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편 <의자 뺏기 놀이>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찾은 루치아 키알라(Lucia CHIARLA) 감독을 만났다. 주인공 알리스 리델은 서른아홉의 싱글 여성이자 무직자로, 실업수당을 받으며 끊임없는 구직활동에 매달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혼란스럽고 불행해진다. 난방비를 낼 수 없고, 원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지 못하며,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과 교류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영화는 이 인물을 뒤쫓으면서 자본과 노동, 세대, 섹슈얼리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어느 순간 알리스는 깨닫는다. 그동안의 이력은 값어치 없으며, 구직은 무의미한 시간의 반복임을. 영화가 끝난 후, 어떤 관객은 자문할 지도 모른다. 이제 알리스는 어떻게 살 것인가. 알리스가 알리스로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시작하여 영국, 터키, 캐나다 등에서 상영했다.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의자 뺏기 놀이>를 소개하는 자리다. 오늘(30일)이 첫 상영인데.
독일에서 첫 상영을 했을 때는 많이 긴장했다. 아주 중요한 영화제 이벤트였고, 여러 여성 영화인과 마주하는 자리였다. 어떻게 흘러갈지 방향을 알 수 없어서 관객과의 만남이 자신 없었다. 무대에 선 순간에는 몸이 마비되는 것처럼 설명하기 힘든 기분을 느꼈다. 다행히 많은 관객으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들었고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또한 행복한 여정이리라 기대한다. <의자 뺏기 놀이>가 다루는 주제는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아시아를 비롯한 비유럽권에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는 매우 중요하다. 사회제도 전반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함께 공유하고 싶다.
첫 장편영화임에도 굉장히 노련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캐릭터 구성뿐만 아니라 한 인물을 통해 동시대 사회와 접속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어느 날 영화관에 갔는데 이야기가 굉장히 제한적이라고 느꼈다. 흔히 말하는 ‘러브 스토리’라든가 너무 대중적인 영화뿐이더라. 어떻게 하면 현실과 맞닿은 진짜 질문을 끌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누군가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나와 가족의 이야기이고, 친구나 이웃일 수도 있다. 영화는 정치적이며 사회적이고, 그와 동시에 오락적이라고 생각한다. 세 가지 요건을 잊지 않고 가져가고 싶었다.
주연을 맡은 에바 로에보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강도 높은 연기를 해냈다. 연출자로서 에바 로에보의 어떤 면에서 확신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에바 로에보는 탁월한 배우다. 다른 작품에 출연한 모습을 보면서, ‘만약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저런 배우와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실은 캐스팅 과정에서 프로듀서는 다른 배우를 추천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에바에게 마음을 온전히 준 상태였다. (웃음) 에바는 굉장히 훌륭한 배우로서의 자질을 지녔다.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섬세함과 진중한 태도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접속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대단하다. 후천적으로 노력해서는 얻기 어려운, 매우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이 보기에 가장 만족스러운 장면은 무엇인가.
나체로 촬영한 장면이 있다. 내심 걱정했는데, 배우가 큰 부담을 갖지 않고 자연스럽게 임해줬다. 유쾌한 분위기에서 많이 웃으며 촬영한 장면이라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더불어 극중에서 알리스가 돈을 가져가는 장면이 있다. 두 장면이 나의 베스트 신이다. (웃음)
영화는 알리스가 자기소개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인물이 정확히 화면 중앙에 위치하면서 배경이 인물보다 훨씬 커 보인다. 친구들과의 파티 장면에서는 인물을 최대한 아래에 놓고 천장이 다 드러나도록 촬영하기도 했다. 마치 무언가가 내리누르는 듯한 중압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우선 오프닝에서는 알리스가 처음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관객으로 하여금 집중하게 하고 싶었다. 구직을 위한 프로필을 소개함과 동시에 알리스 자신만의 모습을 표현하길 원했다. 어딘가 모르게 초조하고 남의 시선을 자꾸 신경 쓰는 모습 같은 것 말이다. 파티 장면에서는 공간이 크고 사람이 많을수록 자신을 작게 느끼는 알리스를 보여주고 싶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알리스는 온전히 혼자가 되어 헤쳐 나가야 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이것은 정체성을 위한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었다. 영화 역시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가 깨지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두 번 모두 일을 꼬이게 만드는 재수 없는 사고이지만, 이후 알리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이가 깨진다’는 일이 당신이 속한 문화권에서 속담이나 구어처럼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해지더라. 한국에서는 이가 빠지는 꿈을 꾸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해석한다.
현재는 독일에 살지만, 나는 본래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탈리아 문화에서도 이에 대한 꿈은 안 좋은 일을 의미한다. 보통 주변의 누군가가 사고를 당하거나,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내 경우에는 '변화'에 초점을 맞췄다. 알리스가 웃음이 없는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이가 깨지는 사건을 통해 다시 웃음을 찾게 되는 가능성을 나타내고 싶었다.
배우이자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다. 주로 어떤 주제에 주목하며 작업해왔나.
그동안 다양한 활동을 해오면서, 각기 분할된 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배우에서 각본가로, 각본가에서 감독으로 변화한 경로는 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관심 있는 주제 역시 하나로 정해졌다기보다는 매 순간 달라져왔다. 때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생겨나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지 고민한다. 그런 주제들을 중심에 놓고 작업 중이다. 차기작 또한 특정한 방향으로 주제를 잡아놓지 않은 상태다. 어떤 이야기가 될지 아직은 모르겠으나, 그 시기와 상황에 내가 가장 잘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나 자신과의 연결점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자신의 상황을 떠올리고 또 비교하며 관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관객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알리스의 상황을 떠올리면, 마냥 행복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웃음) 다만 영화는 경력, 노동, 사회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지는 동시에,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이라는 범주 바깥에서 영감을 얻으면서, 삶에 찾아드는 새로운 기회를 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글 차한비(리버스)
사진 조아현
통역 김한얼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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