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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탄 복혜숙



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우리 집 거실은 남향집이라 겨울 햇볕이 사정없이 내려 쪼인다. 그러나 유리창 밖 풍경은 역광이라 어둡다. 남산도 그 밑으로 이어지는 집들도 윤곽만 뚜렷했지 구체적인 디테일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에서의 조명은 역광과 순광 두 가지가 있으며 그것이 조화롭게 짜일 때 세련된 영상이 탄생한다. 

그래서 나는 복혜숙을 역광 같은 여배우라고 생각한다. 시각적인 연기보다 드라마의 분위기와 범위를 설정해가는 연기자인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꽤 많은 한국 여배우들에 대해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기록적인 것은 아니다. 내 생애에 만든 109편의 영화를 연출하면서 만났던 여배우들의 인상기가 될 것이다.

복혜숙은 체구가 큰 편은 아니다. 오히려 작게 보이는 균형 있는 분위기의 여인인데 목소리를 들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사람을 매료시키는 저음이 쉴새 없이 쏟아지는데, 음색에 남자를 유혹하는 그 무엇이 섞여있다. 오랜 방송생활에서 얻은 노하우와 여배우로 한평생을 산 관록이라고 생각된다.






◀ 배우 복혜숙 ©한국영상자료원





1962년 여름, 지금은 힐튼호텔 자리가 아직 풀밭으로 남아있을 때 나는 그곳에 판자집을 짓고 김영수의 연극 <혈맥>을 찍고 있었다. 김승호, 최남현, 신영균, 최무룡, 황정순, 조미령, 김지미, 엄앵란 등 당대의 스타들이 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했는데 신성일은 아직 신인 때였고, 복혜숙이 동네 술집 주인으로 참여한다. 사람들은 모두 38선을 넘어온 피난민들로 하루살이처럼 살았다. 

이때만 해도 의상은 배우 자신이 해결했기 때문에 넝마처럼 허름한 것들을 입었는데 눈부신 모시 적삼을 입은 복혜숙은 단연 시선을 끌었다. 뿐만 아니라 주연배우 김승호를 납짝하게 만든다. 화술로 액션으로 거인을 공기돌처럼 갖고 노는 복혜숙이 놀라웠다. 막장에, 주막에서 두 사람의 육탄전이 벌어지는데 남자는 열이 나서 여자를 사정없이 구타하지만 끝까지 지지 않고 대항하는 작은 여배우. 이 장면은 연기가 아니고 실기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으며 두 사람은 평소 감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 <반도의 봄>, <역습>에 출연한 배우 복혜숙 ©한국영상자료원



15년 후 복혜숙은 노쇠했지만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 때문에 나의 97번째 영화 <사랑의 조건>(최인호 원작)에 마지막으로 출연했다. 눈 내리는 산길을 어린 손자와 넘는 노파 역이다. 우리는 눈이 많이 내리는 대관령 꼭대기에 복혜숙을 모셔다가 놓았다. 

앞산도 뒷산도 사방이 눈, 허리까지 쌓인 눈 속을 헤치고 손자를 끌고 가는 할머니의 눈에는 광채가 돌았다. 카메라를 맨 정일성도 휘청거리던 그 길을, 필사의 힘으로 걷는 노여배우의 모습은 연기가 아니고 실기였을 것이다.




1957년 여름, 구(舊) 온양 읍에서 나는 육군대위 군모를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촬영현장에 있었다. 군영화를 찍다가 양주남 감독의 조감독이 되어 <배뱅이굿>에 참여한 것이다. 

이때 체험한 여러 가지 일들이 그 후의 내 감독생활에 늘 묻어 다녔지만 촬영기사의 속옷, 양말을 조수들이 빨고 감독은 조감독에게도 콘티뉴티(촬영 대본)를 보여주지 않던 일은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주연배우 조미령 외에 복혜숙과 석금성이 출연했다. 두 사람은 사이가 나빠 각기 다른 민박을 했는데, 그때 서로 비방하던 말들이 젊은 장교의 가슴에 꽂혀있지만 여기에 쓸 수는 없다. 




▲  배우 김소영, 최은희, 복혜숙 ©한국영상자료원


내가 30대에 서울시문화상을 탈 때 복혜숙은 선물을 가지고 왔다. 

칠보에 새긴 매화나무와 능상고절(凌霜孤節) 네 글자가 지금도 내 방에 걸려있다. 그는 말년에 칠보에 심취했었다. 

어머니 같고 누님 같던 여배우 복혜숙. 지금 만나면 남자로서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글: 김수용 감독



복혜숙  1904-1982 충남 보령 출생. 목사의 딸로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중 연극, 영화를 접함.  귀국 후 한때 교사로 근무했으나, 극단 ‘신극좌’의 신파극 배우로 들어가 이월화와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배우가 됨. 한국 최초의 연기자 교육기관인 조선배우학교에서 연기를 배우고 ‘토월회’를 거쳐 여러 극단에서 활동하다가, 1926년 조선키네마 창립작품 <농중조>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영화배우로 본격적인 활동을 폄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