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륨을 높여라!
고토 미나미 감독이 연출한 단편 <학교를 뒤엎자>는 그녀가 좋아하는 감독 존 휴즈의 영화들처럼 특정 집단 내의 문제를 통해 보편적 사회 이슈에 다가간다. 일본 시즈오카 현의 한 공립학교. 야구부와 관악부의 지역대회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그 아래서 교사들이 등교하는 학생들의 복장을 검사하고 있다. 그런데 누구일까. 누가, 강압적인 규율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는 설치물을 학교 안에 내걸었을까. <학교를 뒤엎자>는 체 게바라 포스터가 크게 걸린 아지트에서 혁명을 꿈꾸는 소년 유타와 친구들 이야기다. 과로로 죽은 친한 언니 소식에 충격을 받은 모범생 나나까지 불온한 모임에 합류하게 되고, 다섯 친구는 교내 반란 퍼포먼스를 함께 기획한다. 대중적 스토리텔링 속에 감독 본인의 자전적 요소를 잘 버무린 <학교를 뒤엎자>는 보수적 일본 사회를 향해 한껏 목소리를 높이는 작품이다.
첫 상영을 앞두고 있다.
서울에는 여러 번 왔었는데 영화제는 처음이다. 아시아단편경쟁 부문에 선정되어 매우 기쁘다. 여성영화제라니! 다른 감독들의 작품도 굉장히 기대된다. 그런데 내 영화는 주인공이 남자다보니 괜찮을까,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걱정된다. (웃음)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영화학과에서 예술 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과정 중에 일본으로 와서 영화를 찍었는데.
컬럼비아대학교 영화학과는 프로듀서 코스로 들어갔는데 막상 하니까 프로듀서는 나와 맞지 않았다. 그런데 도쿄 쇼트쇼츠국제단편영화제에 제출했던 각본이 대상을 받게 됐고, 제작비를 지원받아 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남자 아이로부터 학교의 혁명이 시작된다’는 꽤 오래된 발상에서 출발했다. 일본에는 1960년대 활발했던 학생혁명이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다시 자민당이 오랫동안 집권한 역사가 있다. 후쿠시마 이후로 조금 변화한 감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학생혁명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좋지 않다. 반발심으로 학생혁명 관련 책도 많이 읽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아지트가 실제 나의 할아버지 집이다. 할아버지가 영화 찍기 몇 개월 전에 돌아가셨다. 사람을 불러 함께 술 마시는 걸 굉장히 좋아하셨는데, 돌아가신 후에는 집이 외롭고 쓸쓸해 보이더라. 영화를 제작하면 사람들이 북적이고, 그러면 다시 활기 있는 집으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했다. 극 중 유타 할아버지 캐릭터를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구상했고, 실제 할아버지 소품도 영화에 등장한다.
극중의 강압적인 학교는 일본 사회를 환기시킨다. 현재 일본사회를 향해서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라는 주인공 대사가 있는데, 그게 일본 사회와 나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1년 전쯤 일본에서 과로로 사망한 젊은 사람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근데 그 분이 사실 내가 일본에서 대학 다닐 때 바로 한 학번 위 선배였다. 그 사람은 소위 말하는 우등생이었고 좋은 영업회사에 취직해서 일하다가 과로로 죽었는데, 굉장히 허망했다. 그런데 이런 압력 같은 게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생각해보니 고등학생 때더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거나 좋은 회사에 가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낙오될 거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학습했던 게 고등학생 때였다. 그래서 사회적 이야기를 스트레스가 굉장히 쌓여있는 중고등학생 이야기로 풀어나가고 싶었다.
케이고의 내적 갈등이 영화에서 부각된다. 나나를 두고 케이고와 유타가 벌이는 삼각관계의 구도를 빌렸지만, 유타에 대한 케이고의 감정에는 둘의 문화, 경제적 계급의 차이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 인물을 구성할 때, 유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피터팬처럼 만들고 싶었고, 나나는 공부를 잘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하고 싶은 건 없는 우등생으로 그리고자 했다. 케이고는 현실적, 경제적인 이유로 내가 뭘 해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생각하는 캐릭터다. 허무와 포기에 익숙한 ‘사토리 세대’로서의 내 세대의 이슈가 케이고의 모습에 반영됐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케이고가 나나와 함께 혁명의 기획을 포기하지 않는 걸 보여줌으로써, 당장의 혁명은 포기하더라도 그건 끝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다.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표창식 반란 퍼포먼스 동작이 독특한데 어떻게 구상했나.
시즈오카 현 하마마츠 시 전통축제에 실제로 그런 퍼포먼스가 있다. 움직임은 거기서 따왔고 락 페스티벌의 슬램 같이 중심으로 모여서 흥이 오르는 이미지를 상상하며 찍었다. 하마마츠 시의 전통축제다 보니까 일본의 다른 지역 분들이 보셨어도 저게 뭐지 싶을 것 같다. 내 고향의 정말 큰 축제라 내게는 익숙한 동작이다.
현재 첫 장편을 구상 중이라고 들었다.
아직 초반 단계다. 자이니치 남성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22년간 일본에 살면서 일본인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일본인이었던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이방인의 정체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 남성과 3년간 교제를 하고 있는데, 한국 남성과 교제한다는 것만으로 일본 내 보수적 세대로부터 차별적 시선이 느껴지더라. 나도 그러한데 자이니치 당사자들은 얼마나 차별을 겪고 있을까를 돌아보게 됐다.
첫 연출작인데도 만듦새가 안정적이다. 유학을 가서 본격적으로 영화 공부를 시작한 건가?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영화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는데 하마마츠 시가 워낙 시골이다 보니 영화관이나 미술관 같은 문화공간이 부족했다. 그러다 대학을 도쿄에 있는 곳으로 가니 정말 좋았다. 대학에서 미술 전시 관련 전공을 했고 원래는 갤러리에서 바이어나 큐레이터로 일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마마츠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가 미술관 큐레이터가 돼서 다양한 기획을 하더라도 하마마츠의 어린이들은 볼 수 없을 게 아닌가. 나도 내가 좋아하는 하마마츠의 풍경을 보러 가지도 못하고 도쿄에서만 일할 가능성이 크다 생각하니 외로워지더라. 그러고 싶진 않았다. 당시 넷플릭스 같은 뉴미디어가 뜨고 있었는데, 영화는 데이터만 있으면 어디서든 볼 수 있으니 인프라가 없어도 볼 수 있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영상미디어를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도 누가 봐도 재밌을 영화, 하마마츠 시 같은 인프라가 적은 시골의 아이들이나 나이 많은 윗세대에게도 닿을 수 있는 그런 영화다. 누가 봐도 일단 재밌게 볼 수 있고 그 후에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일본 여성 감독들의 활동은 한국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인가.
일단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성 감독의 수가 현저히 적다. 하지만 속도는 느리더라도 노동환경이나 여성감독 비율의 측면에서 조금씩 상황이 나아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여성감독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이번 영화를 찍을 때도 많이 생각했다. 특히 나이 어린 여성 감독으로서 현장에서 얕보이면 안 된다는 굉장한 압력이 촬영 내내 있었다. 근데 한편으로 연령대라는 게 미묘하다. 젊지 않으면 기회를 잡지 못하는 현실에서 오는 불안도 있다. 특히 광고업계에서 심하다. 20대가 넘어가면 잘 써주지 않는다. 사회 전체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완전히 바뀌기는 어렵겠지만, 나이나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현장을 만들기 위해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
글 김선명(리버스)
사진 조아현
통역 조진영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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