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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매력적인 음색으로 기억되는 여배우, 전옥

매력적인 음색으로 기억되는 여배우, 전옥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3탄 전옥




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도 전옥의 얼굴보다 목소리를 더 많이 기억한다. 물론 해방 전에 벌써 음반을 여러 장 낸 가수라든가 한 극단을 먹여 살리는 무대 위의 여주인공인 것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가수나 여배우가 보통 때도 그렇게 매력적인 음색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전옥의 목소리는 남자의 가슴을 잘근잘근 씹는 설득력도 있다. 




1960년 봄, 내가 그의 회현동 집을 찾아갔을 때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백조영화사에서 이번 신작을 젊은 감독에게 맡긴다며 시나리오를 내놨는데, 표지에 ‘유랑삼천리’라고 쓰여있다. 이건 신작이 아니고 악극단에서 우려먹던 신파가 아닌가? 나는 그때 코미디를 연속적으로 만들고 있었는데, 그 돌파구를 신파영화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잔째의 커피가 비기도 전에 감독은 투항하고 말았다. 

무슨 말이 그렇게 유창하고 멋이 있는지 지금은 잊었지만, 이 여배우가 출연한다면 무슨 영화든지 찍고 싶었다. 


사장은 남편인 최일, 진행은 동생 전황. 가족으로 모아진 스태프에, 노경희와 <단종애사>로 주가를 올린 황해남, 소위 천재소년 김희철과 할머니 전옥. 소년이 엄마를 찾아 눈물겨운 삼천리를 헤매는 줄거리가 영화의 전부였다. 개봉할 때 타이틀이 <버림 받은 천사>로 바뀌었지만, 할머니와 소년의 눈물이 관객의 가슴을 충분히 적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희극과 비극의 차이를 어렴풋이나마 알았다. 



◀ 배우 전옥 ©한국영상자료원(조희문 기증)



5년 후 나는 <갯마을>에서 전옥을 다시 카메라 앞에 세우게 되었으며, 그녀는 무당이 되어 어부의 혼백을 건지는 역할을 맡았다. 무당은 여배우가 기피하는 배역. 그래서 감독이 앞에 나서서 교섭을 해야 하는데, 전옥은 즐겁게 경남 일광 현장으로 내려왔다. 

바닷바람에 옷깃을 날리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애잔한 목소리로 파도를 향해 망자의 이름을 부르며 뱃머리에서 춤추는 전옥은 주연배우를 능가하는 영상으로 필름에 수록되었다.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해방 전 일본영화 <망루의 결사대>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젊은 날의 전옥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의주 일대에 공장을 만들어 침략의 기지로 삼고 있던 일본, 그리고 그 사람들을 수비하기 위해 경찰을 주둔시켰다. 압록강 건너 만주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마적들이 침략을 노리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들이 우리나라 독립군들이었다. 

어느 겨울 밤, 얼어붙은 강을 건너 습격을 시작한 독립군. 일본 경찰은 당황해서 마을사람들을 결사대 지하실로 피난시킨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아기를 들쳐 업은 젊은 여자가 군중을 향해 소리친다. “너는 저리 가고 그쪽 사람들 이리로 오고, 할아버지는 거기 앉았고 젊은이는 나가 싸워야지.” 서로 발등을 밟으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정리하는 한국여인, 그가 전옥이었다. 같은 또래의 일본 여배우 하라 세츠는 대장의 부인이 되어 고상하게 구는데, 한국 여배우는 천박한 배역을 주던 일본영화에서도 전옥은 단연 빛나는 연기력으로 승부하는 것을 보고 감회가 컸다. 


조선 팔도에서 가장 잘생겼다는 남자 강홍식전옥의 전남편, 그들 사이엔 몇 사람의 아들 딸이 있는데, 매스컴에 종사한다는 아들은 평양에서도 유명하며, 막내딸 강효실은 서울에 와서 연극배우가 되었다. 최무룡이 사위가 되었고, 딸 세 자매 끝에 아들 민수(영화배우 최민수)를 낳았다. 그때 우리는 홍콩에서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모깃소리만한 국제전화를 통해 아들 소식을 듣고 최무룡은 눈물을 흘렸다. 그 모깃소리만한 목소리가 전옥이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 좋다는 인도의 영아복 집에서 아기 옷을 샀다.  훗날 비극의 여배우 전옥은 그 옷을 입은 외손자를 안고 카메라 앞에서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웃음을 웃고 있었다.




글: 김수용 감독


전옥은 1911-1974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 함흥여자보통학교 졸업, 열다섯 살 되던 해 오빠의 권고로 영화에 입문. <낙원을 찾는 무리들>(1927, 황운)의 여주인공으로 데뷔, 이후 나운규의 <잘 있거라>(1928) <옥녀>(1928> 등에 출연. 영화배우로 활동하는 한편 ‘토월회’, ‘극단 조선연극사’, ‘태양극장’ 등을 통해 연극배우로도 활약, ‘눈물의 여왕’이라는 이름이 붙음. 광복 후에는 영화에 전념, 50-60여 편에 출연.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