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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마스카라로 완성한 카리스마와 기품, 석금성

마스카라로 완성한 카리스마와 기품, 석금성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2탄 석금성



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석금성이 내 영화 <어느 여배우의 고백>에서 전라도 흥행사 이월금을 연기한 것은 1967년이다. 그때만 해도 충무로는 조락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감지 못한 채 열기가 높았다. 골목마다 위치한 영화사는 50여 개. 배우, 감독, 지방 흥행사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으며, 내가 제일영화사를 찾아갔을 때 털보 김완식 사장이 웃으며 맞아주었다. 

그가 내놓은 두툼한 시나리오에는 아직 제목이 붙어있지 않았다. 사운을 걸고 뒷받침하겠다며 들려준 이야기는 ‘김수용 감독이 영화에 출연하고 석금성이 자기(이월금) 역할로 나오는 조건’으로 제작비를 충분히 약속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지방 흥행사가 배역에까지 간섭하느냐고 궁금하겠지만 입도선매하는 제작자로서는 자금을 주는 그 사람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입도선매란 논에 있는 벼를 미리 파는 방법, 즉 완성도 안된 영화를 팔아 그 돈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며, 자기의 주머니 돈으로 제작비를 쓰는 사람은 세기상사 즉 대한극장 한 곳으로 기억된다. 경상도, 호남, 충청도, 경기/강원, 서울 변두리 다섯 군데에서 모아온 돈으로 영화를 만들기 때문에 개봉관은 업자의 독식이 된다. 그것이 충무로를 윤택하게 했을 것이다.


왜 내가 영화에 나와야 하느냐 물었더니, 극장 주인 이월금은 영화에 감독의 얼굴이 안 나와 관객들의 불만이 크다는 것과, 석금성의 카리스마가 합치면 대박 날 게 틀림없다는 주장이란다. 시나리오를 정독했다. 주연배우 김진규, 남정임, 황정순과 같은 중량으로 취급된 감독 역할. 나는 내심 학생극도 해본 사람이 그 정도는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배우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어 거절했다. 결국 제작자의 읍소로 크랭크인을 하게 되고, 첫날 장충단 공원 로케이션에서 나는 카메라 앞에 서게 되었다. 





석금성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흥행사가 돈뭉치를 넣고 다니는 큰 핸드백을 들리고 세무코트를 걸쳤다. 머리를 볶으니 석금성은 누가 보아도 흥행사 할머니 이월금. 분장을 끝내니 두 사람은 얼굴도 많이 닮았다. 물론 석금성의 잘생긴 얼굴을 지워야 했지만. 몸 태도, 걸음걸이도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사투리를 충분히 구사하니 이건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였다. 악덕 제작자로 나오는 허장강을 압도하는 연기력도 좋았다.


석금성은 눈이 약간 사나워 보인다. 그래서 한국영화의 악역을 대체로 떠맡게 되는데, 예를 들면 ‘장화홍련전’의 계모 같은 역할이다. 1961년 내 영화 <벼락부자>에 출연했을 때만 해도 팔도 여인 중의 한 사람으로 큰 역할이 못 되었는데, 고선애 등과 원로배우 자리를 잘 지키며 큰언니 노릇을 했다.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서 한번 소리치면 파장이 컸다. 

한때 미남배우로 잘 팔렸던 이택균이 그의 아들이며 미국에서 돌아온 콧대 높은 여배우 강숙희가 며느리가 되었지만, 개성이 강한 두 사람의 관계는 그 후 알 길이 없다. 


패션 감각이 있고 늘 매니큐어와 루즈가 선명했던 여배우. 마스카라로 눈화장을 선도했던 석금성은 아무리 봐도 요즘 찾을 수 없는 기품 있는 여배우였다. 


▲ 배우 석금성 ©한국영상자료원(조희문 기증)



<어느 여배우의 고백>은 2005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는데, 페미니스트 영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며 한편으로는 60년대 충무로 풍속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장충단 촬영을 끝으로 나는 다시 카메라 앞에 서지 않았으며, 원로 전창근 감독이 그 역할을 해냈다. 계약 위반이라고 소란했던 흥행사를 달래기 위해 첫날 찍었던 한 컷을 삽입해서 무마했지만 그것은 내 영화에 내가 찍힌 단 한 컷의 영상이었다.



글: 김수용 감독


석금성은 1907-1995년, 평안남도 출생. 진명여학교를 다니다 기방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가, 극단 토월회에 입단하면서 연극계의 주목을 받음. 1937년 무성영화 <심청전>에 출연하여 영화배우로도 활동하기 시작, 이후 80세가 넘을 때까지 200여 편의 영화에 출연.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