영어가 먼저 정해졌는데 아는 분이 정해둔 책 제목을 빼앗았다. 당시 <투캅스2>가 흥행이라 우리나라 제목은 <낮은 목소리 2>.(웃음)

“그게 삶인 것 같아요.”
(호박이 나오는 장면은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큰 틀과 관계가 없어 보이고 음악도 경쾌하다. 이유는?) 그게 삶인 것 같아요. 누가 죽는 상황이라고 해서 모두가 1달 내내 슬프고 우울한 것은 아니거든. 할머니가 호박 딸 건데 빨리 찍으라고 강요했고 나는 찍을 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문득 즐거워져서 찍게 되었다. 음악도 일부러 오버해서 넣었다.


변영주 감독, 감독의 생각들

“그분들은 측은한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관객들이 액티비스트가 될 만한 방법?) 일단 가장 쉽게는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건립에 기부하라. 할머니들은 십 수 년 간 투쟁하여 유엔에서 성범죄가 전쟁 범죄에 포함되도록 만들고, 그래서 잔악하게 피해를 당하고도 보상을 받지 못했던 보스니아 전쟁 성범죄 피해 여성들이 보상 받게 해준 장본인들이다. 우리는 이분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무능해지세요.”
감독이 되고 싶으면 무능해져라. 졸업 평점 1.98. 그 어떤 능력도 없고 취직 불가능. 그런 내가 영화감독 하겠다고 하니까 아무도 안 말리더라.(웃음) (질문했던 관객이)말한 것처럼 여자라서 감독이 되기 힘든 것은 별로 없다. 감독 되는 것은 남자고 여자고 다 힘든 것 같다. 상업영화를 하면서는 팀이 커지니까 소통의 문제가 가장 컸다. 감독들은 진짜 말 연습도 한다. 영화판은 사실 여성에 대해 원활한, 보다 나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외에 무능한 내 자신이 좋다.”
(인터넷 등 다른 매체에는 관심 없느냐는 질문에) 대답이 짧아서 죄송한데, 관심 없습니다. (웃음) 29살 때부터 2년에 1편 씩 영화를 만들었다. 훌륭하지 않나? (웃음) 스스로 안식년을 주며 즐거웠다. 난 영화 만들어서 행복하고, 그것 외에 아무 것에도 능력이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게 참 행복하다. 더 바라는 것은 관객들도 즐거웠으면 하는 것. 지금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를 시나리오로 각색하고 있다. 이 영화가 방점을 찍어서 많!은! 관객들에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4년 뒤 선거에서 20석 정도… 노회찬, 심상정의 당선이…(웃음)                                                


웹데일리 자원활동가 오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